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보다 한참이나 키는 더 큰, 다 자란 아이가 서슴없이 '팩폭'을 날린다. 엄마, 아빠만 힘들게 살아오신 줄 알지만, 그런 엄마 아빠 보면서 살았던 우리도 힘들었어요, 라고. 몇 십년 살아오며 수월했던 부부가 어디 있으랴. 그런데 알고보니 그건 '가족' 모두의 몫이었단다. 그저 그러려니 남보기에 그저 평범한 듯한 가정이지만, 그 가정사의 속내는 알고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요지경 속이 되어버리기가 십상이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의 김상식 씨네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의 졸혼 요구에 산으로 떠나버렸다가 졸지에 22살이 되어버린 아버지 김상식(정진영 분) 씨네, 그가 젊은 김상식으로 돌아가기 전 그의 집은 25년을 트럭 운전을 하며 떠도느라 가족과 멀어진, 그러나 매우 가부장적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참아내고 견뎌내며 자식 셋을 다 키우고, 이제 졸혼을 요구한 어머니(원미경 분)와 세 아들 딸의 대한민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 나이 또래 '평범한' 가정처럼 보였다. 

가족 봉인이 풀리다 
하지만 22살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은밀하게 어머니에게 큰 딸 은주(추자현 분)가 자신의 소생이 아닌 걸 아냐는 질문을 던진 순간, 이 평범하던 가정의 '봉인'이 풀리기 시작한다. 

진숙이 임신 소식을 알린 자리에서 무릎끓고 반지를 전하던 상식씨, 여전히 거실에 자리잡고 있는 사진 속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처럼, 당연히 진숙의 뱃속 그 아이는 상식 씨의 아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오래된 '비밀'을 22살로 돌아간 상식 씨가 제일 먼저 확인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은밀한 목소리를 세상 걱정없던 막내가 들었다. 

22살이 되어버린 아버지는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통을 내팽개치던 그 자기 밖에 모르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말끝마다 숙이씨라며 어머니와 손을 잡고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하던 아버지, 하지만 어머니 숙이 씨는 그 시절을 잊었다며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서야 처음으로 아버지의 차에 올랐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찾아간 울산, 그곳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청년을 마주쳤다. 술자리에서 그 누구라도 아버지라 부른다며 얼버무린 청년의 눈은 흔들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놀라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되뇌인다. 지금처럼 숙이씨를 연발하며 아내 바보였던 남편 상식 씨가 조금씩 변해가던 그 시절, 그래서 상식 씨만을 믿고 남의 아이를 품고 그에게로 왔던 숙이 씨가 이제 남편 대신 아이들만을 껴안고 살아가기라 자신의 가슴을 치며 견뎌냈던 그 시간, 그 시간 속에 저 '아버지'라 부르는 눈빛 흔들리는 청년의 숨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봉인이 해제된 건 아버지와 어머니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저 밤 산행을 간 게 아니라 모아놓은 수면제로 자살 시도를 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큰 딸은 어머니를 찾아와 그 예전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 죽으려고 했던 '기억'을 묻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 종일 곯은 배를 안고 죽지 않고 겨우 돌아온 집에서 아버지는 일도 나가지 않은 채 동생들의 끼니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잊을 수 없는 기억, 그래서 큰 딸은 어머니가 싫었고, 동생이 미웠다. 오래도록.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은 채 선명하게 낙인이 되어버린 그 기억은 동생 은희에게는 또 다른 '상흔'이다. 

하지만 봉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뉴질랜드로 떠난 남편의 노트북에서 큰 딸 은주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남편과의 '공허한 거리감'의 실체를 발견하며 또 한 가정의 '파국'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기억 상실이 부비 트랩이 되어 봉인 해제되어 버린 김상식 씨네 일가의 숨겨진 모습들, 그 드러나는 면면들은 결국 우리 사회가 그간 신봉해오던 '가족 신화'의 속살들이다. 비록 융자는 꼈지만 오랫동안 일해서 마련한 번듯한 내 집, 그리고 그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잘 자라준 아이들, 하지만 그 번듯해 보이는 한 꺼풀을 벗겨내고 보면, 그 언젠가 부터 '금'이 가버린 부부, 하지만 '아이들'이라는 접착제로 견뎌왔던 시간, 하지만 그 접착제가 되었던 아이들은 저마다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들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김상식 씨네의 봉인 해제된 가족이 '가족'을 묻는다. 과연, 이러고도 '가족'일 수 있을까? 가족이 뭘까? 

by meditator 2020. 6. 10. 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