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스파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본' 시리즈이다.

최근 제레미 러너의 '본 레거시'로 새로운 버전으로 탈바꿈했지만, 그래도 '본' 하면 뭐니뭐니 해도 멧 데이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본 아이덴티티', 본 슈푸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의 3부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직에 의해 필요가 다한 스파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집단을 향해 복수를 해나가는 극적 구조와 멧 데이먼의 연기가 3편에서 모두 이물감없이 보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또 하나 '본' 시리즈를 '본' 시리즈 답게 만든 것은 바로 액션! 살인 기계로 만들어진 인간이 생존을 위해 빚어내는 타인과의 액션의 합은, 그 무지막지한 액션의 너머에 드리워진 비인간적으로 훈육된,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것을 다시 꺼내들어야만 하는 본능,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비애같은 것이 그 자체로 버려진 스파이 '제이슨 본'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베를린

 

그리고 이제 '베를린'에서 우리는 다시 액션을 통해 표종성이란 또 한 사람의 버려진 스파이를 읽어낼 수 있다.

누군가는 과연 '베를린'이 액션 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베를린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남과 북이 만들어내는 사건에 대한 설명은 불친절한 반면에, 표종성과 그들 둘러싼 인물들의 몸을 부딪치는 쟁투는 세밀하고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스토리를 이해 못해서 '베를린'이 재미없단 말이 나오기도 할 정도로.

하지만, 남과 북의 세세한 사연, 북한의 정권이 바뀌고, 그 와중에 베를린 지부를 둘러싼 권력의 암투, 그리고 기존의 베를린 세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없애려는 동명수 부자의 음모를 세세히 꼭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본 아이덴티티'를 보고, 그 음모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어도 영화를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듯이, 오히려 '본' 시리즈가 제이슨 본을 둘러싼 권력의 음모를 3편에 걸쳐 풀어 낸 반면, '베를린'은 명약관화하게,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개나 주어버리라는 듯이, 결국은 권력의 생리에 따라 사람을 쓰고 버리는 북(혹은 남)이라는 정치 집단의 속성을 밝히고 있으니 사실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 있어서는 '몸짓'이 중요하다.

 

일찌기 성룡을 흠모해 그의 팬클럽의 일원이었던 감독은 배우의 몸짓을 통해 드라마를 말하고자 하는데 천착해 왔다. 그러기에, 동네 주먹들의 이야기를 '동네주먹들만이 하는 몸짓'을 통해 한국적 액션 '미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받은 '짝패'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독의 지향은 '베를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표종성은 21세기에도 조국 공화국에 대한 신념으로 꽉 막힌 인물이다.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은 그저 사진으로만 남은 아이와의 가족 사진처럼, 아마도 가족의 희생을 불러왔을 것이고, 여전히 그의 아내는 그를 위해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이기에, 그가 자신의 편이 아닌 그 누군가를 향한 '몸짓'은 가차없다. 정진수 팀의 일원을 다시는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그런데, 그의 그 가차없는 '몸짓'이 갈 곳을 잃는다.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순정을 바쳤던, 조국이 자신을 버리는 순간, 표종성의 '몸짓'은 분노와 절망으로, 그리고 되돌아 볼 사이도 없이 아내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본' 시리즈에서 아름답다고 느껴졌을 만큼 기계적 합이 절묘했던 액션은 '베를린'으로 돌아오면, 화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올 만큼 거침없고 무자비함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아마도 '제이슨 본'의 비인간적인 훈련과 표종성의 순정어린 애국심에서 빚어낸 액션의 간극이 아닐까 싶게. 그래서, 더더욱 표종성으로 부터 빚어지는 액션들은 비감하고, 절체절명의 그것으로 다가온다.

그저 표종성의 극한 액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념이란 말로 둔갑한 남과 북의 정권 이기주의에 희생된 한 사람의 고통이 충분히 느껴지는 영화, 그것이 바로 '베를린'이다.

by meditator 2013. 2. 8. 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