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평양까지 이만원>은 어쩐지 반갑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산다는 정체불명의 청년, 그 청년의 숨겨진 사연을 풀어가는 단막극은 일찌기 <베스트 셀러 극장> 혹은 <tv문학관>을 통해 소개되었던 익숙한 플롯의 작품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래전의 단편 소설을 읽은 듯 '고전적인 소재와 주제 의식'을 깔끔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시대와 엇물리지 않은 구름잡는 이야기같을 수도 있겠지만, 출생의 비밀과 그로 인한 청춘의 고뇌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음을 고통받게 하는 가장 '본원적'인 주제 중 하나이니, <평양까지 이만원>은 서가에서 고전을 꺼내 통독하는 느낌으로 오래된 듯하지만, 그래서 신선한 감상으로 다가온다.
구부러진 못, 영정
대리 운전을 하는 한 청년이 있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규칙을 위반한 다른 대리운전 기사에게는 씨알도 안먹히게 단호하던 그가, 사장조차도 의심스럽다는 서울 한복판의 산동네 길에서 만난 아줌마가 꽃을 한 송이도 못팔았다고 하자 선뜻 지갑을 연다. 화장실은 수리중이고, 방안 전등은 댕강 끊어졌는데 기꺼이 그 불편함을 감수한다. 도대체 왜?
그의 모호한 정체가 풀려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그를 찾아온 신부님으로부터이다. 그를 동생처럼 여기는 차준영 신부(김영재 분), 그와 함께 술을 먹으며 사제를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간 그가 그렇다고 세속의 삶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며 놀린다. 하지만 그 말이 씨가 되기라도 한 듯 연신 걸려온 전화에 당황한 듯 자리를 뜬 신부의 뒤로 나타난 소원(미람 분)과 뜻하지 않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부제직까지 수여받은 후 뛰쳐나온 박영정(한주완 분), 그리고 그의 주변에 느닷없이 등장한 여성 소원과, 그녀로 인해 가장 그와 막역하던 관계에서 불편한 긴장이 팽배한 관계로 변한 차신부의 현실적 갈등은 이후 드러날 박영정의 환속의 사연과 맞물린다. 그가 본의 아니게 얽혀든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사랑의 굴레는 그로 하여금 환속을 풀어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 계기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구부러진 못'이다. 박혀있다 뽑혀나온 못, 그 형상은 흡사 사제의 길을 가다 이제 하루하루 대리운전을 하며 살아가는 영정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그렇게 속에 머무르지만 정처없는 영정처럼 구부러져 쓸모가 없어진 못을 그가 만난 소원은 기꺼이 거둔다. 그것이 악마를 쫓아주고 행운을 가져다 주는 부적이라며.
하지만 소원이 말한 그 구부러진 못의 부적의 주문은 이후 차신부의 입을 통해 재연되고, 술자리에서 그의 토로에 따르면 그건 그가 외면했던 어머니의 미신이었던 것으로 인연의 끈을 풀어간다. 그는 외면하지만 소원과 차준영을 통해 그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 보게 되는데, 거기엔 지금 그가 얽힌 관계처럼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과거의 악연이 있다. 그리고 그 '악연'은 그로 하여금 사제직을 떨치고,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이라 외면하는 현실을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리고 용서
가장 간절한 순간 다시 성당으로 돌아가 기도를 하게 되는 영정, 그로 인해 그는 비로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도망치려 한 그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어깃장을 놓으려 했지만 차신부와 소원의 진심을 외면할 수 없었던 영정, 그들을 통해 그는 비로소 '사랑'을 용서하게 된다. 차신부와 소원의, 그리고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하지만 아버지였기에 자신을 신부직에서 토해놓았던 또 한 분의 신부님과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고 뒤늦게 펼쳐본 아버지로써의 사랑을.
그리고 거기서 발견한다. 구부러진 못 그 전설의 시작을. 마치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사랑했다는 아버지의 고백처럼, 그 사랑은 '구부러진 못'을 행복의 메신저로 변화시켜, 자신을 구부러진 못으로 내던져버린 영정을 찾아온다. 그리고 그 미신과도 같았던 전설은 그가 차신부와 소원, 두 사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으로,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한다. 그의 아버지는 마치 그가 그럴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겨진 편지에 구부러진 못을 그려놓았었다. 결국 우리에게 '용서'라는 힘을 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평양까지 이만원이란 제목답게 드라마의 마지막은 처음과는 다른 밝은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은 영정의 모습을 마무리된다. <평양에서 이만원>은 그 흔한 '사랑'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장 고전적인 주제이지만, 2016년에는 가장 생경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 생경하고도 고전적인 주제를 풀어가기 위해, 현실에 살지만 현실에서 벗어나있는 '신부'라는 소명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드라마는 종교직으로서의 신부 이전에 '인간'의 사랑을 논한다. 그리고 로만 칼라를 벗어버린 차신부와, 영정을 잉태하였음에도 신부로서의 소명을 성실히 수행한 존경받은 신부로 남은 그의 아버지를 통해, 용서와 사랑의 한계를 묻는다. 그리고 출생으로 인해 소명으로 부터 튕겨져 나온 영정의 방황은 성과 속의 포용을 반문한다.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이 시대에 생뚱맞은 하지만 언제나 영원불멸한 진리인 '사랑'과 '용서'를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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