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지긋해져서 친구들을 만나면 '싱글족'이 무색하게 온통 아이들 얘기뿐이다. 그건 남녀를 가릴 것이 없다. 아이가 잘 되면 잘 돼서 걱정, 잘 안 풀리면 안 풀려서 걱정, 소를 잡아 아이들을 대학을 보내던 우리 부모의 세대랑 전혀 다르지 않은 DNA를 내보이며, 단지 다른 게 있다면 부모들이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소를 열심히 키우는 일이었다면, 이제 부모가 된 자들은 자신들이 그간 나이 먹도록 배워온 갖은 노하우와 인맥을 동원하여 아이들을 추스리려 하는 것일 뿐이다. 강산이 몇 번을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원동력은 '내 새끼는 내가 챙긴다'는 불변의 진리 하에 각 부모들의 각개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부모들의 '전투'가 늘 성공적이지만은 않다. '우골탑'으로 만든 상아탑에서 '민주'을 외치며 부모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던 그때 그 자식들이 다시 부모가 된 지금도 여전히 아비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은 불협화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처럼, '내 자식 잘되기만을 아비의 방식으로 기원하는 아비는 자식들과 '소통'할 수 없거나, 화해 조차도 때늦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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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의 코드, 아버지 
그렇게 여기 하나 밖에 없는 딸 자식과의 '소통'의 기회를 놓친 아버지가 있다. 바로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있던 날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 해관(이성민 분)이 바로 그 사람이다. 지하철 참사의 실종자로 딸을 받아들인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그걸 인정치 못한다. 그리고 영화 <로봇, 소리>는 아버지가 왜 딸의 실종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가를 이후의 전개에서 스멀스멀 밝혀간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 우선 촛점을 맞추는 것은 딸의 실종이 아니다. 어린 시절 엄마 모르게 손가락을 걸고 '비밀 본부'를 만들었던 아버지 해관과 딸 유주(채수빈 분)는 커가는 아이의 키만큼 거리감이 생긴다. 비밀 본부였던 아이스크림 가게를 배경으로 엇갈리는 두 사람의 행보가 영화를 열고, 거기서 당혹감을 느낀 아버지의 시선에서 이 영화가 '아버지'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로봇, 소리>의 해관은 관세청에 다니는  심지어 나랏밥 좀 먹는 평범한 우리 시대의 직장인이다. 그리고 그 '평범함'을 반증하듯,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딸 유주가 자신이 살아왔듯 '평범한' 삶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소탈한 바램은, 아버지의 뜻과 엇나가는 딸로 인해, '불협화음'과 '불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불통'의 클라이막스,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아버지는 자신을, 자신의 뜻을 외면한 딸을 거리에 던져놓고, 딸은 그 이후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실종된 딸을 찾아 헤매던 해관이 굴업도 바닷가에서 줏은 로봇, 소리와 함께 딸의 남겨진 목소리를 따라 도달한 곳은, 전국을 헤매면서도 단 한번도 찾지 않았던 곳, 바로 자신이 딸을 남겨 놓았던 그 거리의 지하철이다. 결국 왜 딸의 실종을 받아들이는 엄마와 달리, 지난 10년 동안 아버지가 딸이 지하철 참사의 실종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가를 에돌아 설명해 온 것이다. 즉, 아비는 딸을 아비의 방식으로 사랑하고자 했으나, 그 아비의 왜곡된 사랑이, 딸을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버지 해관은 지난 10년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성민이 연기한 해관은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투박하고 사랑하는 맘은 깊어도 잔정많게 대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자식을 사랑하는 법만을 실천해온 그래서 자식과 소통할 수 없었던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다. 어쩌면 해관의 그런 모습은 우리 시대의 천만을 누렸던 <국제 시장>의 덕수(황정민 분)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왜곡된 사랑으로 자식을 뜻하지 않은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는 점에서는 <사도> 속 영조(송강호 분)의 모습이 겹쳐진다. 즉,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아버지의 DNA를 충실하게 실현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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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소리> 속 아버지가 하는 반성의 방식
그렇게 우리의 별다를 게 없는 아버지 해관이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딸의 받아들일 수 없는 실종을 마주하고서이다. 그리고 <로봇, 소리>가 그간 우리나라 영화들이 그려내고 있는 '부성'의 다른 지점을 말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고 이 영화가 그간 우리 나라 영화들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자식의 부재'로 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로봇, 소리>가 2016년에 각별하게 다가오는 점은,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대구 지하철 참사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참사로 이 시대가 자식들의 부재를 양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영화가 강조하지 않아도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찾아 헤매는, 아이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비의 모습은 이제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 된 것이다. 한때는 전쟁에 나가, 그리고 또 한 때는 시위에 나가 돌아오지 않던 자식은 이제 사회적으로 벌어진 '참사'라는 운명에 휘말려 부모들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선대의 아비들이 살아왔듯 다르지 않게 자신의 시대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려 했던 해관은 하지만 딸의 실종으로 그 사랑을 배반당한다. 그가 로봇 소리를 통해 도달하기 까지 지난 10년간 찾아다닌 건, 딸이었지만,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버지, 자신의 모습이었다. 즉, 로봇, 소리를 만나서도 여전히 실종 전의 딸을 대하듯 자신만의 방식으로 툭툭거렸던 아버지는 딸을 찾겠다는 간절함으로 로봇, 소리와 동행을 하면서, 지난 시절 자신이 했던 사랑의 방식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었는가를 짚어보게 된다. 결국, 마지막 지하철 입구에서 마주한 것은, 딸의 실종이 아니라, 그토록 자신이 외면했던 자신의 어긋난 사랑이었다. 즉, 여전히 자식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왜곡된 아비의 시대에, 영화는 사랑하려 했지만 왜곡된 방식이 되어버린 '아비'의 반성을 영화는 촉구한다. 그래서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로봇, 소리>가 천만이 되기 힘든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아비의 사랑에 방점을 찍는 이 시대에, 그 사랑의 방식과 반성을 촉구하는 <로봇, 소리>는 불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신파적'으로 전개되었던 다수의 한국 영화 속에서 아비들의 모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사랑했고 최선의 방식으로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었다에 방점을 찍었었다면, <로봇, 소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방식이 왜곡되었다라는 지점이다. 아버지가 아버지 세대의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때로는 자식에게는 굴레요,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로봇, 소리>는 말한다. 그리고 그건, '잘못'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아비와 자식의 숙명일지도 모른다고, 국정원에서 출소한 해관을 맞이한 아내의 입을 통해 나즈막하게 읊조린다. 

그러나 영화는 눈물을 쏙 빼면서도 자식과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아비의 숙명적인 운명에 타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비는 딸을 잃어버린 그 지하철에서 잠시 통곡을 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딸의 부재를 시인하는 감상(感傷)과 시인에서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아비의 행보를 걸어가는 해관의 모습에서 <로봇, 소리>의 힘은 이어진다. 비록 그 결말이 환타지일지라도. 자신에게 찾아온 또 다른 딸을 지키기 위해,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가 딸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베풀었듯이, 이번에도 변함없이 그렇게, 위태로운 항구의 난간에 매달리고, 바다에 몸을 던져가면서 또 다른 딸을 지키고자 한다. 인공 지능 로봇이라는 존재는 환타지이지만, 혈육으로서 딸을 지켜내지 못한 아버지가, 혈육의 사랑을 넘어, 전쟁터에서 스러진 목소리를 향해 나아가는 로봇, 소리를 지켜냄으로써, 딸의 '진혼곡'을 '인간애'(?)  혹은 인류애, , 보편적 인(仁)으로 승화시켜 내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6. 2. 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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