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기에 들어선 <인간의 조건>이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단칼을 빼어들었다.
그간 해오던 남자 여섯 명의 '인간의 조건'대신에, 개그우먼 여섯 명의 여성판 '인간의 조건'이 등장한 것이다.
그간 계속되는 남자들만의 예능이 범람하는 가운데, 왜? 여성들의 이야기는 다루어 주지 않느냐는 볼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텔레비젼 주 시청층이 여성이라는, 그 중에서도 리모컨의 향배는 중년 여성층에게 있다는 통계는 제작진으로 하여금 '성'의 변혁을 시도할 엄두를 쉽게 내도록 하지 못해왔다.
아니,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무한도전>이 파업으로 장기 결방을 하는 동안, 케이블에서 방영되던 <무한 걸스>가 잠시 무한도전의 시간을 빌어 등장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무한도전>이라는 오랜 방영 기간을 통해 충직한 시청자를 확보한 프로그램의 자리를, 그것도 파업으로 인한 부재라는 불의를 <무한걸스>는 넘지 못했다. '그녀'들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은 채 케이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갔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연세가 지긋하시지만 여자들임에는 분명한 <마마도>가 있다. 하지만 <마마도> 역시 <무한도전>을 넘지 못한 <무한걸스>의 전례를 고스란히 밟고 있다.
물론, <나 혼자 산다>의 경우도, 지지부진한 방송을 탈피하기 위해 여성 멤버의 출연 여부를 놓고 멤버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고, 장윤주와, 김나영 등이 이벤트 성으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교체된 멤버는 남성 멤버만으로 결정되었다.
그에 반해, <인간의 조건>은 김숙, 김신영, 김지민, 신보라, 김영희, 박소영 등으로 과감히 여성 멤버판 인간의 조건을 발진했다. 첫 미션은 '핸드폰 없이 살기'
'핸드폰 없이 살기'는 이미 남성판 <인간의 조건> 첫 미션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던 방송이었다. 하지만, 이미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었지만, 같은 미션을 반복한다는 건, 동일한 상황을 반복할 위험 요소도 내재하는 모험적 시도였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여성판 <인간의 조건>은 지금까지 방영해 왔던 '남성판' <인간의 조건>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프로그램이 되었다. 심지어 왜 지금까지 여자들의 이야기들 다루지 않았을까? 라는 원성을 들을 정도로 참신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처음 여성 멤버들이 등장했을 때, 개그 콘서트를 통해 익숙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신선한 김지민, 김영희, 박소영, 신보라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그에 비해, 김숙과 김신영은 이미 <무한걸스>의 오랜 멤버로 그들이 과연 여성판 <인간의 조건>에서 더 보여줄 것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핸드폰 없이 살기'라는 미션은 있지만, 결국 그 속에 그들의 삶이 온전히 드러나야 하는 <인간의 조건>에서, 김숙과 김신영은 이미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익숙해진 멤버였지만, 그들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간 소비되어온 이미지와는 또 다른 '맛'을 보여주며 진부하리란 편견을 불식시킨다.
김준호와 친구라는 서른 아홉의 김숙은 맏언니요, 세게 생긴 인상과 달리, 전화 신청도 혼자 하러 가지 못할 정도로 낯을 가린다. '4000만 땡겨 주세요'라며 걸지게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시끄럽고 드센 후배들 사이에서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쩔쩔 매는 것이다.
김신영도 마찬가지다. 김숙의 말대로 저런 얼굴에, 저런 옷을 입은 김신영은 '사랑'이 최고라며 거침없이 연애예찬론을 펼친다. 심지어 그게 안되면 '야동'이라도 보며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단다. 자기도 모르게 터진 연애 스캔들에 진짜 충격을 받고 가슴아파한다.
막강 반전은 김영희다. 짧은 팬츠를 즐기며, 아지트가 삭막할 까봐, 아끼는 인형을 데려다 장식하고, 장보기에서부터 요리까지, 천상 여자다. 개콘의 아줌마 담당 김영희는 <인간의 조건- 여성판>어디에도 없다.
성형 전 사진과 성형 과정의 사진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김지민의 털털한 매력도, 환한 얼굴로 낯을 가리는 언니를 품어주는 착한 신보라, 그간 예능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조증' 캐릭터를 발랄하게 선보이는 박소영의 신선함도 만만치 않다.
왜 이들의 진가가 진작 보여지지 않았을까 아까울 정도다.
더구나, 같은 미션임에도, '핸드폰 없이 살기'의 여성 버전은 전혀 다른 미션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같은 별 지구에 사는 '인간'임에도 사물에 대해 반응하고 의존하는 모습에서는 전혀 다른 종족의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늘 가까이 두던 문명의 이기가 없어진 사실에 '멘붕'을 느끼고, 그에 불안해 하는 반응의 본질은 같지만, 그에 대해 반응하는 모습은 마치 서로 다른 동물이 같은 상황에 다른 반응을 보이는 동물 다큐를 보듯, 천양지차다.
결코 '침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수다'가 늘 무성한 상황에, 전화기 신청 하나를 해도 '무리'를 지어다니는 모습들은, '신종족'을 발견된 듯 신선하다. 아니, 뻔히 일상에서 마주한 여성들의 습성이,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통해 새삼스레 조명되니, '여자가 이랬었나' 싶은 것이다. 미션 하나를 놓고, 남자편, 여자편을 동시에 조명하는 시도를 해도 괜찮을 정도로, 같은 조건 다른 반응의 상황들이, 새로운 <인간의 조건>을 발견하게 한다.
그저 다른 종족의 신기함만이 아니다. 한때 학교 선후배였던 김신영과 김영희가 서로 회포를 푸는 시간은, 이것이 그저 신기한 여자들에 대한 엿보기를 넘어설 또 다른 여지를 남긴다. 남자들의 <인간의 조건>이 디지털에 찌든 사람들의 '아날로그' 힐링이었다면, 여성판 <인간의 조건>이 어디로 갈 지 아직은 미지수다. 분명, 남자들의 그것과는 다르리라는 기대는 든다. 범람하는 남자들의 예능들 속에서, 여자들의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신선하고, 독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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