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오래 했더니.....'
선배는 답답한 듯이 말했다. 마치 메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상황에 맞춰 정해진 표현을 하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막막해하셨다. 소향기 팀장을 보니 그 선배가 떠올랐다. 

jtbc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주인공 염미정의 해방클럽에 신입회원이 들어왔다. 그간 염미정을 비롯하여 박상민 부장, 조태훈 과장 등 회사 내 조직에 적응을 못하는 것같은 이들 세 사람에게 꾸준히 회사 내 동아리 활동 참여를 독려하던 행복지원센터 소향기 팀장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이들 세 사람을 독려하던 그녀, 그랬던 그녀가 세 사람이 만든 '해방 클럽'을 한번 참관한 후 스스로 '해방 클럽'의 신입회원 신청을 하였다. 

드라마가 시작한 이래 행복지원센터 팀장으로 익숙한 소향기 씨의 표정, 그런데 그녀가 말한다. 이제 다른 표정을 지으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고. 행복지원 센터 팀장에 걸맞는 표정을 지어오던 그 표정이 이제는 상갓집에 가서 그녀를 곤란하게 할 만큼 '혼연일체'가 되었다. 

 

 

해방은 어떻게 오는가
이제는 <나의 해방일지>가 아니라, <나의 추앙일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등장 인물들의 '연애사'가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극 초반 우중충하게 출퇴근만 한다며 돌려섰던 시청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조용히 스쳐지나가듯 등장한 소향기 팀장의 장면은 왜 이 드라마가 여전히 '추앙일지'를 넘어 '해방일지'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그리스 연극 속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칼, 융은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며 거기에 걸맞는 '역할'을 해나가는 모습으로 정의한다. 단적으로 '~답게'이다. 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답게, 엄마는 엄마답게, 문제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 '역할'에 맞춘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괴리'를 느끼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내 자신(self)'과 '페르소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말이다. 

조직 부적응자로 행복 지원센터를 들락날락했던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세 사람으로 말하자면 직장이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떨그덕거리던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남들 다하는 회사 내 동아리에 드는 것도 마다하고, 사람들이랑 편하게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던 세 사람, 떠나는 구씨가 염미정에게 이젠 '추앙', '해방', 이런 거 하지 말고 '평범'하게 살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미정은 그런 구씨를 붙잡는 대신, 서운하다는 말로 두 사람의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자신을 '평범'하다 하지만 '유모차를 끄는' 대신 아이를 업어 키우겠다는 미정,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구씨를 한 살 배기 아이처럼 업어주고 싶다는 미정은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와는 꽤나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인다. 

어쩌면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이들 세 사람의 '해방 클럽'은 일찌기 세상이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기 버거웠던 세 사람의 '해방 선언'이었는지도. 그런데 그런 세 사람 앞에 '신인 회원'으로 등장한 소향기 씨는 그런 세 사람과 전혀 반대의 지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너무 충실히 살다보니 그 페르소나가 자신이 되어버린 사람, 그래서 이제 그 '가면'을 벗으려 해도 벗겨지지 않는다는 사람, 남들의 '행복'을 열심히 지원하다보니, 정작 자신은 '미소 가면'이 달라붙어 버린 사람, 그 사람에게 '해방'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을 수 있는 얼굴 근육을 가지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그리고 소향기라는 양 극점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서성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어설픈 페르소나를 원망하고, 또 때로는 어느덧 자신이 되어버린 '페르소나'로 인해  갑갑함을 느끼며 말이다. 드라마의 시작부터 주구장창 출연진들의 출퇴근 길 모습을 비추던 드라마, 그 '출퇴근'에 공들인 시간은 바로 이 드라마가 길바닥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저마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최선을 다해 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몇 시간씩 출퇴근을 하며 주인공 염미정, 염기청, 염창희를 비롯하여, 그들의 아버지 염제호, 어머니 곽혜숙, 그리고 또 다른 등장인물들 모두 참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간다. 젯상 앞에서 고된 노동으로 무너진 관절로 절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디 일만 하나, 역할에 걸맞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해방'은 그렇게 애쓰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헌사'이다. 이미 당신들은 충분히 애쓰고 살아가고 있으니, 더는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고. 위로하지도, 그렇다고 조언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주겠다는 '해방 클럽'의 강령은 바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의 '긍정'을 뜻하는 게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저 가끔 만나 식사가 한 끼 나누던 선배가 '존경'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던 건, 선배가 직장 생활로 인한 '페르소나'가 어느덧 자신이 되어버린 모습을 고민하던 그 즈음이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이라는 정현종의 시 <방문객>처럼 말이다.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의 시간이 그 선배를 연륜이 넘치는 인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저어'하던 소극적인 염미정은 구씨를 '추앙'하고, '추앙'당하며, 그리고 '해방 클럽'을 통해 자신을 찾아간다. 미정의 해방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처럼 그냥 그대로, 생긴대로 미정이 답게 사는 것을 당당하게 가슴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연 소향기 팀장의 '해방'은 어떤 모습이 될까? 아침 방송의 김창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한다. '가면' 몇 개 안쓰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by meditator 2022. 5. 21. 00:58

사회에 나온 젊은이들, 우선은 '취업'이 관건이다. 자소서를 100통쯤 쓰고, 자존감이 바닥을 두어 번 치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죽어라 죽어라 한다'하는 끝에 직장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취업'만 하면 다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다니다 보니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다. 예전에는 직장 생활 성실하게 꾸준하게 하면 집도 사고 결혼도 할 만 했는데, '부모 찬스'가 아니면 '내 집 마련'이 '남의 떡'이 된 시대에 젊은이들의 어깨는 자꾸만 수그러든다. 

너무 '물질적인 삶'아니냐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 사는 일이란게 때되면 직장 잡고, 때되면 결혼하고 아이낳고 뭐 이런 삶의 과정을 무탈하게 밟아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더는 부모처럼 살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 그래서일까 요즘 드라마들은 이런 젊은이들의 결핍감을 주된 이야기꺼리로 삼는다. 

 

 

나 먹고 살 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그 돈 3억, 엄마가 해줄께, 이혼하면 되겠지. 이혼하면 3억은 주겠지!'
난데없이 이혼을 들먹이며 사태의 종지부를 찍는 어머니(이경성 분)에 아들 창희(이민기 분)는 그만 입을 닫고 만다. 
드라마의 꽤 많은 비중을 주인공들의 출퇴근에 '할애'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해방'을 갈구하지만 현실을 하루 네 다섯 시간 걸려 출퇴근을 해야 하는 처지, 파김치가 되어서 '당미역'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마을 버스를 타고 내려 터덜터덜 걸어 도착한 그곳에 염기정, 염창희 , 염미정의 집에 있다. 

그래도 거기엔 '집'이 있다. 하지만 창희의 '흰자위론'처럼 노란자 서울이 아닌 그곳에 집이 있기에 늘 주인공들은 지친다. 늘 '노른자'가 되고픈 창희,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편의점 본사 직원으로 일하는 창희는 오랫동안 성실하게 관리해온 편의점 점주로 부터 한 달 500만원의 수익이 꼬박꼬박 나오는 편의점을 인수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80세, 새로운 5년 갱신 계약서를 앞두고, 점주는 재계약 대신, 성실한 창희에게 권유를 한다. 하지만 어쩐다, 창희는 돈이 없다. 창희 뿐이랴, '노다지'인 줄 알면서도 창희 주변 그 누구도 돈이 없다. 

그래서 지난 번 차 사겠다고 했다가 얼굴이 벌개져서 상을 들어엎으려던 아버지 앞에 머뭇머뭇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조상 대대로 살던 이 동네, 저 밭을 팔면 가능할 텐데, 저렇게 한여름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싸구려 싱크대 만들어 제 값도 못팔며 사는 대신 꼬박꼬박 한 달 500만원은 벌텐테, 창희는 조바심에 결국 말문을 연 것이다. 

'아버지 그냥 하는 얘기예요. 편하게 들으세요', 하며 아버지의 혈압이 오르지 않게 서두를 꺼낸 창희, 하지만 창희의 말이 다 끝나도 아버지는 묵묵부답, 그 끝에 돌아오는 한 마디, '나 먹고 살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니가 3억 벌어서 인수해라'이다. 역시나 낭패다 싶은 그런 창희에게 어머니가 '이혼'을 들먹이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며 마침표를 찍는다. 

그래도 창희는 답답하다 하면서도 제안이라도 해볼 '언덕'이 있다. 서너 시간을 걸려서도 돌아갈 '집'이 있는 것이고 매달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직장도 있으니 그것조차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들의 '고뇌'가 또 다른 배부른 청춘가일지도. 인터넷에 서울에서 싼 방이라고 소개하는 곳은 '고시원'같은 공간에, 문 하나를 열면 화장실과 싱크대가 마주하고 있다. 그걸 투명 칸막이로 막는다. 그래야 싱크대에 뭐라도 올려놓고 샤워라도 할 수 있다나. 그래도 공용 화장실을 쓰는 고시원보다는 나은 편이라는 그곳이 보증금 500에 월 40만원이다. 

창희네 해프닝은 늘 창희 옆자리에 앉아 창희의 인간성을 시험에 들게 하던 회사 동료가 아빠 찬스를 써서 편의점 쇼핑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벌써 그렇게 편의점을 차린 게 세 번 째라며. 결국 안정된 수익을 보장하는 편의점을 놓치며 늘 결핍감에 시달리던 창희의 자괴감만 더하는 셈이 됐다. 

그렇게 드라마는 꼬박꼬박 서너 시간을 걸려서 출퇴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그려낸다. 열심히 사는 데 달라지는 것이 없는 삶, 과연 쉽사리 풀릴 길없는 처지에서 이들은 저마다 어떤 삶의 희망을 길어올릴까? 무엇보다 '흰자위'운운하며 스스로를 '흰자위'로 만드는 창희의 '해방'이 궁금하다. 

 

 

결혼만 해라, 집도 주고 상가도 주겠다? 
이렇게 삶의 조건이 삶을 만드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 그 삶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가 또 한 편 있다. 바로 kbs2의 <현재는 아름다워>이다. 

여기서 시작은 할아버지 이경철 씨(박인환 분)이다. 매번 손주들 자랑이 늘어지는 동생네 집과 달리, 장성한 손주들이 세 명이나 되는데 그 누구도 결혼을 하지 않아 적적함을 느끼던 할아버지는 이 문제를 두고 아들 내외와 의논을 한다. 

머리를 맞댄 세 사람은 손주 중 먼저 결혼하는 사람에게 '집'을 주겠다며 '경품'을 건다. 맏손주 윤재(오민석 분)는 치과 의사지만 주식으로 손해를 보고 집 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처지이다. 둘째 손주 이현재(윤시윤 분)는 지난 연애에서 상실감이 큰 상태에, 아직 집도 살 여유가 없어 결혼을 꿈도 꾸지 않은 상태이다. 막내 손주 이수재(서범준 분)는 공시생으로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닥터스>, <상류사회>의 하명희 작가가 쓴 <현재는 아름다워>는 대가족이 어우러지는 전형적인 kbs2의 주말 드라마식 구성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 역시 요즘 젊은이들의 '처지'를 주된 서사의 테마로 삼는다. 

물론, 말이 '집도 못사고 결혼도 못하는 젊은이들'을 다룬다지만 <현재는 아름다워>와 <나의 해방일지>의 온도차는 크다. 서너 시간 걸려 출퇴근을 하고 주말이면 밭일을 해야 하는 처지와 언제든 물려줄 재산이 있는 서울사는 노른자 같은 처지의 차이일까.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결혼만 한다면 자신이 가진 상가를 주겠다고 선뜻 나선다. 그러자, 며느리인 한경애 여사(김혜옥 분)는 자신들이 '여분'으로 가진 아파트를 내놓겠다며 맞장구를 친다. 

그러자 세 아들이자, 손주들은 저마다 앞장서 먼저 결혼을 하겠노라며 결혼 전선에 뛰어든다. 형제들보다 먼저 결혼하여 '집'을 확보하기 위해, 혹은 그 '집'을 팔아 자신이 하고픈 헬스장 자금을 구하기 위해. 치과 의사에 변호사, 이 잘나가는 젊은이들조차 '집' 을 주겠다는 부모와 할아버지의 '미끼'를 덥석 물며 드라마가 시작된다. 

<현재는 아름다워> 속 집없는 젊은이들은 결혼만 하면 집도 생기는 '위장된 어려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상가도 있고, 아파트도 있어 결혼만 하면 주겠다는 부모 슬하의 전문직 자녀들의 어려움이란게 '있는 사람들의 응석'같으니 말이다. 주말 드라마의 전형적인 가족 관계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만들어진 '어려움'같은 거다. 하지만 치과 의사고, 변호사라 하더라도 '집' 앞에서는 체면 불사 나서는 그 '낚시밥'이 주말 드라마의 테마로 등장, 요즘 세태의 관심사를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역설적인 현실성이다. 

by meditator 2022. 4. 25. 20:03

우울증, 무기력, 자존감 저하 등 이 단어들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을 마음 감옥에 가두는 이유들이다. 실재하는 '감옥'도 없고, '간수'도 없고, 문도 활짝 열려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감옥' 안에 웅크리고 앉아 한 발자국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뜨겁디 뜨거운 여름, 신영복 씨는 감옥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계절이 여름이라 말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옆의 사람를 증오하게 만든다는 그 계절, <나의 해방일지>는 바로 그 나 한 사람 서있기도 힘든 계절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 한 사람 혼자 서있기도 힘든, 그런데 한 집에서 부대껴야 하는  삼남매가 있다. 


 

왕복 4~5시간을 걸려 출퇴근해야 하는 처지,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정, 창희, 미정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낙담'이 이해도 된다. 그런데 그것 뿐일까? 되돌아 보면 <나의 아저씨>에서도 박동훈과 그 주변의 삶은 처음엔 참 답답했다. <나의 해방일지> 속 삼남매의 삶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심지어 서울 변두리 박동훈 네가 낫다 싶을 정도이다. 존재로부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니 회사 생활도 뾰족한 것이 없고, 관계는 더욱 지지부진한 염씨 댁 삼만매의 처지가 안쓰럽다. 그런데 어언 4회차에 이를 즈음에,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의 '존재'가 답답한 건 맞지만, 어쩌면 저들은 '존재' 이상, 스스로 만든 '마음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음 감옥에 갇힌 이들 
서울이란 계란 노른자를 둘러싼 흰자 같은 동네, '흰자위'론을 들고 나온 건 아들 창희(이민기 분)이다. 그런데 창희의 이른바 '맞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의 의식에는 사람의 존재도 노른자, 흰자가 나뉘어져 있는 듯하다. 그토록 흰자위 이 변두리 동네의 존재를 탈출해서 '노른자'로 가고픈 열망에는 그래야 그 스스로 '노른자'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드디어 '창희'가 연인과 헤어진 진짜 이유가 드러났다. 늦은 저녁 전철을 타고 집에 오던 기정(이엘 분)은 창희와 헤어진 연인이 홀로 창희에 동네에 오는 전철을 탄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니, 창희는 말한다. 그 연인이 자신을 보게 되는 그 '별 수 없는 놈이라는 눈빛'때문에, 그래서 스스로 벽을 치고 헤어졌노라고. 

연인과 함께 멋들어지게 자가용을 타고 데이트도 할 수 없는 놈, 회사에서 '갑'이 될 수 없는 처지, 에어컨 한번 맘대로 틀 수 없는 가정 형편, 그런 것들이 모두 창희에게는 '흰자위'같은 삶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창희는 그런 삶의 조건들에 견딜 수 없다. 대리점 관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처지를 난처하게 만든 동료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없이 풀어놓으며 창희의 결론은 승진을 해서 스스로 '노른자'와 같은 인물이 되어 그런 '흰자위'같은 것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승진'처럼 삶이 달라지면 '노른자'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창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한루프같은 경쟁 사회에 자신을 던져 그 안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된 삶만이 자신을 구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창희의 또 다른 모습일 지도.

창희가 스스로를 자존의 늪에 가두었다면 기정을 혼돈스럽게 하는 건 '권태'이다. 십 수년의 쳇바퀴같은 회사 생활, 그리고 늘 출퇴근에 시달리는 나날, 그 속에서 기정은 삶의 활로를 찾지 못해 바둥거린다. 그런데 그녀가 찾는 그 삶의 활로가 막막하다. 머리를 해보고, 성형외과를 찾아 시술을 해보고, 그리고 올 겨울 안에 그 누구라도 붙잡고 사랑을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도 막상 이혼남을 소개해줬다고 소개팅 주선자에게 거품을 무는 처지이다. 


 

자기 자신을 가둔 감옥에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한 채 '여름'이라는 계절을, 주변 사람들을, 그리고 별 다른 변화없는 삶을 상대로 끝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창희와 기정, 그들 사이에서 서늘하게 침묵을 지키는 미정(김지원 분)이 있다. 그런데 염씨네 막내 미정과 염씨네에 일을 도우는 정체불명의 구씨(손석구 분)는 참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하다. 

한 걸음
한여름 볕보다도 더 묵직하게 자신의 일만 묵묵하게 해내는 두 사람, 끝없이 술만 마셔대는 구씨와, 조용히 회사와 집을 오가는 미정, 삶을 겨우 버텨내는 짙은 우울이 두 사람 모두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일까? 미정의 눈에 구씨가 들어온다. 그리고 어느날 미정은 구씨에게 당돌하게 말한다. '나를 추앙해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그 '구문'의 문체, 미정은 설명을 보탠다. 그 거창한 '추앙'이 서로를 무조건 응원해주는 것이라고. 

미정의 도발은 '구씨에게 추앙'을 요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랜 출퇴근으로 회사 그 어느 동아리에도 들지 않아 요주의 인물이 된 미정은 자꾸만 회사의 행복 센터로 불려가고 거기에서 미정처럼 각자의 이유로 요주의 인물이 된 다른 두 사람 박상민 부장과 조태훈 과장(이기우 분)을 만나게 된다. 본의 아니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세 사람, '동아리' 문제로 고민하던 중 미정이 제안한다. 우리가 스스로 동아리를 만들자고. 그렇게 해방클럽이 탄생한다. 

'해방 클럽'이 뭐냐는, 뭘로 부터 '해방'을 하는 거냐는 동료의 질문에 미정은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나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여기서 미정의 웃음이 중요하다. 4회 만에 처음으로 미정은 진짜 웃음을 웃었다. 늘 무표정하게, 심지어 오빠와 언니가 싸워서 언니가 날린 슬리퍼를 맞아도 무표정하게 하지만 온 힘을 다해서 문 밖으로 슬리퍼를 던지는 것으로 겨우 자신을 드러내는 미정인데, 그런 미정이 자신감넘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뜻과 다르게 어떤 동아리에 끌려들어갈 처지에서 탄생한 해방 클럽,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어색하지만 나란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세 사람의 표정이 편안하다. 그저 늘 자신들은 세상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세 사람이 스스로 자신들만의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남친을 위해 신용대출을 받고 그걸 대신 갚아야 하는 처지, 회사 동료들은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쑥맥' 취급을 하고, 상사는 '빨간펜'으로 대놓고 미정을 무시하는 처지가 미정이를 꿈틀하게 만든 것이다. 미정은 벼랑 끝에서 배수진을 치듯 한 걸음 나선다. 지금까지 그녀를 가두었던 자신의 감옥 밖으로. 

많은 심리서의 결론은 사실 뜻밖에도 명쾌하다. 무엇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구구한 심리 이론의 끝에 도달하는 건 '실행'에 있다.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행동'에 옮기라고 한다. 바로 그 심리서의 '답정너'에 삼남매의 막내 미정이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런 미정에 구씨가 화답했다. 미정의 모자를 , 아니 미정을 향한 도약으로. 





by meditator 2022. 4. 23. 00:48

삼포도 아니고 '산포'다. 노른자 위 서울을 둘러싼 흰자 같은 경기도, 그 중에서도 전철을 타고, 다시 또 마을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는 곳에 사는 삼남매가 있다. 염제호 씨댁 기정(이엘 분), 창희(이민기 분), 미정(김지원 분)이다. 

경기도에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 역시 경기도민으로 서울 웬만한 곳에서 약속을 잡으면 넉넉하게 2시간을 잡고 움직인다.  한 시간 정도면 괜찮은 거리다. 이런 이야기를 서울 시민인 친구들이 들으면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30분이 넘으면 멀다고 생각하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내게도 마을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매일 출퇴근을 하는 삼남매가 애잔하다. 웬만하면 '독립'한다고 할 만도 하건만 꿋꿋이 셋은 택시를 타고서라도 집으로 간다. 

집에 갈 택시 잡을 궁리를 하다 여자 친구에게 '촌스럽다'는 타박을 당하고 헤어지게 된 창희는 어렵사리 아버지 앞에서 자동차를 사겠다는 말을 꺼낸다. 몇 년 전에도 차를 사서 그 할부를 못갚는 바람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처지, 전기차라서 비용이 거의 안든다느니, 집에 오는 택시비가 더 든다느니, 이리저리 구색을 맞춰보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아버지의 손 앞에 불가항력이다. 

 

 

흰자위같은 동네
4년 만에 돌아온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에서는 서울 변두리 동네를 배경으로 삼형제의 이야기를 풀어내더니, 이제는 그 보다 조금 더 떨어진 경기도 한 동네로 시선을 옮긴다. 우러러 볼 만한 경력도, 부러워 할 만한 능력도 없이 그저 순리대로 살던 아저씨들은 이제 2030 세대의 '갑남을녀'들이 '프레임'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저씨들이든 2030세대이든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기정, 창희, 미정 역시 부대끼는 지하철에서 만나는 평범할 대로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모처럼 찾아온 동네 친구에게 창희는 말한다. 내가 서울에서 살았으면 너랑 친구 안했을 거라고. 그 말인즉, 서울에서 살았으면 친구는 '선택'의 대상이 되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 '친구'는 가족처럼 날 때부터 그냥 주어지는 거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런 면에서 동네 운동장에서 술을 먹는 건지, 축구를 하는 건지 모르겠던 <나의 아저씨>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사람 냄새나는 곳, 하지만 그래서 '촌스러운' 곳, 그곳이 이들의 '터전'이자, '아킬레스 건'이다. 그렇게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에 이어 또 다시 '장소'를 전면에 내세우며 '삶의 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의 사연에 앞서 그들이 처한 공간의 정서 속에 물씬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계란 흰자같은 경기도민의 한계에 대해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는 창의 곁에서 미정이 반문한다. 서울에서 살았으면 달랐을까? 그럼, 서울에서 살면 달랐지라고 강하게 답하는 창희에게 미정은 말을 잇지 않는다. 그리고 혼잣말을 더한다. 서울에서 살아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사는 것도 흰자위
노는 날에도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가 머리를 볶고 들어와 맘에 안든다고 감았다, 그걸 다시 드라이로 풀어내느라 난리를 치는 큰 딸, 그 딸을 보고 엄마는 속터져하며 말한다. 지랄도 팔자라고. 지 성질머리가 지 팔자를 들볶는다고. 하지만 새벽부터 해질 녁까지 싸구려 싱크대에 밭일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아버지 염씨 앞에 오며 가며 시간을 다 보내느라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창희의 말처럼 지랄 맞아 보이지만 술 마시다가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는 삼남매의 고분고분한 일상은 머리라도 볶아야 숨통이 트일 것처럼 보인다.

미정이 생각은 안하냐는 엄마의 지청구 앞에 기정은 미정이는 젊잖아?란다. 젊다고 다를까? 카드 회사 계약직 직원인 미정은 어디서나 그림자같다. 오빠가 전기차를 사겠다고 아버지 앞에 야심차게 들이대다 맞을 뻔하는 해프닝을 벌이는 옆에서도 미정이는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는다. 회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 역시도 출퇴근 시간에 쫓겨 그 흔한 회식 한번 못하고, 그 덕일까 '이쁘지만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간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게 미정과 같은 이들을 회사의 '행복 지원센터'가 부른다. 볼링 동호회라도 들라는데, 함께 불려간 박상님 부장은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냥 이런 사람들도 있는 건데 그냥 이렇게 살게 놔두면 안되는 거냐고. 하지만 그냥 그런 걸까? 

팀장에게 넘긴 보고서가 빨간펜 선생님이 매긴 답안지처럼 빨간 줄이 정신없이 그어진 날, 그런 자신을 두고 팀원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회식 자리로 떠나가는 것을 보며 미정은 답답한 마음에 '가상의 당신'을 찾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선뜻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힘든 미정만의 '해방'이다. 가상의 그가 과연 미정을 해방으로 인도할까?

그런데 염씨네 삼남매만 답답한 게 아니다. 전기차라도 사겠다고 그래야 뽀뽀라도 하지 않겠냐고 궁여지책으로 말을 건네보는 창희의 처지도 이해가 되지만 그런 창희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려는 아버지 염제호의 삶도 녹녹치 않아 보인다. 흰자위같은 동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흰자위같은 삶은 세대 불문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공감은 멀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사는 게 참 답답해 보이는 젊은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옴짝달싹하기 힘들게 옭죄어 오는 삶, 일도, 연애도, 아니 사는 것이 통털어 무엇 하나 그리 뽀족하게 '씨원'하게 풀리는 것이 없는 기정, 창희, 미정 삼남매를 통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로 젊은 세대에서부터 중년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위로와 힐링을 주었던 박해영 작가, 과연 이 답답한 삼남매의 '해방 일지'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비빌 언덕이 되어줄수 있을까?


by meditator 2022. 4. 1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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