글
기영재(오광록 분)가 죽었다.
해적 방송을 한 이유로 정치범이 되어 12년의 감옥살이를 한 그가, '힐러'라는 의심을 받고(아니 스스로 힐러라 자청하며) 경찰 수사를 받던 중,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기영재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장례식장, 한때 그와 함께 '언론의 자유'를 위해 해적 방송을 불사했던 친구 김문식(박상원 분)이 찾아와 오열한다. 그리고 오비서(정규수 분 )에게 가장 비싼 비용을 들여 그를 보내줄 것을 주문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족 한 사람없는 오랜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서럽게 추모해주는 유일한 친구, 더할 나위없는 우정이다.
하지만, 김문식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가장 슬프게 눈물을 흘리지만, 그런 김문식과,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는 오비서를 두고, 동생 김문호(유지태 분)는 동전 앞 뒤처럼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내린다. 김문식이 양지에서 그 분의 하수인으로 그럴 듯한 언론의 대표로서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동안, 오비서는 음지에서, 김문식이 할 수 없는 온갖 불법적인 뒤치닥거리를 한다. 기영재의 죽음도 오비서의 사주를 받은 박형사의 범행이다. 김문호는 말한다. 과연, 김문식이, 오비서가 저지르는 모든 범죄를 모르겠냐고.
그렇다면, 김문식의 추모가, 위선, 심지어 위악이라면, 기영재의 억울한 죽음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하얀 보자기가 씌워진 상자에 담긴 기영재, 그 상자는, 슬며시 바꿔치기당한다. 김문식이 가장 슬픈 표정을 짓고 가짜 기영재의 유골함을 들고 장례식장을 나설 때, 또 한 사람 기영재를 사부로 모셨던 진짜 힐러, 서정후(지창욱 분)가 진짜 기영재를 들고 그곳을 떠난다.
처음 기영재가 자기 대신 힐러임을 자청하고 경찰서로 잡혀가 심문을 받다 죽었다는 사실을 안 후, 서정후는, 모든 통신기기를 끊고, 기영재가 남겨 준 아지트에 칩거, 세상과의 소통을 끊었다. 늘 밉다고 했지만, 그 누구보다 그리워했고, 믿었던 어쩌면 그의 유일한 가족, 사부, 기영재가 자기 대신 죽어갔다는 사실을 서정후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늘 컴퓨터 앞에만 앉아 서정후와 소통하던 동업자 조민자(김미경 분)가 그녀의 아지트를 나선다. 그리고 채영신(박민영 분)을 찾아가 서정후의 아지트 위치를 가르쳐 준다. 지금의 서정후를 그곳에서 구출해 낼 유일한 사람이 채영신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판단이 틀리지 않게, 채영신은 서정후를 구출해 냈고, 다시 기운을 차린 서정후는 김문호를 찾아간다.
기영재의 제자 서영후, 그리고 늘 기영재를 낯도깨비라 불렀던 조민자, 그리고 기영재를 형이라 불렀던 김문호는 그리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영재를 추모한다.
뉴스1
그들이 택한 방식은, 그저 골방에서 죽은 기영재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짓거나, 그의 죽음을 억울해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채영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경찰서에서 안타깝게 죽어간, 그 죽음의 복수를 가장 멋지게 해내는 것이다.
그를 위해, 서정후는 위험을 무릎쓰고 경찰서에 들어가, 조민자를 위해 경찰서 보안 망을 뚫고, 다시 박형사의 집으로 찾아가 숨겨진 그의 대포 통장과 기영재를 죽이는데 사용한 독극물을 찾아낸다.
그리고 힐러인 서정후와, 조민자가 함께, 밝혀낸 박형사의 비리와, 그 배후 오비서가 함께 찍힌 사진을, 김문호는 사이버 대응센터 팀장 윤동원(조한철 분)에게 전달하는 한편, 박형사를 검거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취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썸데이'의 이름으로 만천하에 공개한다.
박형사 사건의 말미, 김문호의 앵커 멘트는 비장하다.
'세상에는 언론에서 다루어 지지 않는 숱한 억울한 죽음들이 있다. 그 모든 사건을 다룰 수는 없더라도, 단 하나의 억울한 죽음이라도 거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게 김문호와 서정후, 조민자의 합작으로, 기영재의 죽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드디어 그간 여러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던 오비서가 경찰에 연행된다.
<힐러>를 통해 송지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추도의 방식이다. 죽은 자를 그저 그리워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방식은, <힐러>에서 보여지듯이, 그 억울한 속내를 샅샅이 밝혀내는 것이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드라마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있는 추도의 방식은, 2014년 많은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여전히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향해 던지는 작가의 발언이기도 하다.
같은 날 jtbc 뉴스는, 세월호 인양을 요구하는 유족과 생존자들의 대장정을 보도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그저, 세월호를 인양하여, 숱한 억울한 죽음의 속내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달라는 것! 그리고 손석희 앵커는, '부끄러움'에 대한 논평을 했다. 세월호를 비롯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그것을 이념 논쟁의 먹잇감으로 던져버린 악폐가, 사회 전반적으로 후안무치한 범죄들을 잇달아 벌어지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힐러>에서, 사부를 잃고 분노하며 달려가는 서정후를 붙잡아 세운 것은, 그래서 함께 복수를 하자고 달랜 것은 김문호이다. 그리고, 식음을 전폐하고 실의에 빠진 서정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채영신을 찾아간 것은 조민자였다. 젊은 세대들이, 다시 힘을 얻고 싸울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김문호와, 조민자같은, 어른다운 어른들의, 부끄러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럴 듯한 기자로, 유능한 음지의 해커로 살아왔던 그들이, 자신들이 살아왔던 삶에 대한 반성과 회한, 그리고 그 부끄러움에 대한 실천이 선행될 때, 젊은 세대들은 좌절에서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 작가는 말한다. 그런 그들의 자각과 실천은, 그 반대편에서 쉽게 항복하고, 그 항복을 통해 자신의 입신양명을 얻어낸 김문식의 후안무치함과 비교된다. 비록 김문식이 느네들이 겨우, 몇몇의 느네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비웃었지만, 김문호의 말처럼, 억울한 한 사람의 죽음을 밝혀냈다. 그 끝마저 창대할 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부끄러움을 아는 어른들, 그리고 그 어른들의 뒷받침으로 이제 막 힘을 얻기 시작한 젊은이들, 이들이 함께, 싸움을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추모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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