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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겨레 기자 김규원은 영국에 특파원으로 머물었던 경험을 <마인드 더 갭>이란 책으로 응축시켰다. 제목에서 부터 드러나듯이 이 책은 정치, 사회, 문화 등에서 영국와 한국의 다른 점에 주목했다. 김규원이 주목했던 다른 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여러가지 문제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함께 살'고자 노력하는 나라였다. 하루 종일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중계되고, 총리와 야당 대표가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유롭게 겨룰 수 있는 나라, 차별없는 무상 의료 서비스가 이뤄지고, 보행자가 우선이며, 밀어주고 당겨주며 사람이 우선이었던 나라. 김규원 기자는 그런 영국의 장점을 받아들인다면 한국 사회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란 희망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영국은 2016년 6월 브렉시트 투표를 통해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였다. 이 투표 결과를 놓고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 중 유력한 해석은 '가난'에 시달린 노동자 계층 분노의 표출이란 지적이 유효하다. 오래된 제도 속에서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던 영국, 그 영국을 불과 몇 년 사이에 뒤집어 버린 현실은 도대체 어디로 부터 기인한 것일까? 그 해답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 암전의 스크린 위로 자막과 함께 들려오는 건 다니엘(데이브 존스 분)과 복지 상담원 사이의 실랑이이다. 늙은 목수 다니엘, 일하다 쓰러져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의사 소견을 받은 다니엘, 영국의 의료 복지 시스템에서 다니엘은 질병과 관련된 실업 급여를 받고자 하지만, 경직화된 시스템으로 인해 다니엘의 급여는 좌절되고 만다는 내용.
불통의 복지와 인간 상실
영화 속 설정은 상징적이다. 다수의 직원이 일대일 상담을 하는 의료 복지 시스템, 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은 '인터넷의 서류 작성'과 메뉴얼에 의거한다. 상담원은 있지만,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메뉴얼의 복사본들이다. 정해진 질문을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메뉴얼을 벗어나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배려라도 보이면 당장 상급자에 의해 지적을 받게 되는 상황이다. 그런 지극히 관료적이고 경직된 복지 상담 시스템은 현재 영국 복지 시스템의 헛점을 단번에 설득하고, 빚좋은 개살구로서의 복지 사회 영국을 보여준다.
당연히 그런 상황 속에서 마우스를 올리라 하니 진짜 마우스를 들고 올리는, 커서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늙은 목수 다니엘의 대답은 상담원에게 동문서답이 되고, 제재 대상이 되고 탈락자가 당연한 수순이다. 심장이 나빠 일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 따위는 배제가 된 채 메뉴얼에 따라 정상인이 된 다니엘에게는 다시 장황스런 항고 절차나 구차스런 구직 급여 신청 과정이 남을 뿐이다. 다니엘이 우연히 마주친 싱글맘 케이티 역시 마찬가지다. 런던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 겨우 집을 구해 생소한 뉴캐슬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케이티 가족의 생활 급여 역시 약속 시간을 핑계로 보장되지 않는다. 당장 아이들을 학교를 보내야 하고 먹고 살 것이 없는 사정 따위 아랑곳없다.
결국 인간적 배려가 없는, 즉 '인간'이 없는 시스템화된 복지 불통 아래 다니엘은 졸지에 구직 활동을 하러 전전하고, 생전 사용한 적이 없는 인터넷 사용을 하기 위해 고전을 거듭한다. 케이티 역시 생활 보호 대상자를 위한 급식소를 이용하면서도 어떻게든 아이들과 새로운 집에서 살아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 결과 돌아온 것은 평생을 성실하게 일했던 목수 다니엘의 뜻하지 않은 구직 활동 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이나, 번번이 그를 무능하고 불통으로 만드는 시스템뿐이다. 단지 심장이 나빠 일을 쉬라는 의사의 권고를 따랐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다니엘을 구직을 핑계로 사기치는 사람이 되거나, 나이답지 않게 복지 시스템의 응석받이거나 반항아로 낙인찍혀갈 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급여를 받아보려 구직 활동도 해보고, 인터넷 서류도 접수해 보았지만 다니엘에게 돌아온 건 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집의 집기를 몽땅 내다 팔아야 하는 궁색한 처지이다.
그래도 홀로 생활하는 다니엘은 나은 편이다. 노숙자 쉼터를 벗어나 이제 방송통신대학이라도 다녀보겠다고 꿈에 부풀었던 싱글맘 케이티는 자신의 꿈은 커녕 아이들 밥 한 끼을 먹이기 위해 과일 한 쪽으로 허기를 달래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무엇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자존권인 생리대 하나를 구하기 힘들어 극단의 선택을 하고야 만다.
'인간' 그리고 인간을 품지 않는 체재
복지 상담 센터의 벽에 나, 다이엘 블레이크라 대문짝만하게 쓰며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주장했던 다니엘, 영화를 보며 관객이 도달하게 되는 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의 두 가지 물음이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다니엘이 주장하는 바, '인간으로서의 존엄'. 영화 속 다니엘과 케이티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은 너무도 기본적인 인간의 정의라 그래서 관객을 당혹스럽게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끄집어 내지 않아도, 성실하게 일했던 사람으로서의 노년의 권리, 그리고 엄마로서, 여성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에 대한 선언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엄정하게 세운다.
하지만 그런 선언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딛고 사는 이 세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성실하게 일했던 노동자, 두 아이의 엄마, 꿈을 가진 여성을 전혀 품어내지 않는 '인간적이지 않는'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 속 불통의 시스템으로 드러낸 복지의 축소와 왜곡으로 결과된 영국 사회를 통해 드러난 신자유주의라는 제도의 비인간성이다. 영화는 산업사회의 직종인 목수가,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을 지닌 현재 사회 시스템에 적응치 못하는 모습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무용화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속 현실은 현재 영국에서 진행중인 복지의 축소와 그로 인한 복지 사각 지대에서 가난에 몰린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의 삶이지만, 결국 그 본질은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 논리가 국가를 통해 시스템화되어 드러나며 인간의 기본권조차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즉 다니엘의 무너져버린 자존감, 빼앗긴 케이티의 꿈과 생존권은 그저 '인간'이라는 보편적 정의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신자유주의 체제 속 국가가 인간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고발'로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즉 다니엘의 체제 밖 방기는 그가 벽에 자신의 주장을 알릴 때 강력하게 호응했던 거리의 사람들에게 보여지듯이 영국이란 사회 일반의 현실이며, 이는 다니엘이란 사람의 부적응이나 케이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체제 하 영국 사회에서 보편화된 '인간 상실'의 현실이며, 그 체재가 인간을 다루고 있는 방식의 보편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 예전 <빌리 엘리어트> 속 노동 운동을 하던 아버지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복지 수당조차 빼앗기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산업 사회 속 노동 역군으로 그들의 한 표가 소중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커서와 마우스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제재 대상으로 치부되어진다. 시스템은 메뉴얼이란 이름으로 '복지'란 미명아래, 그들의 '생존권'을 말살하고 있는 현장이다. 그들은 애써 노력하여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란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도록 봉사해지만, 정작 이제 늙은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체제 부적응이란 빨간 줄이다. 이민자인듯한 케이티와 그들의 자녀에 대한 냉혹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발전이나, 발달이란 미명하에 벌어지는 '노동'과 '인간'의 방기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다니엘의 처지를 안타까워할 깜냥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최소한의 자존을 위해 노력했던 다니엘에게는 그의 심장 이상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진단서를 끊어주는 무상 의료 시스템조차 우리에게는 없으며, 그 불통의 복지 시스템조차 감지덕지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도 케이티는 찾아갈 무료 급식소라도 있지 않던가. 영화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전율은 체제와 자본 사이 그 어디선가 잃어가던 우리 자신 인간적 자존의 부끄러운 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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