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진도군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많은 학생들과 승객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고, 아직도 실종자는 채 다 수습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세월호을 잊고 싶어 한다.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냐며, 이제 그만하자고 말한다. 심지어, 경제와 정치 불안을 들먹이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고자 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는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태도도 한 몫을 한다. 세월호 사건뿐만 아니라, 불과 얼마전 부산 대학생 캠프 참사, 그리고 그 이전 해병대 캠프 참사 등, 해마다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등지지만, 사회는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혼비백산하는 것과 달리, 조금의 시일만 지나면 마치 망각증세라도 있는 것처럼, 급격하게 잊어간다. 아니, 잊으려고 애쓴다. 왜? 그토록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해 조급증을 가지며, 외면하고 잊어버리려 하는 것일까?
이런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 대해 ,<ebs 다큐 프라임-데스3부작>이 이야기를 건넨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좋은죽음 나쁜죽음', '비탐 애테르남 Vitam aeternam / 영원한 삶 사후세계', 카르페 디엠 Carpe diem / 현재를 즐겨라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 죽음' 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진 죽음에 대한 사고 방식과, 태도에 대해 논하고, 죽음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고, 죽음을 그저 개인적인 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준비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한다.
왜 죽음이 개인의 일이 되어서는 안될까?
그것은 죽음에 대한 사고 자체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만 해도, 죽음은 인류 공동의 운명이자, 우리의 죽음이었다. 인간에게 죽음은 낯선 것도 아니었고, 별개의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중세 후기 개인주의가 등장하면서, 죽음음 개인의 죽음, 나의 죽음으로 변모되기 시작한다. 과학의 발달은 오히려 죽음을 인간이 두려워 하는 대상으로 더욱 변모시켰다. 과학의 힘이 내가 죽음을 멀리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면서, 죽음은 삶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삶에서 멀어진 죽음은 터부가 되었고, 금기가 되었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소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이 문화에서, 상품가치가 없는 죽음은 더더구나 무시되고 외면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 즉,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죽음에 대한 관념은, 사회적, 혹은 역사적으로 조장된 것이라는 것이다. 세월호 사태 이후, 우리가 가지는 죽음에 대한 권태감, 혹은 불쾌감 역시, 이 사회가 우리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다큐는 설명해 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가장 명백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에서, 덮어버리고, 외면한 죽음에 대해, 인간이 직시하는 순간, 인간의 삶은, 달라지게 된다. 죽음을 말한다고 해서 세상이 더 어두어지거나, 나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만 한 죽음을 인간의 삶 속으로 불러 들어야 하는 이유다.
(tv리포트)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함으로써 삶이 변화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팃포탯(tit for tat) 게임이 제시된다. 게임 이론에서 등장한 방식으로, 두 사람에게 일정량의 사탕을 주고, 가위바위보를 한다. 이긴 사람은, 사탕을 주거나 뺏거나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혹은 손등을 때리거나 악수를 하는 방식으로도 변용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게임이 묘한 게, 먼저 이긴 사람이 사탕을 뺏으면, 다음에 이긴 사람도, 다시 사탕을 뺏고, 먼저 이긴 사람이 사탕을 주면, 다음에 이긴 사람도 사탕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즉, 먼저 한 사람의 선택에 따라, 이 게임은 '화합'의 게임이, '갈등'의 게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게임 과정에서, 한 그룹에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가지게 한다면, 즉 유치원 아이들의 경우, 동화를 읽고 죽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거나, 어른들의 경우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거나 하는 식으로 죽음을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러자,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팃포탯 게임에서 선택하는 결과가 달라졌다. 이 그룹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사탕을 빼앗는 대신, 사탕을 주었고, 상대방을 때리는 대신, 악수를 하는 등, 이타적 행동의 비율이 늘어났다.
즉, 그저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이다. 2부에서 사후 세계을 영적으로 경험했던 사람들 역시 그 이후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 한결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강의로 유명한 셸리 케이건 예일대 교수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삶을 내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삶에 대한 자세가 변화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삶에 영향을 주는 죽음인 것이다.
실제 14주간의 웰 다일 교육을 통해 죽음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거친 사람들은 오히려 행복감이 높아졌다고 한다. 우울증은 감소했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자, 삶의 질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죽음'의 다큐에서 말하는 죽음에 대한 논의는 어떤 것일까? 죽음에 대해 '소프트'하게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누구나 다 죽는 것이므로, 죽는다는 사실에 화내지 말고, 이해를 할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삶을 되돌아 보고, 후회없는 삶을 살도록 하자는 것이다. 즉,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는 자세를 수용하는 것이다.
실제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화가 나토니아 롤스에 따르면, 죽음 자체를 보여주는 그녀의 그림을 통해, 환자 자신은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져, 마지막 까지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그 그림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 지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한 개인의 문제로써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어야 사회 전체의 삶이 건강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다큐는 주장한다.
죽음의 질 1위의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은 죽음에 대한 사회적 준비가 부족함을 깨닫고, 정부가 나서서 죽음의 금기를 깨뜨리고자 노력해왔다. 매년 5월 죽음 알림 주간을 가지고,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진다. 또,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죽음 까페'도 있다. 이 까페에서는 각자 마음 속에 담아두었떤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를 되찾아 간다.
죽음을 맞이하기 좋은 날이라는 행사를 교회에서 벌인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 등장하는 죽음은, 저승사자나, 상복으로 상징되는 죽음이 아니다. 삶과 분리되는 죽음이 아니라, 그저 삶의 한 과정으로 이야기되는 죽음이다.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매우 평범한 일이고, 흥겹게 노래 부르고, 아이들은 설탕으로 해골을 만들며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는 그런 죽음인 것이다. 겁을 먹고, 슬퍼하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당연히 찾아노는 알찬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되는 긍정적 죽음인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세월호 사태처럼, 뜻밖의 사건을 통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는 사고는 견디기 힘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죽음에 대해, 금기시 하지 않고, 좀 더 건강한 사고 방식을 가졌더라면, 지금처럼, 죽음을 애도하는 학부모들을, 외면하고, 폄하하고, 심지어 욕되게 하는 행위들이 좀 줄어들지 않았을까. 죽음 3부작을 통해서라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지고,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죽음은 진정한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다 -모짜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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