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노익장이 되었지만 굳이 그의 이름 앞에 작품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는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가 한 작품에서 만났다. <아이리시맨>은 어쩌면 이 두 사람의 배우 만으로도 '영화사'적 가치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 하물며 그 두 사람을 한 화면에 잡은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라면 더더욱. 

영화를 보고 나오면 문득 여러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알 파치노의 이름을 알린 <대부>에서 부터, 로버트 드 니로의 역작 <원스어폰어 타임 인 어메리카>, 그리고 <갱스 오브 뉴욕> 등등, 프랜시스 코폴라, 세르지오 레오네, 마틴 스콜세지 등 만든 사람들은 서로 다르지만 이들 영화가 그려내는 건 '아메리카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이다. 역사 책에서 말해주지 않은 '아메리카'를 만든 사람들, 이제 2019년 넷플릭스판으로 만들어진 <아이리시 맨>은 그 완결판과도 같다. '지미 호파 실종 사건'으로 귀결되는 20세기 미국의 완성, 역시 마틴 스콜세지답게 영화는 웅장한 영웅적 서사나 장렬한 성장담 대신, 비감한 회고담에 도달한다. 당신 손에 묻힌 그 피는 무엇을 위해서였냐고. 

 

 

페인트공이 된 남자, 프랭크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실존의 그 누구를 떠올리게 하지만 딱히 그 누구랄 것도 없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 남성, 영화는 그가 뉴욕 마피아의 거물 러셀(조 페시 분)을 만나게 된 이야기로 부터 시작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그가 어떻게 페인트공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페인트공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남자, 하지만 영화는 자신에게 벽에 피칠겁을 하는 그 일이 맡겨졌을 때 소회에 대해 그저 그 일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이상의 감상을 덧붙이지 않는다. 전쟁 당시 상사의 다그치는 명령에 맞춰 포로들을 데리고 숲속에 가듯이, 그리고 미국으로 와서 정육 트럭을 몰다 재판에 까지 회부되는 그런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웠듯이, 그냥 그렇게 그는 페인트공이 되었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정을 꾸려 살아가기 위해. 아이가 태어나 돈이 더 필요하자 세탁산업의 이권 쟁투의 배후에서 다이나마이트 사용까지 마다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잡화점에서 '물의'를 빚은 딸을 이끌고 가서 '사과' 대신 잡화점 주인의 손모가지를 짖이겨 버리고 돌아온 아버지 프랭크의 사는 방식이었다. 그런 그가 살아온 방식은 마치 막부 시대 일본의 하급 사무라이처럼 철저히 자신의 '주군'에 충직한 '페인트공'이 되는 것이다. 하급 사무라이가 주군에 뜻에 따라 자신의 배를 가르거나 전쟁터에서 생을 마치기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하기 십상지만, 그와 함께 등장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어딘가에서 총을 맞아 죽은 것과 달리 운이 좋게도 그는 그를 '페인트공' 이상으로 '친구'로 대해줬던 그의 두번 째 '주군'이었던 '지미'의 '실종'을 책임지는 것으로 달라졌을 뿐이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노조는 내 것'이라는 지미를 설득했지만 자신이 처음 섬긴 주군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

 

 

실종된 노조 지도자, 지미 호퍼
그렇게 그에게 '실종' 당한 프랭크의 벗이자 또 다른 '주군', 지미 호파가 있다. 발전에 가속이 붙은 자본주의 미 대륙을 잇는 움직이는 가교였던 '트럭', 그 트럭 노동조합 운동에 일찌기 스물 살 무렵부터 헌신했던 지미 호파, 1957년 전미트럭 운송 노조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래 14년간 그만의 카리스마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그런 지미 호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근간' 중 하나는 자기 자신과 노조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고, 그 '수단'과 '방법' 중 하나에 프랭크와 그의 뒷배들이 있었다.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소년이 어느덧 그가 재임하는 동안 10만 명에서 230만명으로 불어난 노조원들의 조합을 '내 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모습, 그리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프랭크'를 그림자처럼 '사용'하는 모습을 통해 20세기 자본주의 사회로 성장해온 '미국'의 그림자를 영화는 드러낸다. 이권 세력으로 성장한 노동조합, 그 정점에서 자신의 왕국처럼 노조를 생각하는 지미 호파, 감옥에 갔다온 그가 무리하게 자신의 권좌를 탐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철지난 '권력욕'을 '정리'시켜준 건 그와 '협잡'했던 프랭크 일당, 그의 최후는 미 최대의 장기 미제 사건이 되었지만, '내 노조'를 남발하던 그는 살아남아 역사의 발목을 잡지 않을 수 있었을까?

퇴락한 노조 위원장과, 기꺼이 그를 '정리'시키는 마피아 세력, 그리고 그들의 수족이 되어 자신을 벗이라 여기는 지미를 '실종'시킨 프랭크, 20세기 미국을 만들어간 사람들이다. 열렬한 조합원의 지지로 얻은 막대한 조합의 재산이 '카지노'와 같은 이권 사업이 되고, 그 이권 사업을 지키기 위해 마피아 세력이 노조의 지부장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시절, 그리고 그 '이권'을 위한 이합집산의 와중에 굳이 지미 호퍼가 아니더라도 시절을 주름잡겠다 하면 등장한 인물 중의 상당수가 뒷골목에서, 거리에서, 혹은 외딴 집에서 프랭크와 같은 페인트공들의 '작업' 대상으로 생을 마친다. 호구지책으로 트럭이나 몰던 아일랜드 이민자 프랭크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미국의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결국에 살아남은 프랭크와 러셀의 삶이 뭐 그리 다를까? <아이리시 맨>은 반문한다. 가장 든든했던 벗이었던 지미 마저 기꺼이 손털어 버린 러셀과 프랭크의 남은 생이라고 다를까. 아버지가 잡화점 주인의 손을 짖이겨 버린 이래 아버지와 거리를 두었던 프랭크의 딸 페기는 지미의 실종 이후로 아버지를 떠났다. 가족을 위해서라며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혔지만 결국 프랭크에게 남은 건 병든 몸과 홀로 떠들어야 하는 요양 병동뿐이다. 다른 이라고 다를까. 총맞아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그렇게 '미국'을 '전횡'했던 이들의 최후이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 보니,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고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니 무엇이 남느냐고 <아이리쉬맨>은 묻는다. 하지만 그저 '일장춘몽'이라 퉁칠 수 있을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질문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6부작 다큐,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5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하급 군인으로 일했던 사람을 등장시킨다. 지극히 평범한 남성, 그는 자신은 그 '참극'의 실체를 몰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큐는 냉엄하다. 과연 몰랐을까? 그가 보초를 섰던 그 초소에서 보여지던 엄연한 유대인 학살의 징후들을 과연 몰랐을까?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이 유효할까? 

흔히 역사의 참극, 혹은 역행의 현장에서 본의 아니게 함께 했던 평범한 이들은 신의 피치못한 상황을 핑계로 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그들 역시 그 역사의 책임에서 비껴설 수 없다 비판의 날을 세운다.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21세기의 미국을 만든 건 바로 <아이리쉬 맨> 속 20세기의 인물들이다. 노조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던 노조 지도자도, 그런 지도자의 실체에 무지한 채 단지 그의 세 치 혀에서 비롯된 카리스마에 열광했던 노조원들도, 자신의 가족을 위해 혹은 자신의 보스를 위해 꺼리낌없이 벽에 피칠겁을 한 페인트공도, 그리고 조직의 이권을 위해 노조 지도자도 실종시키듯 수많은 이들을 '정리'시킨 이면의 실세들과 그들의 조력자가 된 법률가, 행정가들이 만들어 낸 오늘이 바로 우리가 보는 미국이다. <아이리쉬맨>이 그린 20세기 미국사다. 

by meditator 2019. 11. 29. 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