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스 김은희
김은희 작가는 마치 타나토스같다. 김 작가의 드라마에는 언제나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추리물이나 미스터리물이라는 드라마 장르에서 기인하는 누가 죽고 사는데 그치지 않고, 드라마의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주인공인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해결하는 데서 오는 '죽음의 그림자'이다.
2011년작 <싸인>에서 천재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 분)은 공소시효가 지나 유유자적 법망을 빠져 나가려는 강서현(황선희 분)를 잡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2012년작 <유령>에서는 심지어 극초반 주인공인 사이버 수사팀장 김우현(소지섭 분)이 죽어 버렸다. 그리고 2014년 <쓰리데이즈>에서 비록 목숨을 건졌지만, 무려 대통령인 이동휘(손현주 분)가 김도진(최원영 분)의 도발을 막기 위해 자신을 던졌다. 결국 누구도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마지막 회에 이르기까지 <시그널>처럼 과연 김도진을 막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 사람이 이동휘인가, 한태경(박유천 분)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기는 <시그널> 못지 않았다. 비록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지만, 대통령이었던 이동휘는 대통령직은 물론, 스스로 법의 심판대에 나설 처지로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에는 왜 유독 '죽음'의 그림자가 깊을까? 작가가 유독 '죽음'을 두고 드라마적 트릭을 쓰는 것을 즐겨해서? 아니 그것보다는, 김은희 작가 드라마 주인공들이 맞부닥치는 강고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싸인>의 윤지훈이 상대한 것은 그저 서윤형을 죽인 사이코패스 강서현이 아니다.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 강준혁 의원의 딸 강서현이다. 이미 처음 서윤형 살해 사건이 벌어졌을 때 권력의 비호를 받아 유유히 법망을 도피했던 그녀, 그리고 이제 다시 윤지훈이 하는 수사망조차 '시간'이라는 비호를 받아 도피하려는 그녀를, 윤지훈은 어이없게도 자신을 던져 방어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강서현을 잡아넣는 것이 아니라 범법자를 비호하는 권력에 대한 투쟁의 자기극한적 몸부림이다.
<유령>도 마찬가지다. 사이버 수사팀장 김우현은 제대로 수사도 해보기 전에 정재계의 담합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그의 빈 자리를 그를 흠모했던 친구 해커 박기영(최다니엘 분)이 대신한다. <쓰리데이즈>도 다르지 않다. 대통령조차 쥐락펴락하는 정치군사경제 카르텔, 그리고 그 대표 김도진을 상대로 대통령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임에보 위태로운 싸움을 이어간다. 대통령이 싸움의 자리에 선 순간, 그를 경호하던 몇몇의 사람을 제외하고, 권력의 심층부에 있던 거의 모든 이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이미 금권을 바탕으로 거의 모든 제도와 법망, 심지어 군부조차 손아귀에 쥔 세력에 대해 싸움은 그가 법의학자건, 사이버 수사팀장이건, 대통령이건, 이제 한낯 형사건 결국 자신을 던지는 '무리수'가 될 수 밖에 없는 바위에 계란 던지기인 셈이다. 그러기에, 그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성경의 기적이 행하지 않는 현실의 싸움에서 무기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의 '목숨걸고 싸우기'밖에 없다. 그러기에 늘 김은희 작가의 주인공들은 죽거나,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된다.
21세기 부조리한 대한민국이라는 벽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김은희 작가 주인공들의 싸움을 보고 있노라니, 문든 얼마전 본 영화 <동주>가 떠오른다. 영화 <동주>의 주인공 송몽규와 윤동주는 강고한 식민지 체제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이다. 때론 독립군이 되어, 때론 임시정부의 일원이 되어, 그리고 일본 유학생을 규합하려 '실천'했던 송몽규나,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으나 시절이 하수상하여 그로 하여금 시을 삼키게 만들었던 윤동주나 결국 식민지 일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동주>에서 <시그널>까지 젊은이를 죽이는 역사
<동주>를 보고 외람되게도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에 입학했다는 부푼 품도 무색하게 강의실 밖에 상주하는 경찰들, 그리고 건물 옥상에 올라 목청껏 외치기도 전에 잡혀가는 선배들로 인해 시대를 먼저 느껴야 했던 그 시절,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그 시절 대학을 다녔던 우리에겐 대학의 낭만 대신, '억압'이라는 시대가 먼저 짖눌렀을 것이다. 대번에 신춘 문예에 당선하고야 마는 글 재주를 지녔던 문사도, 고이고이 자신 속에 시를 간직했던 청년도,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전에 시대라는 무게에 짖눌려 애초에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하고 유명을 달리했던 동주의 주인공들과 비록 그 삶과 죽음의 경계는 달리하지만, 여전히 현대사를 살아냈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시대가 지닌 무게는 강고했다.
그리고, 그 시대가 '민주화'가 되었다고 했다지만,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김은희 작가의 주인공들은 증명한다. 동사무소 여직원을 말 한 번 못건네보고 짝사랑하던 순경 이재한은, 차수현의 마음조차 외면하며 전출해야 하는 외곬수 형사가 되었다. 그를 그리 만든 결정적 조건은 그의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었지만, 그를 그렇게 되도록 만든 배경은 억울한 죽음을 양산하는 체제이다. 박해영도 다르지 않다. 과외한번 받지 않아도 형의 가르침으로 문제집의 문제를 만점 받던 영민한 소년은 형의 죽음과 가족의 붕괴로 외톨이가 되어 형의 복수를 향한 일념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15년을 기다린 차수현은 어떻고. 아니, 그들 이전에, 그들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시그널>의 배경이 된 '밀양', '성수대교', '신정동'이란 지명으로 남은 사건의 피해자들은 또 어떻고. 애꿏은 젊은이들이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가 되어 현대사의 그늘 속에서 죽어간다.
<동주>에서 <시그널>은 몇 십년의 간극을 지닌 우리의 근 현대사를 다룬다. 물론 영화와 드라마 안에서 주인공들에게 죽음을 가하는 대상은 달라졌다. 일제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권력의 카르텔로. 하지만, 그것이 1940년대이건, 1990년대이건, 그리고 2010년대이건, 여전히, 우리의 땅에서 '포기하지 않는 젊은이들'은 젊음을 볼로모 잡힌 채,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죽임의 방식이 노골적이냐, 교활해졌냐의 차이만 달라졌을 뿐이지. 아마도 그 공포를 일찌기 경험한 우리의 어른들은 일찌기, 청년들에게 '나서지 말라'라는 교훈을 주입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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