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사회 속에 원자화된 존재로 던져진 개인이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 기쁨이나, 행복, 성공보다는 오히려, 좌절, 실패, 소외, 그리고 슬픔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는 많은 작품들은 그런 개인들을 위로하고, 부축해 일으켜 다시 한번 살아가자고 토닥인다. 제목부터, <비긴 어게인> 역시, 다르지 않다. 그의 전작, <원스>처럼 <비긴 어게인> 역시 음악을 통해, 두 남녀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막상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오히려, 스토리를 능가하는 음악의 힘이 크다. 하지만, 여기서 진짜 알맹이는,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실의에 빠진 두 남녀가 힘을 얻는 그 순간, 그 지점의 환희다. 어쩌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 잠깐 스치듯 마주쳤던 무지개를 잊지 못하듯, 음악을 통해 교감하고, 열정을 확인했던, 그 순가에 매료되어, 다시 삶을 지속해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긴 어게인>의 오프닝은 스티브(제임스 코든 분)가 노래하던 술집 소파에 찌그러지듯 앉아있던 그래타(키이라 나이틀리 분)가 마지못해 스티브의 부름에 불려나가 기타를 치며 나직이 읊조리듯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같은 장면, 하지만, 객관적이었던 장면이, 그녀를 바라보던 댄(마크 러팔로 분)의 시점에서, 그리고 그래타의 시점에서 다시 되풀이 되면서, 영화는 비로소 이야기가 풀려나가고, 루저가 된, 그래타와 댄의 사연이 풀어내어진다.
그렇게 시작된 그래타와 댄의 사연은, 아득하다. 힙합 독립 레이블로 시작하여 스타 프로듀서가 된 댄은, 몇 년 동안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한 채 함께 했던 회사는 동료에게 넘기고, 집은 아내에게 넘긴 채, 뉴욕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머물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 자살까지 결심한 처지의 실패자이다. 그래타 역시 그다지 나은 상황은 아니다. 마치 원스의 남자 주인공처럼 영화 한 편을 통해 벼락 스타가 된 남자 친구 데이브(애덤 리바인 분)와 함께 뉴욕 행을 택한 그녀는, 그저 스타가 된 남자의 연인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노래를 작곡해 주었던 음악적 동반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로 스타가 된 그의 곁에 그녀의 자리는 없다. 심지어 애정 전선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제 그녀에게는 그녀를 이루어 주었던 남자도, 음악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버틸 수 없어 뉴욕을 등지고자 한다. 그런 그래타가 마지못해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댄이 듣는다.
온통 음악으로 휘감은 듯한 <비긴 어게인>에서, 그런 충만한 음악 속에서도 더더욱 빛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지점의 음악이 그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술 기운을 빌어 지하철에 뛰어들겠다고 마음 먹은 댄은 술의 힘을 빌리기 위해 들린 술집에서 그래타의 노래를 듣는다. 그녀의 노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대화 속에서 독백하듯 읊조리는 그녀의 노래 소리에, 오래도록 그를 떠났던 영감이 다시 찾아온다. 오로지 기타 반주에 의존해부르는 그녀의 노래에, 저절로 피아노 건반이 반주를 넣고, 베이스와, 바이올린, 드럼이 등장한다. 완성되지 않은 곳이라며 채 마치치도 않고 자리를 뜬 그래타와 달리, 댄의 귀를 울린 그녀의 음악은 그토록 그가 찾아헤매던 바로 그 '곡'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댄이 진흙 속에 숨은 진주라며 그래타를 자신의 동료에게 데리고 가지만, 데모 테이프조차 없는 그녀를 알아줄리 만무하다. 하지만, 기적처럼 영감을 길어올린 댄은 포기하지 않는다. 데모 테이프 대신, 뉴욕을 배경으로 날 것 그대로의 그래타의 작품을 만들기로 한다. 대가를 음반이 나온 후 주기로 약속하고 함께 하기로 한, 그래타의 오랜 동료 스티브를 비롯하여, 고전 음악을 연주하던 예일대생 오누이, 발레 반주를 하던 건반 연주자, 오랜 친지를 통해 소개받은 드럼과 베이스 연주자, 그리고, 거리에서 음반 녹음을 방해하던 아이들까지 합류해,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뉴욕의 거리를 배경으로 한 곡의 음악이 탄생한다. 조용히 해주는 댓가로 몇 달러를 흥정하던 아이들도, 아니 그저 비발비가 아니라면 그것으로 족하다던 음대생들도,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던 뉴욕 할렘가의 주민들도, 그리고, 노래를 하는 그래타도, 그런 그들을 지휘해 나가는 댄도, 이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기약도 잊은 채 잠시 잠깐 음악에 어우러져 흥에 겨웠던 그 순간, 그것이 바로 <비긴 어게인>이 빛나는 지점이요, 그래타와 댄을 좌절에서 길어올린 순간이다. <원스>에서, 우연히 들른 피아노 판매상 안에서 그(글렌 한사드 분)와 그녀(마르게타 이글로바)가 목소리를 모아 노래를 부르며 소통하는 그 지점이 겹쳐보이는 순간이다.
영화 속에서 그런 순간들은 반짝반작 빛이 난다. 그 어떤 시도를 해도 늘 어긋나기만 했던 아버지 댄과 딸 바이롤렛(헤일리 스테인 펠드 분)가 그녀의 기타 연주를 통해 화해하는 장면도, 그저 연인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교감을 이루었던 그래타와 데이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씌여졌던 데이브의 생일씬과 데이브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던 씬까지, <비긴 어게인>은 인간사의 교감을 음악을 통해 빛나게 해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삶의 계기라 밝힌다.
마치 '썸'이라도 탄 듯이, <원스>에서도 그렇듯이, <비긴 어게인>에서도 두 남녀 주인공은, 사랑인 듯 사랑이 아닌듯 그런 관계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로써 족하다. 왜? 뉴욕 거리를 함께 거닐며 음악을 맘껏 들으며 교감했던, 함께 연주하며 음악을 나누었던 그들은, 서로가 함께 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았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비긴 어게인>은 그렇게 다시 삶을 살게 된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다시 서로를 통해 삶을 살아가게 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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