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해(苦海)다. 일찌기 붓다의 설법이다. 이제 9회차를 경과하고 있는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네 인생사 고해의 바다에 밀려오는 제 각각의 파고를 경험하게 된다. 9회 차에 들어 전면에 등장한 동석(이병헌 분)과 선아(신민아 분)를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일까? 

 

 

십대 청소년 시절 서울에서 전학온 선아와 만난 이래, 이제 마흔 줄이 될 때까지 동석은 선아와 만날 때마다 인생이 꼬였다. 그렇게 얼핏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이야기같았다. 트럭 하나를 몰고 제주 인근 섬을 돌며 장사를 하는 동석, 그런 동석이 사는 제주에 그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 선아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보란듯이 그를 농락한 채(?) 떠나고, 다시 그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잘 살 것 같던 선아가 피죽 한 그릇도 못얻어먹은 얼굴로 돌아왔다. 본인 말로는 발을 헛디뎌서라는데 해녀들이 구하지 않았으면 물고기 밥이 될 뻔했다. 그런 선아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동석의 신경을 거스른다. 죽지 않았으면 됐다고 하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선아를 찾아 온제주를 헤맨다. 

동석과 선아의 상흔 
해묵은 연인처럼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 선아에게 따지듯 그때 왜 자신을 버렸냐던 동석, 그로부터 그저 오랜 연인만이 아닌 의지가지없던 두 '어른 아이'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아버지가 죽고, 물질을 하던 누나가 죽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친구네 집으로 들어갔다. 말이 두번 째 부인이지, 병석에 누운 본처의 병수발을 하는 것이었고, 두 의붓 아들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용납할 수 없었던 동석은 매일매일 두 의붓아들에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보란듯이 그 상처를 들춘다. 

그렇게 얼굴이고, 몸이고 시퍼렇게, 검붉게 멀쩡한 곳이 없는 시절을 살아가던 동석에게 기대어 온 아이가 선아였다. 서울에게 전학왔다는 중학생 아이가 집에는 안가고 매일 동석이 가는 피씨방에서 게임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을 하다 망한 선아의 아버지가 의탁한 큰아버지네, 하지만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주먹다짐을 하며 싸웠다. 그렇게 돌아갈 곳이 없는 선아를 동석은 품어줬다. 

하지만 첫사랑이자, 첫정이던 선아는 동석의 친구에게 몸을 허락했고, 그걸 안 동석이 폭주하자 동석이 보는 앞에서 깡패라며 신고를 했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제주 돌담 사이 삐져나온 잡초같은 동석이 유일하게 마음을 줬는데, 그런 동석을 선아가 짓밟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버렸냐는 동석의 질문에 선아는 동문서답처럼 말한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자신을 망가뜨려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냐고. 

자신이 맞은 상처를 보여줘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려던 것처럼, 선아도 그런 식으로 아빠의 관심을 끌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아의 시도는 아빠의 사랑을 갈구하는 딸을 놔둔 채 바다로 차를 몰아버린 아빠의 이른 죽음으로 무산된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서 바다로 빠져들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한 선아는 오랜 지병, 우울증을 얻는다. 

 

 

선아의 우울증은 동석의 맞은 상처와도 같다. 의붓아들에게 매일매일 맞고, 그걸 엉마에게 보여주듯이, 하지만 그런 마음의 아픔을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선아는 자신의 안에 그 상흔을 차곡차곡 쌓아 자신을 갉아먹어간다. 그리고 그 상흔이 이제 선아의 가정을 무너뜨렸고, 아이마저 잃을 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동석이라고 다를까, 선아가 그렇게 떠나고 의붓아버지네 집을 털어 다시는 제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난 동석, 하지만 뭍에서도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제주로 돌아온 동석,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도 않고 트럭 하나를 몰며 제주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김훈 작가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인생은 고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종교적 교리에 의하면 인간사 희노애락의 욕망에서 '해탈'하면 되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런가, 그런 '고해'의 삶, 그런데 김훈 작가는 그저 인생이 그런 거라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인간의 삶은 다 저마다의 욕망과 욕구를 가지고 맞물린다. 내 맘이 네 맘같지 않은 그런 모든 일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고해'의 풀을 만든다. 그저 인간사가 다 저마다의 이해 관계에 얽혀 이루어지는 것임을 '수용'한다면 될 일이라고 김훈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이 저마다 이루어져 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동석과 선아는 여전히 그 '어린 시절의 상흔'에 사로잡혀 있다. 에이 설마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느냐는 선아의 농반 질문에 동석은 말끝을 얼버무린다. 동석은 늘 자신의 인생이 선아 때문에 꼬였다고 말한다. 마흔 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동석의 인생은 선아 때문에, 엄마 때문에 라는 그 '트라우마'로 부터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동석의 떠돌이 삶이 드러내는 외상, 그리고 선아의 의지가지 없는 우울증의 내상은 모두 여전히 그들이 어른이 되었음에도 '어른 아이'의 그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들이 겪은 '상실의 시간'은 과거가 되었고, 그들은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석도 선아도 그 상실을 겪은 그 시절에 멈춰있다.

그런 '어른 아이'인 상태인데도 선아는 자신이 '엄마'로서의 주장을 펼친다. '아이만 있다면, 자기 삶에 유일한 의미인 아이만 있다면',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며 예전 아빠와 함께 살던 곳을 꾸미고 있다. 

그런 선아에게 동석은 말을 건넨다. 재판에서 져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없게 되더라도 너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어쩌면 동석은 인정하고 싶지만 그의 내면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했던 어머니의 삶을. 그래서 동석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동석에게 선아의 등장은 해묵은 인연의 결자해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석이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내면의 아이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않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서로에 대한 '감정'을 놓지 않은 두 사람, 그 '온기'는 아직도 두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고해'의 파고를 넘어서는 힘이 되지 않을까. 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헤집고 보면 다들 내 안에 '아이'를 놓지 못하고 있다. 노희경 작가는 동석과 선아를 빌어 말하고 있다. 그제 그만 그 아이를 놓아주라고.그 시절의 엄마도, 아빠도 그저 각자 자신의 삶을 버겁게 짊어지고 살아갔던 한 사람들일 뿐이었다고. 타인들의 삶으로 인한 고해의 바다에서 그만 허우적거리고 넘어서라고.  진정한 어른됨의 삶을 살아가라고. 



by meditator 2022. 5. 8. 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