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에 빠져들고 계신가요? 이 드라마를 보면 가슴이 떨리시나요? 혜원(김희애 분)과 선재(유아인 분)의 사랑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꼭 움켜 쥐고 계신가요?

그런데 혹시 얼마 전에 종영한 <따뜻한 말 한디>를 보셨나요? 아니 바로 지난 주에 종영한 <세 번 결혼한 여자>는요?

<밀회>는 40대 여인과 20대 남자의 사랑이야기입니다. 40대의 혜원은 서한 예술 재단 기획실장으로 권력을 쥔 쪽이죠. 선재는 공익 근무를 하며 킥배달을 하는 피아노 천재로 남편의 부탁을 받고 재능있는 피아노 지망생을 찾던 혜원의 눈에 띤 간택받는 입장인거죠. 선재를 만나 함께 연주를 하던 혜원은, 그리고 선재는 음악을 통한 교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음악을 통해 교감을 이루는 사랑이라니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제인 캠피온의 영화 <피아노>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지 않나요?

그런데 만약, 여기서 등장하는 혜원과 선재의 성이 반대라면요?
예술 재단의 기획실장이며 선재를 스카웃하려는 혜원이 40대의 미중년 남자였다면 어땠을까요? 그에게 선택을 당하는 피아노의 천재가 꽃다운 스무 살의 처자였다면요? 그들이 피아노를 통해 교감을 하고, 스무 살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기 보다 스물 살이 많은 남자 선생님에게 대뜸 사랑한다며 키스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런 설정이었다면, 제 아무리 개연성 있는 설정으로 주인공 캐릭터를 그려낸 정성주 작가에, 영화 보다도 더 몽환적인 화면을 만들어 내는 안판석 피디라도, '불륜'이라는 명제를 벗어나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왜 나이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가 만나면 불륜이 되고, 어린 남자와 나이 많은 여자가 만나면 사랑처럼 보이는 걸까요?

(사진; 스포츠 한국)

앞서 말했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보자구요. 
거기 주인공들 중 류재학(지진희 분)과 나은진(한혜진 분)도 사랑에 빠졌어요. 이 사람들 혜원과 선재가 나눈 피아노를 통한 교감이나, 키쓰는 커녕, 손이나 한번 제대로 잡아보았나요? 호텔에 들어갔다가 그냥 나왔다지요.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은 드라마가 하는 20회 내내 불륜이란 분홍 글씨가 찍힌 채 혹독한 댓가를 치뤘습니다.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니, 잠자리를 하지 않아서, 진짜 사랑을 했다고, 류재학의 아내 송미경(김지수 분)은 더 분노했었지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수(이지아 분)와 결혼한 준구(하석진 분)는 결혼 전 만나던 다미(장혜진 분)와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결국 그의 우유부단한 혹은 충동적인 행위들은 은수와의 결혼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지요. 

경우가 다르다구요?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나은진은 모르겠지만 류재학은 분명히 사랑에 빠졌었어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다미는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만큼 준구를 사랑하지요. 하지만 두 드라마는 두 커플의 사랑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은진과, 재학이 저지른 결과에만 몰두하며, 그들이 가져온 가정 파괴에 주목하지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준구나 다미는 거의 파렴치범 수준입니다. 

반면, <밀회>는 혜원과 선재의 사랑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그 사랑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드라마는 작동합니다. 예술 재단과 그것을 움직이는 가진 자들의 개처럼 살아가는 혜원, 그리고 예술적 재능을 가졌지만 현실이 그것을 받쳐주지 않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던 선재, 그들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저 사랑이 아니라, 억압적 현실에 비춘 한 줄기 삶의 희망같은 것처럼 드라마는 묘사해냅니다. 선재는 혜원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실제 스승은 혜원의 남편이지만, 선재는 아니라고 합니다. 진흙 속에서 뒹굴던 자신을 알아봐 준 당신이 자신의 진짜 스승이라고 합니다. 선재의 사랑은 흡사 아기 오리들이 처음 시각적으로 마주한 대상을 따라다니는 '각인'과도 같은 현상입니다. 
자신의 꿈을 병으로 포기한 채 결혼조차도 정략적으로 선택하며 마름으로 살아가는 혜원에게 자신과 같은 병을 가진, 불우한 환경에서 고사되어 가는 선재는 또 다른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짓눌려 가던 자아의 회복이요, 자기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사람들의 머리는 참 합리적(?)입니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자신들이 보고싶은 것만 봅니다. 드라마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그려내기에 앞장섭니다. 여성들이 주시청층인 10시 대의 드라마들은 그래서 누군가의 남편들의 사랑은 불륜으로 정의내리고, 자신들과 같은 여성의 불륜은 사랑이라 이름붙입니다. 더구나 그 어린 남자애랑 사랑에 빠지는 혜원, 아니 김희애는 그 나이에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심지어, 예술 재단 이사장의 뒤를 봐주고, 회장님의 여자를 대줘도, 그녀는 여전히 우아함을 잃지 않습니다. 드라마는 보는 여성들의 꿈속의 자아이자 욕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재는 나이는 어리지만, 여성인 혜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태도는 여전히 우리 사회 남성과 여성의 성적 관계의 틀을 유지합니다. 사랑에 수동적인 여성과 그에 대해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남성, 대신 이전의 남성들이 그들의 날개를 경제적인 것으로 포장했다면, 선재는 대신 나이로 치장합니다. 속된 말로, 나이가 벼슬입니다. 나이어린 백마 탄 왕자가 조만간 늙을 일만 남은 여자 앞에 나타나 당신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그 하나는 '공평하게' 나의 사랑이 불륜만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길 원한다면, 남의 사랑도 그저 불륜으로 낙인 찍지 말고 사랑으로 다시 보아줘야 하는 마음의 자세겠지요. 어쨋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원의 사랑은 불륜입니다.  마흔 살 먹은 여자의 불륜도, 마흔 살 넘은 남자의 그것도 사랑일 수도 있는 거지요. 남자들이 하면 나쁜 짓이고, 우아한 여자가 하면 봐주는 건 너무 비겁한 태도입니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마지막 회 준구와 다미를 맺어준 김수현 작가님의 깊은 속내가 그것이었을까요?

또 하나는, 그것보다는 좀 더 본질적으로, 이제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점점 담아기 힘들어 지는 남자와 여자들의 욕망에 대한 태도입니다. 여전히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 속에 놓여진 사람들의 새로운 사랑은 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아무리 철부지 같은 남편이라도 남편이 있는 혜원의 사랑은 불륜입니다. 류재학의 사랑이 불륜인 것처럼요. 하지만, 무수히 양산되는 드라마 속 불륜들처럼, 어쩌면 이제 우리 사회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담기엔 결혼이란 제도가 너무 경직되거나, 오래되어버린 문물제도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뭐 그런 지점도 한번쯤은 짚어보자구요. 그러면 그 낡은 제도에 목매여 사는 사람들이 너무 초라해 지는 건 아니냐구요? 낡고 이제는 쓸모가 덜해도 여전히 누군가와 평생 믿음과 신뢰로 관계를 꾸려간다는 건 꼭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지요. 그런 행복을 맛보지 못한 혜원의 사랑이기에, 더 안쓰러운 것도 있잖아요. 


by meditator 2014. 4. 1. 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