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뜻의 '힐링'이란 단어가 전 사회적으로 유행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는'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인 '웰빙'이 열풍처럼 사회를 휩쓸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치유와, 편한한 삶의 방식은 치유되지 않는 관계와 편안함을 주지 못하는 사회의 반증을 의미했다. 그래서, 힐링을 내걸었던 예능 프로그램이 애초의 자신의 정체성을 지운 채 mc를 바꾸는 특단의 조처를 하듯, 힐링도, 웰빙도, 이젠 입 밖에 내밀기가 '촌스러운' 철 지난 단어들이 되어간다.
어디 웰빙과 힐링 뿐인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던 자기 계발서들은 여전히 그 아성을 공고히 하지만, 그 내용과 작가들은 어느새 다른 이의 다른 말들로 대신한다.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그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젠 '힐링'도, '웰빙'도 무색해지고, 자기 계발조차 공허해진 채, 그 자리를 내 꺼 아닌 그 누군가를 향한 화풀이 성 '혐오'. '집요한 막말'로 채워가고 있는 것이 저물녁의 2015년의 풍경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정작 손가락질 해야 할 사람은 외면한 채 만만한 연예인이 되었건, 사회적 해프닝의 당사자가 되었건, 심지어 지난 사건의 피해 당사자들이 되었건 거침없이 욕을 퍼붇고 화풀이를 해대는 송년의 시기에,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두 작품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예외없이 이번에도 '응팔'의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응답하라 1988>이요, 또 다른 하나는 잔잔히 그 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가는 고레이데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이다.
상실의 아픔을 다른 이의 상실을 껴안는 것으로;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 잔잔한 이야기의 시작은 세 자매 사치, 요시노, 치카의 아버지 부음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막내 치카는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의 곁을 떠난 사람이다.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 '별 일이 아니'라고, 혹은 밤 근무때문에 장례식에 가지 않을 그런 사건인 것이다. 그래도 세 자매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찾았고, 거기서 그녀들의 배다른 동생인 스즈를 만난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큰 언니인 사치는 뜬금없이 그녀들을 배웅나온 스즈에게 자신들과 함께 살겠냐고 하고, 스즈는 용기를 내어 대답한다.
그렇게 네 자매는 외할머니의 오래된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매실이 열리고, 지고 하는 계절이 바뀌어 가며,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며 조심스러웠던 네 자매는 조금씩 서로의 벽을 허물고 진짜 가족이 되어간다.
처음 배웅 나온 스즈에게 함께 살지 않겠냐고 하는 큰 언니 사치의 행동은 뜬금없어 보였다. 하지만, 잔잔히 흐르는 영화를 보며 결국은 사치를 이해하게 된다. 십대의 시절 부모를 떠나보냈던 그녀는 어린 스즈에게서 그 시절 자신에게서 느꼈던 막막한 외로움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두 시간여의 시간 동안 결코 흐트러짐없이 낡은 집의 가장으로 동생들을 품어 안는 사치를 보며 그녀의 지난 시간에 배어있는 버거움의 역사를 느끼게 된다. 사치만이 아니다. 언니의 말 한 마디에 기억도 없는 아버지가 남긴 동생, 주변 사람들이 비록 동생이라도 함부로 들이는게 아니라고 극구 말리는 아이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나머지 자매들의 태도 그 속에 숨은, 말끝마다 아웅다웅해도 지난 세월 아이들 세 명이서 서로 부등켜 안고 커왔던 시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관객들처럼, 조심스레 스즈를 맞이했던 세 자매도, 그 아이의 아픔을 지켜보며 자신들을 복기한다.
그렇게 그 네 자매들은 아버지가 바람을 펴서 자신들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그런 아버지를 핑계를 대며 자신들을 떠났지만,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리게 만든 그 여자가 낳은 아이를 자신들의 자매로 품어 안는다.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라면 머리 끄댕이 몇번은 잡고, 재산 싸움을 벌이며 피투성이가 될 관계들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조심스레 가족으로 융합한다. 그런 언니들의 배려 속에서 사치만큼이나 일찍이 철이 든 아이 스즈도 쉼없이 떠나야만 했던 지난 시간의 강박을 드디어 내려 놓는다. 그저 한바탕 울고 불고 엉크러지고 난 후, 화끈하게 '가족'이 되는 대신, 서로의 상처를 섣불리 끄집어 내지 않고 조심스레 지켜보며, 그쪽에서 마음을 열기를 기대려 주는 방식은 생소한데, 그 어떤 '힐링'보다도 위로가 된다.
네 자매를 버티는 것은 결국 언니 사치다. 그녀가 집을 떠난 어머니에게 보란 듯이 동생 스즈를 데려왔건, 아버지를 사랑했던 그 여인처럼 자기 자신이 유부남을 사랑하는 처지때문이었건, 사치는 외할머니의 낡은 집을 지킨다. 이제는 떠날 수 있다며 함께 외국으로 떠날 것을 종용하는 오랜 연인 대신, 낡은 집을 지키며, 호스피스 병동의 간호사 일을 택하는 사치의 방식은, 발전과 개발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삶의 방식에 길들여진 2015년의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질문이다. 내 삶의 결핍을 채울 요소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언니 사치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갈아치는 애인의 사랑 대신 보람이 될 일의 의미를 깨달아 가는 요시노도, 특이한 취향을 넘어 지켜볼 줄 아는 치카의 조용한 사랑도 이 다이어리의 빼놓을 수 없는 페이지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이어 이번에도, 상실로 시작되어 그 상실을 치유하는 방식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친다. 결국, 문제는 상실이 아니라, 상실을 대하는 태도와,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문제라고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그건 여전히 오랜 저성장에 피폐해진, 거기에 원전 피해까지 얹혀진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에 대한 대안이 될 수도 있지만, 역시나 어디까지 갈 지 모르는 저성장 사회에 떠밀려 가는 국가 만족도 9%의 대한민국에도 유의미한 질문이다. 삶은 언제나 우리를 시련에 빠뜨리지만, 그 속에서 '인간'은 다른 '선택'을 하며 '행복'해 질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도 깊은 울림이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소승불교처럼 쉬이 사회적 해결을 볼 수 없는 사회의 불가항력의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가난을 베품으로; <응답하라 1988>의 라미란
부모로 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아버지를 잃은 동생의 아픔을 보다듬으로써 치유해가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처럼, 다른 이들을 껴안으며 넉넉해지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응답하라 1988>의 정환, 정봉이 엄마로 나오는 라미란 여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정환이네 집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문간방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며 아픈 정봉이를 놔두고 엄마가 도배 일을 하며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집안이다. 그런 정환이네 집이 정봉이의 올림픽 복권으로 하루 아침에, 라미란 여사의 말 그 대로 '벼락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흔히, 아니 한국 현대사에서 등장했던 다수의 벼락 부자들의 행태와 달리, 라미란 여사의 품은 넉넉하다. 사실 '확대 가족', 거의 '골목 공동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쌍문동 골목의 인심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라미란 여사네 곳간과, 그 곳간의 인심에서 기인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수학 여행을 앞두고 딸인 덕선의 용돈마저 주기 어려워 쩔쩔 매는 덕선 모 앞에 돈을 빌려주는 대신 터억하니 용돈을 하라고 봉투를 내미는 라미란 여사의 넉넉함은 바로, 쌍문동 골목의 인심을 상징한다. 그런 식이다. 아버지의 빛 보증으로 쪼들리는 덕선네의 안간힘도, 남편없이 아들과 딸을 키우는 선우네의 쪼들림도, 훈훈한 인심으로 끝날 수 있는 에피소드의 내막을 들여다 보면 그 구비구비에서 '라미란 여사'네가 있다.
때론 화장품 아줌마를 불러,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만, 결코 혼자만이 아니라, 덕선 엄마랑 선우 엄마와 함께 그걸 누릴 줄 아는, 정환이네 집에서 매회 등장하는 그 무지막지한 음식의 향연은 곧, 자신의 부에 인색한 대신, 가난을 이해하고 함께 풀어가는 라미란 여사의 과도한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때론 여전히 가난한 시절의 습관을 벗지 못한 남편에게 눈치를 주기도 하고, 서슴치않고 '벼락 부자'라 자신을 지칭하면서도, 그 '벼락부자'가 연상케 하는 '인색'함 대신, '곳간'에서 인심을 내는 라미란 여사의 방식은,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부의 방식이다.
상실을 또 다른 상실을 이해하고 품어내면서 스스로 치유해가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삶의 방식이나, 가난했던 지난 날을 이웃에 대한 무한 퍼줌으로 상쇄해가는 라미란 여사의 부의 방식은 상실된, 혹은 결핍된 삶을 채우는 방식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된다. 물론,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 한 개인의 고통은 종식되지 않겠지만, 사회적 변화에 앞서, 혹은 사회적 변화 이전에, 삶에 대한 근본적 대처 방식에 대해 두 작품은 한 해의 마지막 우리에게 묵직한 과제를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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