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줄근한 아버지 양복, 머리 하나는 작은 왜소한 몸집, 자신만이 이방인듯한 표정과 눈빛, 원 인터내셔널에 이른바 '낙하산'이 되어 출근한 장그래(임시완 분)는 처음에 그랬다. 하지만 그가 차츰 달라진다. 대학물을 먹은 쟁쟁한 스펙을 가진 동료들 사이에서 고졸 검정고시라는 존재하기 힘든 경력을 가진 그가, 종합 상사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또 하나의 좌절은, 그가 이전에 프로 바둑 기사로 입문하지 못했던 좌절을 복기게 만든다. 과거 자신의 패배가, 지금의 자신을 규정하여, 그를 또 좌절에 빠뜨렸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장그래가 바뀌어 가기 시작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 실패한 것이라며 자신의 지난 날을 치부했던 그가, 바둑판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졸 사원들이 수두룩한 종합 상사에서 생존의 돌을, 승부수를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별거 아닌 딱풀 때문에 장그래가 오해를 받아 전무의 지적까지 받게 된 사건에서 오상식(이성민 분) 영업 3팀 과장은 '우리 애'라는 말로 은연 중에 장그래를 자신의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그가 경험을 앞세운 석률(변요한 분)에게 사사건건 무시당하는 듯한 장그래에게, 경험으로 보나, 잔머리로 보나 지는 게 당연한 그림이지만, 태풍의 핵을 빗대어, 무작정 그의 수에 말리지는 말라는 충고를 전한다.
자신을 받아들여 준 오상식에게 연서(?)로 감사함을 전하기 까지 한 장그래는 그의 충고에 고무된다. 그리고, 초를 다투며 승부를 가렸던, 배수진의 전쟁과도 같은 바둑판에서 승부사로 길러졌던 자신의 경험을 길어 올린다. 더는 어수룩한 낙하산이 아니다. 비록 검정고시라는 동료 인턴 사원들이 무시하는 경력의 소유자지만, 남들이 공부를 하고, 진학을 하는 동안, 오로지 승부를 위해 수를 놓았던 시간의 경험을, 되살려 낸 것이다. 흑돌과 백돌의 승부의 세계가, 종합 상사 직원 장그래에게 산 경험이 된다. 조치훈, 조훈현 등 숱한 명인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국은 홀로 바둑판에서 수를 결정해야 했던 그 시간이, 이제 대기업 낙하산이 된 장그래의 승부수가 된다.
(사진; 텐아시아)
그리고 그런 장그래의 바둑을 통한 경험은, 오히려 이제 오상식에게 배움을 준다. 종합 상사라는 또 하나의 전쟁터에서, 늘 이기는 싸움에만 익숙하여, 물러나기를, 무릎 꿇기를 주저하던 그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고, 물러나는 것이 또 하나의 승부수라는 것을 장그래는 역으로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석률과의 피티 과정에서, 그저 밀려나지 말 것만을 주문하는 오상식을 넘어, 장그래는 석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에서, 무작정 그를 누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른바 그가 내세운 경험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또 하나의 승부수가 될 수 있음을 장그래는 십여년의 바둑 수련생의 통해 길어올린다.
이렇게 <미생>은, 그 누가보기에도 말이 안되는 검정고시 출신의 낙하산 장그래가, 전쟁터 같은 종합 상사 원인터내셔널에서, 그의 숨겨진 경력을 통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과정을 그려낸다. 지난 회까지, 그저 실패의 복기였던, 그의 숨겨진 이력, 십 여년의 한국 기원 연구생의 경험은, 그저 입단 실패의 쓰라린 추억이 아니라, 이제 종합 상사 직원이 될 만한 경험치로서 손색이 없는 스펙이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학력을 통해서만이 증명되는, 우리 사회의 경력들이 얼마나 일면적인가를 <미생>은 보여준다. 비록 프로 바둑 기사로 등단하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장그래의십수년의 세월이 공부에만 매달려 학력을 쌓은 동료 인턴 사원들에 밀리지 않음을, 심지어 때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생존력있음을 드라마는 증명해 낸다. 그래서, 1회, 그저 불쌍해 보이기만 하던, 장그래가 조금씩 총명한, 때로는 오상식 과장조차, 섣부르게 폄하하지 못할 존재로 보이게 된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만화 <미생>이 바둑이라는 특정한 경험을 전제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과 달리, 바둑에 문회한이 다수의 tv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임을 배려하여, 바둑의 구체적인 수를 배제한 이야기들이, 때로는 드라마 속 대사들을 그저 '명언'이나, '경구'처럼만 전달되게 되는 점이 아쉽다. 실제 바둑판에서, 서로의 능력이 차이가 나는 흑돌과 백돌이 경합을 벌여, 때로 수가 밀리는 흑돌이 승리할 수 있는 인생의 묘미를 보여주는 바둑의 매력이 드라마 속에서는 보여지지 않으니, 미생으로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장그래를 설명하는 매력이 반감되어 지는 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검정고시 출신 장그래가, 우월한 학결을 코에 걸고 경쟁만을 내세운 종합 상사에서, 자신의 과거를 바탕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을 준다.
우리 집에 같이 사는 대학생들은 소위 일반고 출신이다. 자사고, 특목고, 그리고 그 나머지 아이들이 간다는 일반고, 요즘 세상 사람들은 마치 일반고에는 공부를 못하는 찌그레기 들만 모아놓은 듯 쉽게 규정을 한다. 학습 분위기와 수업 집중도만을 가지고, 일반고의 아이들을 평가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런 '열반'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우리 사회에서 성공의 한 지름길처럼 여겨진다. 우리집에 같이 사는 대학생들은, 남들처럼 좋은 학원에, 훌륭한 과외 선생님을 통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대학이란 곳을 통과했다. 그래서, 학원 선생님이나, 과외 선생님 때로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홀로 견뎌야 하는 대학 생활에 불안감에 여전히 고등학생같은 생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들과 달리, 대학 이란 사회를 상대적으로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다. 또한, 그들과 달리, 그들이 지내 온 일반고 경험에서, 일률적이지 않은 친구들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폭넓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쌓기도 한다. 청소년 시절 성공의 잣대처럼 여겨지는, 특성화고에서는 얻지 못할 경험이요, 자신감인 것이다. 아니 우리집 대학생들의 여유를 차치하고, 장그래를 그저 패배자로만 여기는 원인터내셔널 직원 및 인턴 사원의 협소한 시야, 그리고, 공무원 등 사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결코 세상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스펙좋은 그분들의 탁상공론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세간의 잣대로만 측정되어지는 평가 기준에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소중한 경험들이다. 십 여년의 연구생 생활에 대한 복기를 통한 장그래의 생존이, 그래서 더 가치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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