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이경미, 이번엔 양미숙 대신 연홍?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무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결혼 생활의 위기를 겪었던 김주혁, 손예진 부부,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그들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아내가 결혼했다>로부터 8년이 지난 두 배우는 '사랑'의 독점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풋풋한 부부에서, 이제 소녀가 된 딸을 둔 중년의 부부로 등장한다. 앵커 출신의 소장파 정치인으로 텃밭 정치인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색이 강한 도시에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젊은 후보 종찬(김주혁 분)과, 그 지역 사람들이 배척하는 지역 출신의 아내로 물심양면으로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없는 아내 연홍(손예진 분)이 바로 돌아온 두 사람의 캐릭터다.
불과 15일을 앞둔 국회의원 선거일, 종찬의 참모들로 분주한 종찬의 집, 아내 연홍은 아침부터 그들을 위한 김밥을 싸느라 딸 연홍과 눈을 맞출 사이도 없다. 그런 엄마의 분주함을 이해한다는 듯 딸은 친구와 함께 알아서 과제를 하고 오겠다 하고. 엄마는 그래도 못미더운 듯 딸 친구의 전화 번호를 남기라 하는데. 하지만 바로 그 딸 입에 김밤 하나를 넣어주었던 엄마의 바쁜 손길이 딸과 엄마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그리고 이어진 딸의 실종.
그간 남편의 당선을 위해, 불리한 자신의 출신지까지 감수하며 불철주야 선거 운동에 매달렸던 아내는 딸의 실종으로 가속도를 내던 선거의 리듬에서 튕겨져 나온다. 제 아무리 남편의 선거가 중요하다 해도, 그게 얼마 안남았다 해도 부모에겐 피붙이보다 더한 존재가 있으랴. 어라, 그런데 이상하다. 들어오지 않는 딸로 인해 충격을 받은 연홍과 달리, 아버지인 남편의 태도가 이상하다. 그도 아버지아닌가?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자리보다, 정치인의 자리가 우선인 듯하다.
영화는 정치인 종찬의 선거 운동과 딸의 실종까지 이어진 상황을 분주함과,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이 가진 지역색의 모순, 그리고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타 지역 출신의 정치인 아내 연홍의 모습을 통해 개연성있게 그려낸다. 하지만 '개연성'은 거기까지이다. 아니 처음 딸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엄마와, 거물 여정치인과 레지던스 호텔에서 자식을 잃더라도를 운운하는 냉혹한 정치인의 면모를 보인 종찬의 모습을 통해 이 부부 사이의 궤멸은 충분히 예상된다.
스릴러의 개연성 대신 연홍이라는 캐릭터의 폭주로
하지만 영화가 스릴러로서의 개연성을 쌓는 건 거기까지이다. 딸의 실종 초반 딸의 실종을 둘러싼 선거 운동의 혼란, 정치인 종찬의 위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거에 임하겠다는 정치인 종찬, 그런 종찬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홀로 딸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연홍은 잠시 뒤, 그녀의 산발인 머리와 함께, 그녀의 혼란스런 상태를 드러내며 영화도 함께 혼란스러워져 간다. 이경미 감독의 전작 <미스 홍당무>가 기괴한, 혹은 기발한 캐릭터인 양미숙을 통해 결국은 미스터리같은 해프닝 그녀의 짝사랑 사수 작전을 설명해 냈듯이, 이경미 감독의 차기작 <비밀은 없다> 역시 정치인의 현모양처 연홍의 이면과 딸을 잃은 그녀의 폭주를 통해,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을 설명하고자 한다.
영화는 정치인 종찬이 처한 지역의 위기와 그를 둘러싼 정치판, 혹은 강고한 지역색의 압박을 드러내는가 싶다가, 혹은 딸의 친구라기엔 수상쩍은 최미옥(김소희 분)과 그를 통해 살짝살짝 드러난 딸의 이면을 보여주는가 싶다가도, 곧 연홍의 맹목적 모정의 폭주에 집중한다. 절정에서 무당의 서슬퍼런 칼춤 아래 두 눈에 촛점을 잃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투리로 속내를 털어놓는 그 절정의 한 장면으로 설명되듯, 남편 정치인을 따라 타 지역에서 고립된 그래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엄마, 정치인의 아내로 살기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덮은 채 현모양처로 포장해 왔던 알고보면 딸 못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연홍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딸을 잃은 모정의 질주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손예진이란 배우를 통해 드러난 또 하나의 신선한 캐릭터 연홍은, 스릴러 장르로서의 <비밀은 없다>와 충돌한다. 초반 정치인 딸의 실종이란 스릴러 장르는 중반 이중적 성격의 연홍이란 모정의 질주를 통해, 딸을 잃은 엄마의 절망을 호소하는데는 성공하였을지 몰라도, 대신 스릴러로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실종'이라는 문제에 집중하는데 방해를 한다. 결국은 종반부에 드러난 사건을 놓고 보면, 차라리 연홍의 정신없는 폭주 대신, 차곡차곡 침착하게 스릴로로서의 개연성을 쌓았다면 꽤나 설득력있는 장르물이 되었을 <비밀은 없다>는 감독 이경미의 스타일에 대한 천착으로 개연성 대신 기괴한 분위기를 남긴다.
정작 영화가 다시 스릴러로서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은 영화 후반부 미옥의 속내가 드러나면서 부터이다. 미옥의 속내가 드러나고 '엄마'의 복수가 진행되고, 황량한 벌판에서 벌어진 두 부부의 혈투로 마무리된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보는 관객은, 자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엄마인 연홍의 혼돈과 불안, 그리고 배신감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종내 정체가 모호했던 미옥의 속내가 갑자기 드러난 그 이유와, 결국은 '비속 살해'에 봉착하게된 정치인 종찬 캐릭터는 너무 단편적으로 다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영화 초반 그토록 분위기를 잡았던 '지방색'이라는 대한민국 현실의 정치적 아이러니는 그저 정치인 종찬의 당선을 위한 소모품으로 소비된다. 또한 아쉬운 것은 두 소녀의 입맞춤까지 나아가며 소녀들의 외로운 우정에 굳이 어떤 색채를 입혔어야 할까 하는 설정의 아쉬움도 남는다.
이경미 감독에겐 양미숙을 뛰어넘을 또 하나의 여성 캐릭터의 탄생이 숙제였을까? <비밀은 없다>를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작품일까 싶게, 스릴러로서의 스토리와, 그 속에서 튀어나와 독자적 분투를 하는 연홍이란 모성은 장르로서 차곡차곡 쌓아서 개연성을 통해 추리해 나갈 관객들에게, 캐릭터의 강렬한 존재로 대신 설득하고자 한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는 안타깝게도 결국은 해프닝이 되고만 사랑이야기 <미스 홍당무>처럼 캐릭터로 퉁 치기엔 묵직한 스릴러였다는데 착오가 있다. '스타일'로 치부하기엔 불친절한 스릴러다. 7년의 장고가 안타깝다. 초반에 벌인 판과, 후반부 극적 해결 등 영화적으로 매력적 요소는 그럼에도 분명하다. 조금 더 보는 사람들과 호흡하는 영화의 여지가 충분했던 <비밀은 없다>가 그래서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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