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2015년 마지막 12월 30일자 한겨레 칼럼,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5년의 한국 사회의 '공통의 감정을 꼽아보라면 '혐오'로 택할 것'이라고 정의내린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물을 심리적 여유조차 사라진 사회에서, 종편은 늘 그랬듯이 '북한'을 혐오하고, 일베, 소라넷 등의 일부 사이트를 중심으로, '여성', '호남', '민주당'의 혐오가 판을 쳤다고 분석한다. 또한, 그렇게 왜곡된 '인정시스템'이 혐오를 매개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 시킬 때, 그에 대한 저항은 '여혐혐'의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혐오'를 혐오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여성들의 움직임뿐인가, 우리들 역시 사회에서 돌출되는 각종 정치적, 사회적 혐오 현상에 대해 '더러운 똥'보듯이 '피하고 보는' 소극적 '혐오주의'로 맞서온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혐오주의'사회에 대해 김종엽 교수가 내린 처방은, '혐오'가 아닌 '분노'를 촉구함이다. '타자의 행위는 존중받을 만한 것이 못되는 '질'이 되고, 그런 인간은 '벌레'가 되는 사회에서, '혐오'를 '혐오'하지 말고, 그런 '혐오'에 대한 '분노'를 각성할 수 있는 '공통된 감각(common sense)', 상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혐오의 대상이 된 여성들이 즉자적 저항으로 '혐오'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절박함 속에서, 또한 김종엽 교수의 지적처럼 고착되어가는 갑을 관계의 견고함과 촘촘함이 어떤 경지를 넘어서가는 세상에서, 그가 말하는 '분노'는 아득하다. 우선 이른바 '상식'이란 것의 '소통'조차 막연한 사회에서 어떤 공통의 분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란 돌부리가 발을 건다.
혐오주의 세상에 필요한 건 넉넉한 유머
그런 현실에서 프랑스의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어쩌면 2016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넉넉한 유머'를 담뿍 담은 영화로 보인다. '혐오주의'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은, '혐오'에 대한 '혐오'나, '혐오'에 대한 날선 분노에 앞선 마음이 넉넉해지는 '풍자'와 유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잠옷 바람으로 자신의 바깥 일을 코에 걸고 집에서 '진따'같이 구는 아버지(부루와 뽀엘 부르드 분)와, 그런 아버지에게 꼼짝못하고 가사 일에 매몰되어 있는 엄마(욜랜드 모로 분), 그리고 그런 집안이 싫어 가출했다는 큰 아들과, 그런 아비가 싫지만 아직은 어려서 그 무엇도 해볼 수 없는 어린 딸(필리 그로인 분)로 이루어진 가정이 등장한다. 그런데, 웃프게도 바로 이 가정이 하느님네 가정이란다. 즉, 하느님, 신은 가부장적인 그의 태도와 시각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을 조정한다. 자신의 집무실이라고 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컴퓨터 한 대와 인간사의 정보로 가득찬 외딴 방에서 그가 하는 짓은, 흔히 우리가 '혐오하는' 남성혐오주의자들, 혹은 남성우월주의자들의 행태 바로 그것이다. 그런 '남성'인 신이 만든 세상은 당연히 그의 따분한 일상의 재미를 위해 끝없는 전쟁과 재해로 이어진다. 그리고 신은 마치 어덜트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인간 세상의 재앙을 소일거리로 즐긴다.
아들은 그런 아비의 세상에 반기를 들고 집을 나가 자신을 제물로 바쳤지만 세상은 아들, 예수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난폭한 아비를 참다못한 딸이 '세탁기'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 오빠가 하듯이 '사도'들을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 '아비'를 '혐오'한 딸은 그저 '아비'를 '혐오'하는 딸로 사는 대신, 자신이 '신'이 되어 '사도'들과 함께 세상을 구하는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세상을 구하고자 한 딸 에아가 한 첫 번 째 일은 바로 아버지의 '전지전능'의 상징이었던 인간들 죽음의 비밀을 '봉인해제'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인간 세상에 나온 딸은 그저 쓰레기통을 뒤져 고래 고기로 만든 버거를 먹다 토해버리는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어린 소녀에게 '충고'의 말을 건네온 노숙자가 있고, 그는 예수의 행적을 남긴 사도들처럼, 소녀와 소녀가 만날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길 사명을 수여받게 된다. 그리고 소녀는 그와 함께, 어머니가 좋아하는 18의 숫자를 채울 나머지 를 만날 길을 떠난다.
소녀가 찾아간 여섯 명의 사람들은 예수가 처음 만난 어부나 세리들처럼, 선뜻 '사도'라는 운명적 명칭이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기록을 남겨야 하지만 난독증이 있어 쉬이 글을 쓰기 힘든 노숙자처럼, 성도착자, 한쪽 팔을 지하철 사고로 잃고 그 누구와도 선뜻 가까와질 수 없는 소녀, 마흔이 넘도록 열심히 일만 하던 사내, 혹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살생' 욕구에 시달리던 중년의 가장, 이제는 나이가 들어 돈을 주고 남자를 사서 '사랑'을 구해야 하는 구차한 처지의 여인이나, 아주 어릴 때부터 병이들어 고통 속에서 죽음마저 무덤덤해진 어린 소년이다. 하지만 '죽음'이 봉인 해제된 세상에서 이들의 삶은, '죽음'을 기약할 길 없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궤도로 접어들게 된다. 또한, 그들을 찾아간 에아는 그들 내부에 흐르는 음악을 듣고, 그들의 본질적 가치를 발견하게 도와준다.
도발적 사도들이 실천한 남성중심 사회의 '사랑'
즉, 가부장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던 성도착자는 알고보니 '외로움'의 왜곡된 표출이었고, '성공지상주의'사회에 자신을 매몰시켰던 남성이 원했던 것은 '자연'이었다는 식이다. '남성'과 '인간' 본위의 사회는 이들의 본연의 욕구를 왜곡시키고 거세시켜 결국은 사회에서 배제된 외롭고 슬픈 삶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에아'의 도움으로 그들은 자기 내부에 귀를 기울이고, 제한된 죽음이 기약된 시간 내에서 정말 자신이 하고싶은 걸 한다. 결국 '기약할 수 없는 죽음'과, '만들어진 사회'가 그들의 삶을 방해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어두운 방에서 헐벗은 여인들로 욕구를 충촉하던 성도착자는 외로움을 넘어 사랑에 도전한다. '살의'는 사랑으로 승화되고, 때론 그 사랑의 귀착점이 '인간'이 아니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저 제 각각이었던 여섯 명의 사도들은 '에아'의 도움으로, 그 시절 예수가 그러하듯이 '사랑'을 실현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으로 실천하려 했던 '사랑'은 이제 에아와, 여섯 사도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그 대체된 사랑은, 십자가에 대속된 예수만큼이나, 아비인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전복시킬 위험한 '도발'이다. 이미 '죽음'에서 '봉인해제'된 인간들은 '아비'인 신의 재미인 '전쟁'을 포기했고, 사도들은, 전쟁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 세상'의 터부를 깨고, 금기를 넘어선다.
결국 신은 에아를 잡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려 하지만, 딸을 잡기는 커녕 그의 돼먹지 않은 행동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뿐이다. 영화 마지막까지 세탁기 공장에서 세탁기 통안을 호시탐탐 노리지만, 그가 돌아갈 길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부재한 신의 자리를 집안 일이나 하던 엄마가 대신한다. 그리고 엄마는 찐따같은 아비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이었던 그 존재처럼 꽃무늬의 하늘로 대변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봉합한다. 폭력적인 아비, 무기력한 아들 대신, 도발적으로 사랑을 실현한 딸, 그리고 그 딸이 저질저놓은 세상을 평화로 마무리한 여신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전설이 된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가 고릴라와 사랑을 나누어 아기를 낳고, 신이 성직자에게 멱살을 잡히며, 살인자가 장애인과 사랑을 나누고, 성도착자가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며, 여자 옷을 입은 남자 아이와 신의 딸이 사랑을 하는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풍자하고, 조롱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갑갑한 세상을, '죽음'의 봉인해제처럼,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숱한 규칙과 원칙들을 봉인해제 해 버린다. 그 황당함에 혀를 내두르다, 어느덧 어쩌면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말랑말랑한 머리와 마음이 아닐까란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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