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싸우다 정든다'라는 건 이제 로맨틱 코미디를 비롯한 사랑 이야기에 클리셰와도 같은 설정이다.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으르렁거리다가, 서로의 진실, 속내를 알게 되면서 '웬수'같던 상대방이, '측은지심'을 넘어 '사랑'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말 덧붙이기도 입 아플 정도로 '흔해 빠진'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로운 드라마가 등장할 때마다 이런 전형적인 구도가 다시 차용되는 건, 적이 동지가 되고 연인이 되어가는 그 '역동적' 과정에서 오는 매력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에 웬수가 연인이 되는 이야기를 준비하는 작품들은 더욱 더 치명적인 설정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심한다. 그런 가운데 서로 '적'으로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남자와 여자가, 조만간 '사랑'을 할 것같은 두 편의 드라마가 눈에 띤다. 바로 <귓속말>과 <자체 발광 오피스>이다. 




<귓속말>의 두 주인공 이보영과 이상윤은 2013년 kbs2의 주말 드라마 <내 딸 서영이>에서 여주인공 서영이와 그녀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했던 우재씨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었다. 여전히 두 사람을 보면 우재씨와 서영이가 떠올려지는데, 웬걸 박경수 작가의 주인공으로 만난 두 사람은 호시탐탐 서로를 제거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보영이 분한 극중 신영주의 아버지는 방산복 비리 사건을 폭로하려다 오히려 동료 기자의 살해범으로 몰려 법정에 서게 된다. 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정의로운 판사로 통하던 이상윤이 분한 이동준을 찾아가 아버지의 구명을 부탁했던 신영주. 하지만 대법원장 사위 등에 대해 강직한 판결로 인해 위기에 몰린 이동준은 신영주 아버지에 대해 눈을 감으며 그 위기를 빠져나간다. 이에 신영주는 자신의 몸을 던져 이동준을 위기로 몰아넣고, 위장으로 그의 비서가 되어 그의 목을 조르며 아버지를 구하려 한다. 이런 신영주에 대해 이동준은 사람을 풀어 그녀가 숨긴 동영상을 찾는 등 어떻게든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한다. 

적이 되어 만난 서영이와 우재씨 
서로 적이 되어 만난 두 사람, 이들의 구도는 흡사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죽인 여자라 오해하고 그녀를 죽일 듯이 괴롭힌 2015년 kbs2의 <비밀>과 흡사하다. 물귀신처럼 따라붙으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며 한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으려는 사람과, 그런 사람으로 인해 점점 더 궁지에 몰리는 또 한 사람. 이 헤어나올 길 없어 보였던 <비밀>의 악연이 사건의 숨겨진 진실과 그 뒤에 숨겨진 더 큰 악의 그림자가 드러나며 적이었던 두 사람이 증오를 연대로, 다시 사랑으로 바꾸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었다. 마찬가지로 신영주의 아버지에 대한 판결을 내린 사람은 이동준이었지만 그런 판결을 협박한 건 방산업체를 비호한 법무법인 '태백'이라는 배후가 두 사람이 공동전선을 꾸릴 계기가 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태백의 사위가 된 이동준, 하지만 알고보니 딸 최수연(박세영 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정일(권율 분)이었다는 숨겨진 진실과 함께 그 '사위'의 자리는 '사약'을 받아놓은 거나 다름없는 처지로 돌변한다. 목을 조르지만, 동시에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유일한 지푸라기인 이동준, 자신의 목을 조르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는 태백에서 유일한 자신의 편인 신영주, 그렇게 두 사람은 본의 아닌 '동지'가 되어 '태백'을, 그리고 태백 속 실세로 자부하는 강정일 세력을 상대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전략적 동지였던 두 사람, 그 동지적 관계는 강정일과 백상구의 손아귀에서 위협에 빠져있던 신영주를 이동준이 기지로 구하고, 이제 위기에 빠진 자신이 지나가던 호송차 속 자신을 떠올리며 혼란에 빠지듯, 지나가는 상조 차량을 보며 아버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신영주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전략적'이라는 '이성적' 관계가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그 변화는 뜻밖에도 5회 마지막 장면, 옭죄어오는 백상구 일파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이동준의 입을 굳이(?) 신영주의 입이 막으며, 첫 회 두 사람의 동침에 이어 '적이 아닌 관계'로의 질적 전환을 예고한다. 



갑을 로맨스
서로 너 죽고 나 살기로 얽어매어진 <귓속말> 커플에 비하면 그래도 <자체발광 오피스>는 나은 편일까? 하지만 어쩌면 갖은 치명적 요소를 다 장착한 <귓속말> 커플에 비해 갑을 관계로 만난 은호원(고아라 분)과 서우진(하석진 분)의 애증이 더 현실적일 지도 모르겠다.

100번 째 면접 시험장에서 면접관과 응시생으로 만난 서우진과 은호원. 서우진은 학점 말고는 스펙하나 변변한 것이 없는 채 입사 원서를 낸 은호원이 성의가 없다, 노력을 하지 않는다 질타하고, 그런 서우진에 대해 '알바'를 하며 겨우 대학을 마친 은호원은 벽 앞에 서있는 노력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 결과는 어김없이 또 한 번의 실패다. 그리고 그 실패는 그녀를 한강 다리로 내몬다. 

이처럼 최악의 '갑질'과 죽음에 내몰린 '을'과 만났던 두 사람, 뜻밖에도 두 사람의 인연은 하울퍼니처의 임시직 사원과 마케팅 팀장으로 이어진다. 엮이고 싶지 않은 갑질의 상사와 사고뭉치 신입에 임시직 사원이라는 두 사람의 '편견'은 몇 번의 해프닝을 거치며 그 오해의 커튼을 걷어 간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같은 서우진은 알고보면 집에서 반바지 바람에 소탈한 아재로, 거기에 어머님을 여의고 아버지와 둘이 살아온 입지전적 인물로 그 까칠한 외피를 벗기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그저 노력 부족 사고뭉치 임시직이었던 은호원은 자기 헌신적이며 희생적이기까지 한 마음 따뜻하고 때로는 엉뚱한 '여성'으로 서우진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는 사실 쉽사리 접점을 찾기 힘든 갑을 팀장님과 임시직 사원이, 서로의 다른 면모를 통해 마음을 열고, 이제 은호원의 시한부라는 또 다른 복병으로 인해 어쩌면 이미 시작한 끌림을 본격적 사랑으로 풀어갈 듯하다. 

내 아버지에 대해 부당한 판결을 내린 판사, 입사 시험장에서 갖은 면박을 주며 나를 떨어뜨린 면접관, 이들을 과연 현실에서 사랑할 수 있을까? 하지만 드라마는 '사랑'이라는 '기적'을 위해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의 이해 관계를 끌고온다. 그 비현실적인 현실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의 사실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극적인 사랑의 유효한 땔감이 된다. 

또 한편에서 이렇게 이해 관계의 갈등으로 시작되는 남녀 관계가 사랑의 전면적 관계로 등장하고 있는 지점에는, 우리 사회 속 갈등 요소로 자리 잡은 젠더 갈등의 여운도 드리워져 있다. 그들이 '남자와 여자'로 만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관계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속에서 사회 내에 책임지워진 역할을 놓고 끊임없이 그 '권력'으로서의 관계를 다투는 현실이, 자연스레 이해 관계의 충돌로써 남녀를 주인공으로 이물감없이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지. 

by meditator 2017. 4. 11. 1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