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2012년에 발간된 이토 우지다카의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1934년 일본 나다 학교에서 '기적'을 일으킨 하시모토 선생님의 독서법을 소개하고 있다. 나다 학교에 부임한 하시모토 선생님은, 학생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책을 읽는 방법으로, 3년 간 단 한권의 책을 읽는 독서법을 택한다. 그리고 하시모토 선생님이 선택한 책은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칭송받는 나라 간스케의 '은수저' 이다. 선생님은 교실 구석구석까지 들리도록 낭랑한 목소리로 소설 은수저를 읽어내려가고, 학생들은 책을 천천히 따라 읽어가며, 그 내용과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을 추적하며 때론 샛길로 빠져들며, 철저하게 음미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
(사진; spicy curry님 블로그)
그리고 올해 3월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면서 용인 성서 초등학교에서는, 바로 이 하시모토 선생님의 '기적의 독서법, 슬로 리딩'을 국어 수업 시간에 도입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큐 프라임- 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 3부작은 1부 스스로 읽다, 2부 오감으로 읽다, 3부 생각의 문을 열다를 통해 용인 성서 초등학교의 도발적인 슬로 리딩 실험을 카메라에 담는다.
실험에 들어가기에 앞서 요즘 학생들의 독서 습관이 어떤지 알아본다. 조사 결과 놀랍게도 용인 성서 초등학교 학생들의 독서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하루에 한 권은 물론, 심지어 열 권까지도 읽는 학생들이 있었으며, 40% 이상의 학생들이 한달에 90권 이상의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이 많은 책을 다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있을까? 조금 더 심도 깊은 질문을 통해, 학생들의 진솔한 답을 얻었다. 읽어야 한다기에, 혹은 학교와 학원의 과제로 책을 주워 삼기듯 많이 읽지만, 읽다보면 그저 글을 형식적으로 읽어내리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보'를 중요시하는 세상에, 아이들은, 허겁지겁 다독을 하지만, 정작 그것이 의미있는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해 설문은 회의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무모하지만, 성서 초등학교의 세분의 선생님들은, 한 학기 동안 한 권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는 실험을 하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 선택된 책은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다. 교사들이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한번에 읽어버리기엔 두터운 분량의 책으로, 하지만, 우리 말의 풍부한 어휘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주인공으 성장담이 담겨있는, 다양한 국어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두꺼운 책을 교사들은 하시모토 선생님이 그러하셨듯이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냥 읽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되새김질을 하듯, 책에 나오는 모르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역사적 사실 하나 없이 하나하나 곱씹어 간다. 때로는 선생님이 설명을 하고, 때로는 아이들이 스스로 사전을 찾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그러면서, 처음에 책이 두껍다 난색을 표하던 아이들은, 차츰, 스스로 책에 달겨들기 시작한다. 학교 수업에서 읽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만이 아니다. 몇 달후 읽고 싶은 책을 물어본 질문에서, 학생들이 읽고 싶은 책은 비단 소설이 아니라, 역사, 과학, 상식 등 다양한 분야로 그 흥미가 확산되어져 있었다. 스스로 책을 읽어가는 힘을 키운 아이들은, 이제 그 어떤 분야의, 두꺼운 책에도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과정은 그저 책을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산과 들로 나가, 싱아를 비롯해 책에 등장했던 나무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소녀의 고향인 개성의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맛보는 등, 오감을 통해 책 속의 글을 각자 살아있는 경험으로 살려낸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역사 공부도 빠질 수 없다. 이젠 아이들에게 화신 백화점은 그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백화점의 이름이 아니다. 소녀가 유학 온 서울을 상징하던 그 시대의 상징적 건물로 되살아 난다.
이렇게 책 속의 내용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보던 슬로 리딩은 아이들이 책을 이해하는 깊이와 비례하여, 독서 활동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온 비애'라는 책 속의 추상적 문장 하나를 길어올려, 아이들의 경험을 교차하여 글을 써보기도 하고, 책의 내용으로 신문을 만들고, 글의 배경이 된 일제 강점기의 또 다른 문학 작품들, 윤동주의 '참회록'이나, 김수영의 '사령'까지 찾아 읽게 보고, 시를 직접 써보는 과정에 이른다. 심지어, 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책을 마무리할 즈음이 되자, 아이들은, 책을 그냥 보내기가 아깝다며, 책의 내용을 가지고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며 노래도 만들고, 만화책도 만든다.
학기말, 아이들은 한 학기동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가지고 했던 자신들의 활동을 모아 전시회를 연다. 실제 한 학기 동안 그저 단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수업을 한다하여 내심 미더워하지 않았던 부모들은, 아이들이 모아놓은 성과에 감탄을 한다. 한 권의 책이 문제가 아니라, 단 한 권이라도 스스로 씹어 자기 것을 만드느냐가 독서의 관건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선생님들은 발표를 꺼려하던 아이들이, 책을 스스로 읽게 되자 자기 의견을 발표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쓰는 것 역시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따분하기만 하던 국어 수업을 아이들이 이제는 스스로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 방송이라는 취지에 맞게, <ebs다큐 프라임>은 우리 교육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교육적 실험을 카메라에 담고자 노력한다. 3부작<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 역시 마찬가지다. 단 한 권의 책이라도, 천천히 음미하듯, 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을 100권의 책을 다독한 것보다 더 깊고 넓은 성취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용인 성서 초등학교의 경우, 앙케이트 조사에도 나왔듯이,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능력을 가진 부모들을 둔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의 교육 열풍에 발맞춰 아이들은, 변호사, 의사 등의 장래 희망을 가지고, 논술 수업을 듣고, 부모들이 권장하는 많은 책을 읽는 모양새이다. 그런 아이들의 경우, 오히려 다독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된다. 하지만, 정반대로, 부모 두 사람이 다 취업을 하고,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저소득층 아이들의 경우는, 그 반대로 전혀 책에 관심을 가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게임등에 빠져드는 정반대의 현상도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실제 그런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 혹은 중학교에 올라가 공부를 포기하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한글을 읽어도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되는 독해 불능의 장애를 가지기 때문이다. 형식적 다독의 학생들에게도 슬로 리딩의 혁명은 필요하지만, 책의 재미를 느낄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는, 그래서, 정작 글을 읽어도 독해가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도 슬로 리딩을 통해 책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실험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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