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란 속담이 있다.
일찌기 유교 문화권이었던 우리 나라에서는 죽은 조상은 확실히 모셨지만,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한 존중이라기 보다는, 그 '죽은 조상의 음덕'으로 현실 세계를 잘 살게 해달라는 현세주의적 욕망이 앞선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단 속담은 바로 그런 우리 문화의 현실적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어 주고 있다.
첫 회 다짜고짜 여주인공에게 '암선고'를 내렸던 <판타스틱> 16부의 대장정을 마치며, 그래도 여전히 여주인공을 살려놓는다. 개똥밭은 커녕, 사랑도, 일도, 삶도 '행복'에 겨워. 하지만 그저 '살려놓았다'라고 마침표를 찍었다 라고 한다면 <판타스틱>이란 드라마에 대한 '오독'이 될 것이다. 남녀 주인공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때론 그가 진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닐까 싶었던 홍준기(김태훈 분)을 통해 인생의 끝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죽음, 즉 웰다잉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남긴다.
암선고를 받으며 시작된 '시한부 로코'
잘 나가는 방송 작가 이소혜(김현준 분), 하지만 방송 작가로서 성공적인 외양과 달리 그의 삶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성공한 작가라지만 막상 새로 들어가는 작품에는 '발연기'의 대가라는 한류 스타 류해성(주상욱 분)이 주인공을 맡아서 대본 리딩에서부터 실소가 터지게 만드는가 하면, 개인사에 있어서도 유일한 혈육인 오빠와 언니는 늘 그녀에게 손을 벌리는 처지다. 바쁜 삶, 기댈 곳 없는 인간 관계, 그런 그녀에게 느닷없이 '암'이라는 재앙이 찾아왔다.
그렇게 드라마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사는 여주인공에게 '암'이라는 데미지까지 주며 최악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뜻밖에도 인생의 암담한 종착역이라 생각되었던 '암'선고 이후 그녀의 삶은 오히려 '역전'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이 드라마 <판타스틱> 16부의 여정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삶을 달리 만든 건 바로 그녀의 주치의 홍준기다. 드라마를 쓰기 위해 도움을 받으러 찾아간 그, 그의 권유로 생각지도 않았던 건강 검진을 하게 되고 '암'선고를 받아 망연자실해 있는 그녀에게 홍준기는 전무후무한 서브남으로 찾아온다. 그녀의 주치의지만, 그 역시 암 투병 환자임을 밝힌 홍준기는 '암'으로, 그리고 그 보다 더 막막한 삶으로 주저앉아버린 그녀에게 '암' 선고가 인생의 끝이 아님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때론 그녀 앞에 발연기 남주로 등장하여 첫사랑의 사연을 지닌 지고지순한 해성과의 연적으로 아웅다웅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좌절하고 절망하는 암환자 그녀에겐 때론 환우로, 때론 주치의로, 그리고 결국은 '죽음'의 멘토로 16부의 여정을 함께 했던 홍준기를 통해 이소혜는 변화한다.
이소혜보다 앞서 암을 선고 받았기에 결국 이소혜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한 그, 하지만 '죽음에의 여정조차, '소풍'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홍준기는 '웰다잉'의 표본을 보여주며 앞서간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소혜에게 선물한 앨범을 통해 드라마 초반 우울한 가정사에 쉴새없이 사건 사고가 터지는 일 속에서 삶의 활기라고는 없던 그녀가 오히려 암 이후 얼마나 밝아지고 활기차 졌는가를 보여주며 결국 삶은 '어떤 병이나 사건'이란 외인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죽은 이후 조차도 이소혜의 '섬망'으로 등장하여, 삶에의 의지를 북돋는다. 그리고 그런 홍준기를 통해 시청자들조차 그를 멘토로 삼아, 삶과 죽음을 반추해보도록 드라마는 유도한다.
죽음의 멘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삶의 멘토가 된 홍준기를 통해, 삶의 절망에 빠져있던 이소혜와, 소혜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던 해성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로코'의 형식으로 그려낸다. 드라마는 '암'과 '죽음'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울하거나 칙칙하지 않고 그 어떤 로코보다 역동적인 사랑과 삶의 과정을 다룬다. 결국 홍준기는 멘토와 서브남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한 후 그의 보람된 인생을 천상병 시인처럼 '소풍'으로 설명하며 생을 마감한다.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웰다잉, 그리고 소풍같은 삶
홍준기를 웰다잉으로 이별한 대신, 드라마는 '로코'의 본분을 살려, 여주인공 이소혜를 사랑의 힘으로 살려낸다. 홍준기는 소풍을 마치고, 이소혜의 소풍은 끝나지 않았지만, 끝나고 끝나지 않고 여부를 떠나 암과 죽음을 화두로 삼았던 드라마는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 의지를 개진한다. 그저 자신에게 몰아닥친 삶에 휘말려 한 세상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소풍'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즐기고 보람을 찾을 것을 주장한다. 그런 잘 죽기 위한 건강한 여정으로서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인해, 암과 죽음을 담은 드라마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삶에 대한 생생한 의지로 가득찼다.
그 덕분에 일 중독이었던 이소혜는 홍준기, 류해성의 사랑을 통해, 일도, 사랑도, 관계에서도 진정한 행복을 되찾았고, 철부지같았던 한류 스타 류해성은 연기 변신은 물론, 최진숙의 손아귀를 벗어나 스스로 책임지는 사랑의 주체로 거듭났다. '로코'답게 사랑하고 성공했지만, 암' 투병을 넘어설 만큼 건강했다. 그것이 가능케 한 것은 이제는 그 어떤 역할에서도 안정적인 캐릭터를 선보이는 김현주의 연기와, '발연기 한류 스타'라는 배우로서는 난감한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며 연기 지평을 넓힌 주상욱,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연적이자, 멘토로 판타스틱이란 드라마의 주제를 넉넉하게 이끌어낸 김태훈의 변신에 힘입은 바 크다.
앞서 <청춘 시대>를 통해 2016년 현실에 걸맞는 청춘에 대한 신선한 해석으로 화제가 되었던 jtbc 금토 드라마는 그 뒤를 이어 또 한번 '죽음'이란 화두를 '로코'로 변주해 내며, 치열한 주말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다. 특히나 <추적자>, <황금의 제국>의 조남국 피디가 jtbc로 이전하며 <라스트>에 이어 새로운 장르로 선보인 <판타스틱>은 여전히 최진태(김영민 분) 일가를 둘러싼 비리를 그려내는데 있어서는 그의 날선 감각이 변함없음을 아낌없이 보여주는가 하면, 발연기 남주에, 시한부에 작가인 여주인공, 거기에 멘토이자 서브남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버무린 신선한 '로코'로 조남국 월드의 가능성을 확장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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