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수록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이 말에 대해 '과학 기술'이 답하는 시대가 되었다. 책임을 지기 위해 '보톡스'를 맞고, '지방'을 주입하는 식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게 다양한 '시술'로 젊어보일 수는 있지만, 아니 극강의 시술이 아니고서는 '나이'도 사실 어디 안간다. 무엇보다 살아온 시간은 그대로 내 얼굴의 인상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들의 블루스> 한수(차승원 분)과 은희(이정은 분)의 이야기이다. 

한수와 은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 시절 한수는 드라마 속 장면처럼 순정만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그랬다. 훤칠한 키에 공부도 잘하고, 그런 한수에 비해, 은희는 한수에게 '키스'를 해도 그냥 귀여운 그런 존재감의 아이였다. 

'가끔 가난이 싫어서 울컥하긴 했어도 그때 난 니들하고 놀 때는 웃기도 했어. 지금처럼 퍽퍽한 모습은 아니었어.'


은희와 함께 바다로 간 한수가 혼잣말하듯 한 이야기다. 훤칠한 미소년이던 한수는 공부도 잘해 서울대학교에 갔다. 술주정뱅이인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농사를 지어 가족을 건사하던 집안, 개천의 용이 된 그를 위해 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밥벌이 전선에 나섰다. 개천의 용이 되어 '승천'한 줄 알았는데 '퍽퍽한 삶'이라니. 

 

 

다시 만난 한수와 은희 
그런 그가 사십 대 후반이 되어 고향 제주의 은행 지점장이 되어 돌아왔다. 친구들에게는 '한수가 동창회에 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할 정도로 자기들이랑은 '급이 다른', 금의환양'한 존재이지만, 사실 그는 때려치고픈 자존심을 삼키며 돌아온 것이다. '가장'이라는 무게 때문에. 

대학 시절 만난 아내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딸이 골프 선수가 되었고,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골프 신동'으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릴 줄 알았는데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도무지 성적은 올라갈 기미를 안보이고, 그 뒷바라지에 월급쟁이인 한수의 등골이 휜다. 이제 제주까지 내려온 한수, 아내와 딸은 돈이 없어 더는 골프를 못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한수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아빠가 어떻게든 돈을 구해보겠다고. 하지만 퇴직금까지 이미 빼서 쓰고, 살던 집까지 판 한수에게 돈 나올 구멍이 없다. 말이 은행 지점장이지, 여기저기 빚이 연걸리듯 한 그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반면,  은희는 동창회를 주름잡지만, 사실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했다. 친구들과 함께 목포로 간 수학 여행, 그 여행으로 은희의 학창 시절이 끝났다. 밭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엄마 대신, 사남 일녀의 장녀인 은희는 '가장'이 되었다. 

결혼을 앞둔 동생이 40평대 아파트 사진을 보내자,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하고 이 날이 되도록 생선 비늘 긁고, 생선 대가리 치면서 모은 그 돈이 니 돈같냐고 퍼붓는다. 졸지에 가장이 되어 고등학교  '생선' 장수를 한 아가씨 은희는 말 그대로 '자수성가'를 했다. 한수가 은행지점장으로 왔다고 하자 실적을 올리라 9000 만원을 대번에 옮겨줄 만큼의 VIP가 되었다. 생선 가게도 세 군데나 되고, 건물도 올렸다. 새벽 경매 시장에서 7000만원 어치를 산 게 많이 산 게 아니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가 되었다. 

 

 

나이듦의 얼굴 
한수는 그런 은희가 새삼 달리 보인다. 그저 은희가 돈이 많아서 였을까? 드라마 속 한수와 은희는 그간 주연만 맡아온 차승원과 그런 주연의 곁에서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맡아온 이정은의 존재감처럼 묘한 앙상블을 빚는다. 그런데 여전히 훤칠한 한수지만 어쩐지 그의 어깨는 자꾸만 수그러든다. 그 시절에도 한수 어깨도 닿지 않던 조그마한 은희는 여전히 한수 어깨도 안차지만 어쩐지 그 품이 제주 바다를 품어낼 듯하다. 

은희는 그 시절 첫사랑이던 한수가, 이제 은행 지점장이 되어 돌아온 모습에 말한다. '잘 나이들어 주어서 고맙다'고. 첫사랑의 '환타지'를 품고 사는 자신의 추억을 깨뜨리지 않은 채 여전히 잘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그런데 그 말을 듣는 한수의 표정은 세상 처량맞다. 그렇기도 한 게 '가장'이라는 무게에 휘청거리느라 이제 은희에게 본심인지, '사기'인지 모를 접근을 하고 있는 처지이니 말이다. 

오랜만에 <우리들의 블루스>로 돌아온 노희경 작가는 '옵니버스식'의 드라마 속 한 축인 한수와 은희 커플을 그렇게 등장시킨다. 누구도 가난했던 그 시절을 지내며 서로가 살아온 궤적이 달리한 두 사람을 사십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다시 마주서게 만든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가난해도 꽃같은 청춘 시절과 현재을 오가며, 중년 두 사람을 비춘다. '잘 나이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한 건 은희이지만, 그 말을 들은 한수가 더욱 처량맞아 보이듯, 시청자들 눈에는 외려 그 말을 한 은희가 참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저 나이들면 '돈'이 '장땡'이라고, 은희가 벌어들인 돈과, 그녀의 건물 때문일까? 무엇이 두 사람의 삶을 달리 만들었을까? 

그리 가능성있어 보이지 않는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수, 포기하겠다는 딸에게 여전히 '아빠'만 믿으라는 말을 연발하는 한수를 보며 그의 지나온 삶은 어디에 '자신을 매어두고 살았는가'를 헤아려 보게 된다. 그를 짖누르는 '가장'의 무게는 정말 아내와 딸이 짊어지게 만든 것일까? 한수에게 체념하듯 말하지만 이번 생은 그저 생선 대가지 자르고 비늘 긁으며 타인을 위해 '보시'해야 하는 삶인가 보다는 은희의 말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를 견딘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그리고 그 이전부터도 오래도록 우리의 '쉼터'였던 제주 바다를 배경으로 돌아온 노희경 작가가 흔한 주말 드라마의 중년 커플처럼 한수와 은희를 내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책임질 나이란 말은 자신의 삶이 그대로 자신이 되어가는 나이란 말이 아닐까. 자신의 삶이 자신으로 드러나는 중년의 두 사람을 통해 내 얼굴에 드러난 나의 삶을 돌아보라는 질문이 아닐지.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또 어떤 삶의 궤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울릴지 <우리들의 블루스>가 기대된다. 

by meditator 2022. 4. 14. 21:45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