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한파주의보를 갱신하던 올 겨울의 어느 날, 이선균과 그의 벗들 20여명은 강원도 철원에서 시작하여 낙산에 이르는 6박 7일의 무모한 여정에 나섰다. 그리고 그 여정을 담은 프로그램이 <행진-친구들의 이야기(이하 행진)>이다.

 

엄밀하게 친구들과 길을 걷는 것을 카메라에 담은 것은 <행진>이 처음은 아니다. 설마 내가 또 받으랴란 마음에 남우 주연상을 받으면 국토 대행진을 하겠다는 공약을 덜컥 해버린 하정우가, 공효진을 비롯 16명의 일행과 서울에서 해남까지의 국토 순례 여정을 담은 영화, <577프로젝트>가 이미 2012년 개봉하여 소소한 재미와 고된 여정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었기 때문이다.

스크린에서 tv 화면으로 옮겨온 국토 순례의 길은 하정우 대신, 이선균이 앞장을 섰다. 그리고 트로피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순례 길에 나섰던 기쁜 마음과 달리, '좋아서 했던 일인데, 지난 5,6년을 쉼없이 달려오다 보니 어느샌가 돈을 버는 수단이 되어버린 연기가 부담스러워진, 하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가장인 이선균이 버거운 삶의 쉼표로 선택한 무거운 '힐링'의 방식이다.

하지만 가까운 벗들과 선배들을 불러모은 이선균은 훌훌 털고 떠나는 홀가분함은 커녕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로 인해 고행길에 들어서게 됐다는 책임감에 금새 발걸음이 무거워진 채,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란 책임감에 버거워한다. 그 순간 이선균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배우가 아니라, 텔레비젼을 보는 모든 고달프고 버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영화 <577프로젝트>와 <행진>의 차이점이고, <행진>이 그저 하염없이 걷고 또 걷기만 하는 지리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 여정을 지켜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행진>과 <577프로젝트>의 공통점도 있다. 그건 바로, 영화 <577프로젝트>가 분명 홍보는 하정우와 공효진이 함께 하는 국토 순례 대장정이라고 홍보를 했지만, 정작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들과 함께 한 16명의 대원들이었듯이, 이선균의 말 한 마디에 선뜻 고된 여정에 나서준 벗들 또한 존재감이 만만치 않다.

지친 사람들의 여정을 그의 직업인 쇼 호스트의 특성을 십분 살려, 밝은 분위기를 유지시켜주고, 모든 게임을 이끌어간 홍성보에, 디스크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아픔을 참아가며 함께 한 배우 오정세에, 피곤에 지친 사람들에게 툭툭 던지는 촌철살인의 매력남 유해진에, 그녀의 금메달만큼이나 빛났던 멘토링의 장미란, 늘 친구에 대한 미안함을 하룻저녁꺼리로 나마 갚기위해 밤샘 촬영에도 불구하고 달려왔던 윤희석까지, 아니 굳이 이름을 거명하지 않아도 힘든 친구를 위해 보조를 맞춰주고, 웃어주고, 그리고 눈밭을 묵묵히 발을 맞춰주는 20여 명의 사람들의 행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져 오는 감동이 전해온다.

제주 올레 길을 시작으로, 걷기 열풍이 불어닥치더니, 우리 국토의 곳곳에 숨겨져 왔던 옛길들이 걸을 만한 길로 주목받기 시작한 지도 오래 되었다. 서명숙 제주 올레 이사장이 고향 제주의 올레를 만들게 된 계기가 바로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걷고 나서였다고 한다. 거의 한 달에 가까운 말 그대로의 순례 길을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저 하염없이 걷기 위해 찾아드는 것을 보고 고향 제주의 아름다운 길을 떠올렸다고 한다. 굳이 걷기 위해서라면 그 먼 타국을 찾을 필요가 없기에.

어디 그뿐인가, 그보다도 전에 일찌기 한비야씨는 걸어서 지구를 몇 바퀴나 돈 것으로 베스트 셀러를 만들기도 했었고.

그런 걷기 열풍에 비하면 <행진>이란 프로그램은 꽤 뒤쳐진 트렌드 따라잡기 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그저 꾸역꾸역 걷는 것만으로 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이 꽤 난감한 설정이었으니, 그간 엄두를 내지 못할 만도 했다.

하지만,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며 게임도 하고, 입수 하는 것도 시들해지고,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애써 고생을 하는 것도 뻔해지는 이 즈음에 그저 꾸역꾸역 사서 고행을 하며 그 속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벗들의 우정 '행각'을 엿보는 것이 어쩌면 위기에 봉착한 현시점의 리얼 버라이어티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해결책일 수도 있겠다.

by meditator 2013. 2. 16. 0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