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에릭 분)의 작업실, 햇빛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 서있는 여인, 그 장면을 그냥 넘기려는 동생 훈(허정민 분)을 도경이 저지한다. '소리'를 넣으라고. 도대체 햇빛 쏟아지는 소리도 있느냐고 반발하는 동생, 하지만 동생 훈은 여친 안나(허영지 분)가 환호하는 그 장면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햇빛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도 있음을.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 창문이 열리고 '소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 아래서 즐거이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 활기차게 움직이는 차와 사람들의 소리. 그저 빛 반사로 윤곽조차 분명하지 않았던 한 장면이, '소리'가 더해짐으로써 살아움직이기 시작한다. '도경'이 더한 '소리'처럼 그런 게 아닐까, 사랑도. 사랑을 잃고도 밥은 잘 쳐먹는다며 구박받다 쫓겨난 오해영(서현진 분)에게 어거지가 아닌 새로운 삶의 '빛의 소리'가 등장한다. '도경'이다.
죄책감으로 시작된 사랑
tv가 그려내는 '사랑'은 가지가지이다. <태양의 후예>처럼 첫 눈에 내 사람이다 싶게 '반'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서로 싸가지다 싶었는데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결혼 계약> 같은 사랑도 있다. 어릴 적부터 오누이처럼 자랐는데 죽고 못사는 사랑이 된 <풍선껌>의 사랑도 흔히 등장한다. 그러면 이런 건 어떨까? 죄책감, 이런 것도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제목에서부터 <또 오해영>이듯이, 드라마는 동명이인 오해영에 얽힌 웃지못할 해프닝이 주요 모티브가 된다. 고등학교 시절 한 반에 두 명이었던 오해영, 그저 두 명의 동명이인이 있다는 사실쯤이야 흔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중 한 명은 자타가 인정하는 '이쁜 아이'(전혜빈 분)라는데 문제가 시작된다. 아니 정작 문제는 다른 또 한 명의 오해영(서현진 분)이 그저 평범한 아이라는 게 더 문제였을까? 이쁘지 않은 오해영이 굳이 이쁜 오해영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지만 사사건건 비교가 되는 건 물론, 한 사람이 모두의 주목을 받는 순간, 또 다른 한 사람이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 무가 되는 얄팍한 인간사의 '인지상정'을 일찌기 경험한 또 한 명의 오해영은 다른 오해영이 어느 날 바람같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안심이 될 정도이다.
하지만 정작 행운은 그리 쉽게 또 오해영(서현진 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아, 오해영과 또 오해영의 이름과 관련된 오해는 또 오해영의 결혼까지 파탄내 버렸으니, 이 정도면 오해영의 동명이인은 '해프닝'이라기엔 그 심연이 너무 깊다. 그러나 아직 또 오해영은 그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녀 앞에 나타나, 심지어 그녀와 뚫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거 아닌 동거를 하게 된 도경은 그 모든 사실을 안다. 또 오해영은 술김에 그녀가 쏟아놓은 이야기 때문에 도경이 자신의 파혼 사실을 안다고 했지만, 사실은 도경인 바로 그녀를 파혼으로 몰아넣은 주범이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오해영때문에.
그래서 도경은 또 오해영과 한 집에 살 수 없다 우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기기 시작한 두 사람의 해프닝이 여차저차해서 '그냥 살아요'가 되는 순간, 두 사람의 온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도경은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은 또 오해영에 대한 죄책감이 연민으로 변해가고, 또 오해영 역시 자신의 비밀을 아는 도경에 대한 계면쩍음이,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라는 '연민'으로 변해가며, 두 사람은 다른 층위의 감정을 교환하기 시작한다.
박해영이 그려내는 또 한 편의 공감
<결혼 계약>이 사실은 뻔하디 뻔한 재벌 집 자제와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미혼모의 이야기를 다른 질감으로 그려내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듯이, <또 오해영>의 스토리 역시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이야기들이다. 동명이인, 나보다 잘나고 이쁜 그 아이로 인한 자존감의 저하, 동거 해프닝, 심지어 초능력 등 버무려 놓았을 뿐 따지고 보면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작가가 2005년 232부작으로 아쉬움을 남긴 채 종영한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작가 박해영이 되면 달라진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초반 최미자가 연상되는 또 오해영의 초반 슬픔을 주사와 각종 해프닝으로 이겨내는 과한 설정들은, 그 이후 풀어내는 내공있는 이야기를 통해, 다른 오해영으로 인해 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왔다던 그녀가 밉지 않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지점은 도경이 죄책감으로 그녀를 떨구려 애쓰다 그녀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지점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도경 역시 마찬가지다. 잘 생긴 에릭이라는 선입관을 제쳐두고, 도경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는 시점 역시, 또 오해영이 그를 눈에 담기 시작한 지점과 일치한다.
또 오해영의 파혼을 둘러싼 번다하고도 소소한 해프닝들을 견뎌내고 오도카니 오해영이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마주하기 시작할 때,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도 두 주인공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극중, 남자 주인공 도경의 직업은 음향 감독이다. 눈이 밝은 시청자라면 털북숭이 마이크를 든 도경에게서,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 분)가 떠올려질 것이다. 상우가 그랬던 것처럼 도경도 하루 아침에 여자에게 차였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상우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며 망연자실한 것과 달리, 도경은 나름 '복수'를 한다. 비록 헛발질이었지만.
그렇게 사랑의 헛발질을 한 도경이지만, 음향 감독으로서의 그는 햇빛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 하나 놓치지 않을 만큼 철저하다. <봄날은 간다>에서 소리를 모으는 상우를 따라,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았듯이, 역시나 <또 오해영>에서 시청자들은 소리를 모으는 도경을 따라,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때 들어오는 것은, 도경이 모으는 소리가 아니라, 두 주인공의 마음 속 소리이다. 섬세하게 마음의 결을 사람 냄새 풍기며 그려내는 <또 오해영>에서 이제 시청자들은, 평범치 않은 사연 이면에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며 한번쯤은 걸려 넘어졌을 법한 사연들의 속내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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