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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3.1절 프로그램들이 찾아왔다. sbs스페셜은 조선의용대의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씨가 돌아가시기 까지 최후의 몇 개월을 고스란히 화면에 담았다. 1938년 약산 김원봉에 의해 창립된 조선 의용군은 해방의 그날까지 일본군에 맞써 싸웠던 무장 독립 단체이지만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단체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남과 북 모두에게서 외면받았던 단체이다. 그 단체의 최후의 분대장으로 끝까지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애썼던 김학철씨의 마지막 여정을 담는다. 또한 sbs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신분인 기생들이 일제 앞에 나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기생 독립단'사건을 다룬 <꽃들의 저항, 기생 만세 운동>을 특집 다큐로 제작 방영한다. 김구 선생이 '건국 영웅'이라며 자신의 책에서 밝혔던 기생들은 보석과 패물을 팔아 독립 자금을 댔으며, 자신의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 선언물 수천장을 뿌리며 일제에 맞섰었다. 특히 이번 3.1절 특집 프로그램 중에 돋보인 것은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 일제에 저항하며 '수요 집회'를 열고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화한 것이다. mbc라디오는 1939년 통영에서 일본군 강제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섯 소녀들의 이야기를 <나는 후미코가 아니오>를 통해 그려낸다. 여섯 명의 소녀들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중 다섯 분이 돌아가시고, 단 한 분, 김복득 할머니만 생존해 계시다. 김복득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일본의 진정성있는 사과를 받는 일.김복득 할머니의 증언과 주변인의 인터뷰를 모아, 나문희씨의 나레이션에 얹어 광복 70년의 의미를 되새긴다. 풍성한 특집 속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 mbc 라디오에서 실존 위안부 할머니의 육성을 통해 일제의 참혹한 만행을 전달하고자 했다면, kbs 1tv는 특집극 <눈길>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을 그린다. 드라마 속 위안부 할머니들은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니다. 한 마을에 살던 번듯한 집안의 공부 잘 하던 소녀 영애와, 그녀를 동경하고, 그녀의 오빠를 마음에 품었던 가난한 소녀 종분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똑똑한 소녀 영애(김새론 분), 하지만 그녀의 집안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주재소로 끌려간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 때문에 오빠도 징용으로 끌려가고, 황국 신민으로 앞장서던 영애도 마찬가지 처지에 이른다. 영애가 아버지로 인해 근로 정신대에 자원했다면, 종분(김향기 분)은 그런 영애를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영애를 따라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어준다는 정신대에 자원하겠다고 나섰지만 동생을 돌보라는 엄마 말에 그만 주저않고 만다. 하지만 그날 밤 종분의 집에 쳐들어온 정체 모를 무리의 남자들은 종분을 끌어가 정신대 무리에 던져 버린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소녀, 그 소녀의 오빠랑 결혼하는게 꿈이었던 소녀, 이렇게 한 마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 소녀들은 일본군 막사로 끌려가 위안부가 된다. 이렇게 살 바에야 죽겠다는 영애를 다독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자며 다독이는 종분, 두 소녀들은 죽음보다 비참한 상황에서 서로 의지하며 슬픈 우정을 키운다. 거듭된 패전으로 이오지마로 퇴군해야 하는 일본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게 되는 상황에서 도망치는 과정에서 그만 영애는 목숨을 잃고, 홀로 고향으로 돌아온 종분, 하지만 그토록 그리던 엄마와 동생은 죽거나 그녀를 찾아 실종된 상태다. 심지어 정신대를 다녀왔다는 소문은 고향에서 조차 그녀를 밀어내고 만다.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들은 238분이시다. 그 중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이제 53분만이 생존해 계시다. 생존해 계신 분들도 고령으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상황이다. <눈길>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할머니들, 한때는 꿈많은 소녀였던, 아직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했던 아이였던 그 청춘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나라를 빼앗겼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들의 꽃다운 시절조차 강탈당하고,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현재형으로 이어지는 위안부 할머니의 역사 <눈길>은 노인이 된 종분(김영옥 분)이 여전히 고향을 등지고, 도시의 지하 단칸 방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뜨개질로 근근히 생활하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자다 끌려가는 바람에 종분이란 이름조차도 지킬 수 없었던 그녀, 친구 영애의 이름으로, 그래서 아직도 그녀 곁을 맴도는 영애의 영혼과 함께, 외롭게 노년의 삶을 이어간다. 그런 그녀의 곁에 등장한 불량 소녀 장은수(조수향 분)가 등장한다. 가족이 없어 보살핌을 받지 못한 소녀 은수, 그런 은수를 사회조차 보듬어 주지 않는다. 그렇게 드라마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소녀 은수를 통해, 일제 시대 역시나 그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했던 두 소녀의 처지에 공감을 불어넣는다. 그녀들도, 어쩌면 은수처럼, 그리고 은수도 그녀들처럼, 한참 철없을 나이였고, 꿈많을 나이였지만, 어른들의 보살핌을, 사회의 보살핌을, 나라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꿈많을 시절을 강탈당하고 만다고. <눈길>은 위안부의 일을 다루지만, 그 일을 직접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꿈많을 소녀들 두 사람에 집중한다. 그들이 일제 시대라는 시대적 압박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꿈을 잃고, 삶을 잃어가게 되었는가를 통해, 위안부라는 직접적 묘사 이상의 공감을 설득해 간다. 왜 아직도 생존해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며 수요 집회를 이어가고 계신가를, 드라마는 소녀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통해 형상화해나간다. 그것은 돈이나, 그럴 듯한 몇 마디 형식적 말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는 그녀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시간이었음을 굳이 강변하지 않아도, <눈길>을 보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홀로 살아가던 종분은 이웃집 소녀 은수를 통해, 돌보아 주지 않아 일제에 의해 짓밟혔던 지난 시간을 새삼 복기하게 된다. 그래서, 은수의 손을 잡아, 은수의 편을 들어 비로소 종분의 목소리를 낸다. 은수를 이용하고 방치한 어른들을 향해, 그 시절 자신을 짓밟았던 일제에게 했어야 할 분노를 비로소 끄집어 낸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방치된 소녀 은수와, 역사적으로 방치된 소녀였던 종분은 손을 잡는다. 시간을 거스른 '연대'이다. 오늘날 일본은 물론, 우리조차도 곁등으로 흘려버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가, 우리 사회 속 외면받은 은수와 같은 소녀들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드라마는 각인시킨다. 이는 드라마 소개에서 밝히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베트남 성폭력 피해자들의 손을 잡은 이야기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반성하고 되새김질 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라, 잘못된 역사에서라면 언제나 되풀이될 이야기라고 말하며 드라마는 끝맺는다. 이렇게 <눈길> 속 위안부 할머니의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그녀들이 이제 우리 앞에 할머니의 모습으로 있다고 해서, 그녀들의 삶도 과거형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처럼, 그 역사 역시 과거형으로 마무리될 역사가 아니라고 드라마는 강조한다. 은수의 손을 잡아 준 종분, 그런 종분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준 종분에게, 은수는 말한다. 종분이 은수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듯이, 은수 역시 종분의 분노를 대신 드러내 준다.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 은수를 통해서 자신을 비로소 찾아낸 종분은 오랫동안 빌려 쓴 영애의 이름을 돌려주고,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찾는다. 영애와의 오랜 우정이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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