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나라에서 <어바웃 타임>은 성공한 로맨틱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덕분에 개봉하는 외국 영화 중 종종 <어바웃 타임> 제작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개봉하는 영화들이 눈에 띤다. 2014년에 개봉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그랬고, 이번에 개봉한 <이퀄스>가 그러했고, 9월에 또 개봉할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가 그렇다. <어바웃 타임> 제작진을 믿고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이들 영화에서 <어바웃 타임>에 필적할 만한 잔향깊은 로맨스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 기대가 늘 부합하는 건 아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제목은 사랑을 앞세웠지만 막상 영화를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어바웃타임>과는 다른 질감을 가진 사랑의 생로병사였다. 마찬가지로, <어바웃 타임> 제작진에 젊은 청춘 스타 니콜라스 홀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내세운 <이퀄스>에 대한 반응 역시 호불호에 차이가 있을 듯하다. 




그 호불호의 간격은 니콜라스 홀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사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바웃 타임>의 돔놀 글리슨과 레이첼 맥아담스의 진득한 사랑 저리 가게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은 곡진하며, 그 마무리의 여운 역시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청춘 남녀의 순애보에도 불구하고 <이퀄스>란 영화를 온전히 사랑만으로 완결시키지 않는 건 바로 <이퀄스>란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 두 남녀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와 세계관이 관객들이 온전히 '사랑'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아니, 오히려 <이퀄스>는 <어바웃 타임> 제작진을 내세워 사랑 영화임을 표방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랑의 전제 조건이 되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다. 

사랑이 허용되진 않는 세상에서의 사랑, sos
영화의 배경은 선진국, 인류는 서로간의 전쟁으로 지구 대부분을 파괴시키고, 겨우 피해를 입지 않은 일부의 지역 선진국과 반도국을 남겼다. 그 중 선진국은 인간이 살기에 매우 완벽한 환경과 조건을 갖췄다. 지난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인간의 통제되지 않은 감정'에 있다고 생각한 선진국 사람들은 dna조작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거세시켜, 이퀄(equal)을 만들었다. 감정이 sos(switched- on-syndrome)가 되고, 사랑이 유일한 범죄가 된 '완벽한(?) 사회.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 않고, 쾌적한 환경에서 적절한 케어를 받으며 각자가 원하는 바 노동에 종사하며 살아간다. 



그 선진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 분), 그는 여느 때처럼 일어나 식단에 맞는 식사를 하고 갖춰진 옷을 차려 입고 출근을 해 자신의 업무에 종사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변화가 생겼다. 그의 눈에 이상이 감진된 동료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의 시선은 니아를 쫓는다. 결함인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한 날 주먹을 꼭 쥐며 감정을 짖누르는 니아를 발견한 사일러스, 서로서로가 감정이 생겨난 동료를 감시하고 고발하듯 그렇게 자신도 니아를 바라보는 거라 사일러스는 받아들이려 하지만, 니아에 대한 그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그를 괴롭힌다. 결국 그 감정의 혼돈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일러스는 스스로 병원을 찾고 감정 통제 오류 1기임을 판정받는다. 영화는 '감정'을 맛보지 못한 사일러스가 스토커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통해 그의 감정을,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의 불가항력을 설명한다.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랑 영화의 공식대로 사일러스, 그리고 니아는 결국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마는데...

감정이 느껴지면 스스로 병원에 가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약을 받거나, 그걸 숨기면 끌려가는 세상, 그 속에서 감정을 숨기지 못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들며 동시에 의문에 빠진다. 과연 사랑이 문제일까? 

이들이 사는 '선진국'에서 사랑을 범죄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종사하는 '노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두 남녀 사일러스와 니아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느낀다. 처음 사랑에 빠져들때의 혼란도 잠시, 스스로 병원에 갔던 것을 후회할 만큼 두 사람의 나날은 환희에 차있다. 오히려 방해는 커녕 노동 생산성은 높아진다. 그저 문제가 되는 것은 주변 동료들과, '사랑'을 범죄시하는 사회. 

사랑을 넘어선 존재의 묵시록 
두 스타 배우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에 몰입하는 잦은 클로즈업, 그리고  온전히 두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는 서사,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들이 사는 '선진국'에 대한 질문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인간을 통제하는 사회에 대한 서사는 2003년 크리스찬 베일의 <이퀼리브리엄>을 통해 익숙한 것이다. 단지 <이퀼리브리엄equillibrium>이 영화 후반 '감정 통제'를 둘러싼 '액션'이 백미를 이루었다면, <이퀄스>는 그걸 온전히 두 주연 배우의 금지된 사랑을 통해 설명한다. 

사일러스와 니아가 사는 세상은 '감정'만 제외하면 완벽한 세상이다. 온통 하얀 옷에 하얀 건물의 거세된 감정을 상징하듯 무미건조한 색채의 세상이지만, 그걸 제외하면 생로병사의 모든 것을 사회가 책임져 주는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선사시대 동굴벽에다 '예술'을 했던 인간의 감정은 dna의 조작으로도 거스를 수 없다. 그 완벽한 삶을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곳곳에서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그 감정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스스로 몸을 던지거나, 울부짖으며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dna 조작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인간 감정의 숭고함을 설파하며 두 남녀의 순애보를 설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 그리고 사랑의 숭고함과 함께, 동시에 솟아오르는 의문, 이 가상의 감정 전체주의 선진국이 과연 '가상의 사회'일까? 란 의문이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퍼져가고 있는 3포, 5포의 포기 증후군은 21세기 자본주의에 완벽하게 통제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과연 사랑과 결혼과 연애를 포기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적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을 조장하고 암묵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는 이퀄스 속 하얀 전체주의와 다른 것인가란 의문이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아니 다른 것이 있다면, 영화 속 전제된 환상적인 '물신성'이 이 사회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아니 오히려 주어지지 않았기에 신기루처럼 이 사회 속 인자들을 더 강력하게 포섭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아닐까? 

영화에서 사랑은 '노동'에 대적되는 소모적 감정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노동'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랑과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다. 심지어 외모나 인성도 '노동'에 적합한 것으로 바꾸고자 트레이닝을 받거나, 교정하고, 수술대에 오른다. <이퀼리브리엄>이 그 감정을 통제하는 전체 사회에 '액션'으로 저항했지만, <이퀄스> 속 연인들의 도발은 그 중 한 사람의 '투항'으로 실패하고 만다. 2003년과 2016년의 격세지감이다. 사일러스의 투항으로 영화는 비극적 순애보의 여운과 함께, '자본'에 무기력해져버린 현대인을 투영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겨국 영화는 당신들의 존재를 묻는다. 그 존재의 묵시록에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퀄스>가 잔향이 깊을 듯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어쩌면 지루한 감정의 소모로만 남을 가능성도 있다. 
by meditator 2016. 9. 2. 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