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개의 밤
-‘에스키모 인들은 너무 추운 밤에는 개를 끌어안고 잔대요.’
만약 여주인공 세진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면? 아마도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건 이웃집 깡패가 아니라 재벌 집 아들이나 실장님이었을 테고, 설사 이웃집 깡패라 하더라도 그에게는 출생의 비밀(알고 보니 재벌 집 잃어버린 자식?)이 있었을 지도, 그리고 그들은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 깡패 같은 애인’은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튀어나와 현실로 한 발을 내딛는다. 지방 대학을 나온 취업 재수생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이웃집 삼류 깡패요, 그의 도움이라는 게 기껏 의자 휘두르며 깽판 쳐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면접을 미루는 것뿐이다. 그와의 하룻밤을 보낸 세진이 말하듯 ‘개’ 같은 남자요, ‘개’ 같은 상황이다.
이 영화적 선택은 최근 개봉한 ‘하녀’, ‘시’로 이어지는 작품들과 문제의식의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즉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그로 인해 가지지 못한 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전문 용어로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하던가) 브라운관은 현실을 희석시키거나, 그 고통을 가진 자들과의 조우 혹은 화해라는 환타지로 치유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그것이 절대 화해되거나 희석될 수 없는 관계라는 걸 통렬히 밝히거나(하녀), 사회적 모순에 대한 직시의 과정을 승화시키거나(시), 현실적 연대와 위로의 틀을 제시해(내 깡패같은 애인) 환타지로서의 롤러코스터 한 판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얻어지는 힘과 진정한 위로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는 드라마와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판치는 세상에서 한국 영화가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이자 희망이기도 하다.
닫힌 문
-‘우리나라 백수들은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영화는 세진이 반 지하 방에 이사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취직에 성공한 세진이 그 소식을 전하러 돌아왔을 때 동철은 이미 그 곳에 없었다. 그리고 예측컨대 회사에서 승승장구한 세진도 그곳을 떠날 것이다. 세진과 동철이 반 지하 이웃이라는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사건은 시작되었지만, 그들에게 그 공간은 마치 황량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쉼터였을 뿐이다.
즉 동철과 세진은 이른바 자크 아탈리가 말하는 인프라 노마드(사회 조직에서 이탈하여 어쩔 수 없이 떠돌게 된 사람들)들인 것이다. 세진은 동철을 ‘개’처럼 보지만 우수한 성적이라도 지방 대학을 나온 그녀 역시 정상적 사회 구조에 끼어들지 못한 채 떠돌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그녀의 소망은 자크 아탈리 식으로 정착민(사회 구조 내에 소속된 사람들) 되기. 하지만 면접을 보면 볼수록 자신이 이 사회에 끼어들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절망만 커간다. 그런 세진과 달리, 그녀가 얼마나 노력하고 애썼는가를 알게 된 동철은 그녀가 일찍이 공부가 하기 싫었던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 생각하고 도우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열망을 절절하게 이해했다는 건 동철 역시 지금은 삼류 깡패로 살지만 어떻게든 이 사회에 정상적(?)으로 자리 잡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동철의 열망은 그의 난감한 교육 방송(교육이야말로 계층 상승의 전형적 로망 아니겠는가) 시청이나, 이제 막 조폭이 되려는 불량 청소년에 대한 과격한 선도(?)를 통해 절실히 드러난다.
동철이 칼로 쑤셔지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장면(여기까지가 현실적 엔딩이 아닐까) 이후 영화는 두 떠돌이들의 조우와 절망을 ‘로맨틱’하게 해결하는 방식으로 우회한다. 그 장면까지가 ‘하녀’나 ‘시’가 가지는 냉철한 현실주의의 선상에 서있다면(거기서 끝났다면 달달하진 않았어도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그 이후 세진의 성공이나, 동철의 변신 그리고 그들의 조우는 마치 피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던 동철이 꿈꾸는 ‘장자의 나비’처럼 황홀하다. 혹시 일찍이 어려운 사람들의 희망 노래에 천착했던 윤제균 감독이 제작자라는 흔적일까. 자크 아탈리는 2050년쯤이면 전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인프라 노마드가 될 것이라며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지만, 그래도 두 남녀의 황홀한 꿈은 절망 속에서 길어 올린 한 가닥 희망인 것 같아 로맨틱 코미디 이상의 뜨뜻함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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