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리멈베-아들의 전쟁> 앞이 보이지 않던 진우 아빠의 서재혁씨(전광렬 분)의 재심 재판, 하지만 진우(유승호 분)가 전주댁의 살인자가 되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청부 살해 업자를 찾아 맨몸으로 돌진한(?) 검사 이인아(박민영 분)의 살신성인으로 진우를 옭아맸던 음모로부터 진우가 자유로워지고, 뜻하지 않게 아빠 재판에서 위증을 했다 살해를 당한 전주댁의 남겨진 영상으로 '재심'의 결정적 증거가 확보되어 진우는 아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법정에 선다. 전주댁의 영상에 이어 또 다른 결정적 증인인 의사를 호명하는 도중, 그만 진우는 기억을 잃으며 쓰러진다. 그의 과잉 기억 증후군의 반전인지, 아버지에 이은 알츠하이머의 유전인지, 다음 회를 기약하면서.
언제나 '고꾸라지는' 주인공
하지만, 주인공 진우가 기억을 잃는다는 충격적인 정황의 구체적인 상황에 거리를 두고 이 씬 자체의 틀을 보면 어딘가 익숙하다. 과잉 기억 증후군에, 기억력 못지 않게 명민하고 똑똑한 판단력에 일호 병원 부원장을 위협할 정도의 담대한 기지, 거기에 자신을 잡으려 들이닥친 경찰관 무리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는 액션까지, 도대체 안가진 것 없는 이 능력자 주인공이지만, <리멤버-아들의 전쟁> 1회 이래 이 능력있는 주인공은 늘 이렇게 결정적 상황에서 '고꾸라지고'만다.
4년전 처음 아버지가 '서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법정에 섰을 때도, 군중의 계란 세례에도 의연했던 진우, 그리고 아버지의 변호사 비용을 대기 위해 도박장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진우지만, 정작 그가 믿었던 변호사 박동호(박성웅 분)가 결정적 순간 그를, 그의 아버지를 배신하고 만다. 이건 이길 수 없는 재판이라며. 그렇게 아들의 전쟁 서막에서 진우는 박동호로 하여금 대리전을 치룬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렇게 믿었던 변호사에게 배신을 당한 진우는 그래서 이제 누군가에게 아버지의 변호를 맡기는 대신 자기 자신이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의 똑똑한 머리로 변호가가 되었다. 심지어 박동호를 벤치마킹한 듯한 처신으로 일호 그룹의 변호를 맡으며, 그룹의 비리 장부까지 챙겼다. 그렇게 야심차게 아버지의 재심을 위해 에돌아 왔던 진우, 하지만 그런 그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를 지켜보던 남규만(남궁민 분)은, 진우가 '재심'을 위한 도정에 나서자, 단번에 그를 살인자로 옭아매고 만다. 비밀의 방까지 만들고, 일호 그룹 조직도며, 아버지 사건을 도표화하면서 재심을 준비하던 진우는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만다.
겨우 이인아와 박동호의 도움으로 살인자 누명에서 벗어난 진우가 주도면밀하게 '재심'을 준비해 가지만, 정작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가 준비한 재심이 아니라, 그의 '기억 상실'이다.
이렇게 9회에 오는 동안 <리멤버-아들의 전쟁> 속 아들은 제대로 된 전쟁을 벌이지도 못하고, 언제나 완전 군장을 하고 전쟁을 하려는 순간, 고꾸라지고 만다. 그렇게 아들이 제대로 된 전쟁을 벌이지도 못하는 반면, 그런 아들에 위협을 느낀 서촌 여대생 살인 사건의 진범 남규만은 회를 거듭할 수록, 그의 '사이코패스'적 악행의 도를 업그레이드한다. 그저 한 여대생을 범하려다 죽이고 만 사건은 4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그 사건을 덮기 위해 전주댁을 청부 살해하고, 진우를 그 살해범으로 만들고, 사건과 관련된 숱한 인물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오히려 사건을 확산시킨다. 즉, 진우가 무언가를 해보려 하지만 하지 못하는 동안, 남규만은 계속 무언가를 하며, 그의 악행을 쌓아간다.
끊임없이 시도되다 허무하게 주저앉는 복수, 에스켈러이션 되는 악행, sbs 수목극의 클리셰
이렇게 야무지게 '복수'를 시도하지만, 늘 '고꾸라지고'마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에도 불구하고 쫄아서 나날이 악행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악역의 구도는 <리멤버-아들의 전쟁(이하 리멤버)>만이 아니라, 최근 시청률이 잘 나오는 sbs 드라마들의 공통적인 구조이다. 잘 나가는 sbs수목 드라마의 전통을 만든 <가면>이 그랬고, <용팔이>가 그랬다. 거기엔 억울한, 그래서 복수를 해야 하는 주인공이 있었고, 그 주인공의 상대편엔, 주인공을 저지하고자 나날이 능력치가 만랩이 되어가는 '악의 화신'이 있었다. 매회 주인공은 '복수'를 하기 위해 주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 하지만, 마지막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기 까지는 늘 악인의 함정에, 혹은 자기 자신의 한계로 인해 고꾸라진다. 그리고 그 동안 드라마의 내용을 채워가는 것은 회를 거듭할 수록 업그레이드되는 악행이다.
이들 드라마의 또 다른 공통점은, 결정적 순간이 오기 까지, '발암'이 될 정도로 무언가를 해보려다 고꾸라지는 주인공과 능력치를 거듭해가는 악역과 더불어, 속도감넘치는 전개이다. 하지만, 그 속도감 넘치는 전개에 개연성은 따라붙지 않는다. 한 회 동안 숨가쁘게 많은 사건들이 전개되고, 주인공은 늘 사건에 휘말리고, 그 사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횡무진하고, 그런 주인공에 대적하는 악역은 자신의 불안을 <리멤버> 9회 남규만이 자신의 길을 막는 소형 자동차에 골프채로 화풀이를 하듯 '사이코패스'적 행태로 표출한다. 고등학생이었던 진우가 그의 과잉기억 증후군을 이용하여 도박장에 홀홀단신으로 뛰어들고, 사시에 붙는가 하면, 살인자가 되어 경찰을 피해 도망자가 되는가 싶더니, 이제 재판을 이끄는 등, 도저히 한 장르가 보기에도 '스펙타클'한 내용들이 이제 9회가 된 드라마에서 벌어진다. <리멤버>만이 아니다. 하루 아침에 죽었다 살아나서 재벌 안주인이 된 여주인공의 해프닝이나, 왕진 의사에서 재벌가의 딸내미의 연인이 되어 병원에서 어드벤처 액션씬을 찍은 용팔이까지, '개연성'이란 말을 붙이기도 무색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그러는 동안 시청자들은 '고꾸라지는'주인공에 답답해 하면서도, 결국은 이 주인공이 저 천하무적 악을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라는 걸 확신하며, 매회 벌어지는 깨고 부수고 죽이고 이합집산하는 이야기에 정신을 빼앗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비단 최근 sbs 수목극만의 클리셰가 아니다. 아침 드라마에서 수난사를 날마다 새로 쓰는 여주인공들이며, <내딸 금사월>을 비롯한 시청률 높은 주말 드라마의 내용이 또한 그러한 것이다. 오히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sbs 수목극은 최근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중장년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통속극'의 단순하지만 자극적인 사건 전개를, 장르만 바꾸어서 확장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결국 <가면>, <용팔이> 그리고 이제 <리멤버>까지 높은 시청률로 이어진 ,sbs 수목극의 성취는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범용되고 있는 '복수'의, 그리고 악의 에스컬레이션에 기댄 통속극의 확산이다. <리멤버>의 전개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을 들먹일 것이 아니라, 아침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 속 눈을 부릅뜨며 갖가지 악을 진열했던 악역들의 '모사'라 하는 게 정확한 것이다. 마치 이들 드라마는 현실에서 느끼는 이 '갑을'의 사회 구조에서 억눌린 감정을 대리 배설하듯, 극중 나날이 심해지는 악행의 에스컬레이션을 보며 '욕을 퍼부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 또한 현실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절망감을 반영하듯, 주인공은 똑똑하고 야무지며 언제나 선하지만 그 선함을 '악의 절벽'에 부딪혀 최후의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진 '고꾸라짐'으로써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하지만, 그 '리얼리티'는 마지막 순간, 처절하게 악을 응징하는 '환타지'로 보상받는다.
이들 드라마는 그 배경이 재벌가의 백화점이건, 병원이건, 그리고 이제 법정이건 상관이 없다. 계약 결혼으로 그만 재벌가의 남자를 사랑해 버린 여자이건, 재벌가의 딸을 사랑한 의사이건, 그리고 이제 아버지를 잃을 위기에 놓인 젊은 변호사건, 마치 게임 배경만 바뀐 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 적을 향해 몇 번의 죽임을 당할 기회를 놓고 싸움을 벌여가는 '게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날마다 게임에 빠져있다고 하소연하지만, 정작, 그들이 tv 속에서 빠져드는 드라마는 그들의 자식들이 빠져있는 게임보다도 단순한 서사의 '게임'같은 드라마로 매일을 채운다. 그저 주인공은 자신을 휩싼 비극적 운명 속에서, 그 비극을 제칠 '복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게임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게임 운영 방식을 본딴, rpg 사극이 퓨전 사극의 새 형식으로 도입되었던 그 때가 무색하게 이젠 모든 드라마가 rpg(roll playing game)이다.
거기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천착, 사회구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다. 재벌과 거기에 종속된 검찰과 여타의 권력들이 등장하지만 소모적이다. 어쩌면 매일 매일 닥쳐오는 삶의 물결에 허우적거리는 우리네 삶을 가장 닮아 친근해 하는 것일일지도 모르지만, 이쯤이면, 게임 중독 못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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