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부작인 <시그널>이 마지막 회를 앞두고 있다. 아니, 이 글이 기사화되는 그 시점에는 이미 종영을 했을 지도 모른다. 종영을 앞둔 <시그널>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바로 '누가 죽을까'인가 이다. 과연 과거로부터 무전을 보내온 이재한(조진웅 분)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건지, 그리고 이제 현재에서 차수현(김혜수 분)을 대신해서 총을 맞고 목숨이 경각에 이른 박해영(이제훈 분)이 목숨을 건질 건지, 혹시나 이재한을 구하려다 차수현이 대신 죽을 런지 그 귀추에 모든 애청자들의 촉각이 곤두서있다. 그래서 이 글을 그렇게 누군가의 목숨의 결과가 내려지기 전에 쓰고자 한다. 결국 누가 살고 죽느냐의 그 결론 이전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에 대해. 







타나토스 김은희
김은희 작가는 마치 타나토스같다. 김 작가의 드라마에는 언제나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추리물이나 미스터리물이라는 드라마 장르에서 기인하는 누가 죽고 사는데 그치지 않고, 드라마의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주인공인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해결하는 데서 오는 '죽음의 그림자'이다. 

2011년작 <싸인>에서 천재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 분)은 공소시효가 지나 유유자적 법망을 빠져 나가려는 강서현(황선희 분)를 잡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2012년작 <유령>에서는 심지어 극초반 주인공인 사이버 수사팀장 김우현(소지섭 분)이 죽어 버렸다. 그리고 2014년 <쓰리데이즈>에서 비록 목숨을 건졌지만, 무려 대통령인 이동휘(손현주 분)가 김도진(최원영 분)의 도발을 막기 위해 자신을 던졌다. 결국 누구도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마지막 회에 이르기까지 <시그널>처럼 과연 김도진을 막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 사람이 이동휘인가, 한태경(박유천 분)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기는 <시그널> 못지 않았다. 비록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지만, 대통령이었던 이동휘는 대통령직은 물론, 스스로 법의 심판대에 나설 처지로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에는 왜 유독 '죽음'의 그림자가 깊을까? 작가가 유독 '죽음'을 두고 드라마적 트릭을 쓰는 것을 즐겨해서? 아니 그것보다는, 김은희 작가 드라마 주인공들이 맞부닥치는 강고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싸인>의 윤지훈이 상대한 것은 그저 서윤형을 죽인 사이코패스 강서현이 아니다.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 강준혁 의원의 딸 강서현이다. 이미 처음 서윤형 살해 사건이 벌어졌을 때 권력의 비호를 받아 유유히 법망을 도피했던 그녀, 그리고 이제 다시 윤지훈이 하는 수사망조차 '시간'이라는 비호를 받아 도피하려는 그녀를, 윤지훈은 어이없게도 자신을 던져 방어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강서현을 잡아넣는 것이 아니라 범법자를 비호하는 권력에 대한 투쟁의 자기극한적 몸부림이다. 

<유령>도 마찬가지다. 사이버 수사팀장 김우현은 제대로 수사도 해보기 전에 정재계의 담합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그의 빈 자리를 그를 흠모했던 친구 해커 박기영(최다니엘 분)이 대신한다. <쓰리데이즈>도 다르지 않다. 대통령조차 쥐락펴락하는 정치군사경제 카르텔, 그리고 그 대표 김도진을 상대로 대통령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임에보 위태로운 싸움을 이어간다. 대통령이 싸움의 자리에 선 순간, 그를 경호하던 몇몇의 사람을 제외하고, 권력의 심층부에 있던 거의 모든 이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이미 금권을 바탕으로 거의 모든 제도와 법망, 심지어 군부조차 손아귀에 쥔 세력에 대해 싸움은 그가 법의학자건, 사이버 수사팀장이건, 대통령이건, 이제 한낯 형사건 결국 자신을 던지는 '무리수'가 될 수 밖에 없는 바위에 계란 던지기인 셈이다. 그러기에, 그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성경의 기적이 행하지 않는 현실의 싸움에서 무기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의 '목숨걸고 싸우기'밖에 없다. 그러기에 늘 김은희 작가의 주인공들은 죽거나,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된다. 

21세기 부조리한 대한민국이라는 벽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김은희 작가 주인공들의 싸움을 보고 있노라니, 문든 얼마전 본 영화 <동주>가 떠오른다. 영화 <동주>의 주인공 송몽규와 윤동주는 강고한 식민지 체제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이다. 때론 독립군이 되어, 때론 임시정부의 일원이 되어, 그리고 일본 유학생을 규합하려 '실천'했던 송몽규나,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으나 시절이 하수상하여 그로 하여금 시을 삼키게 만들었던 윤동주나 결국 식민지 일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동주>에서 <시그널>까지 젊은이를 죽이는 역사 
<동주>를 보고 외람되게도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에 입학했다는 부푼 품도 무색하게 강의실 밖에 상주하는 경찰들, 그리고 건물 옥상에 올라 목청껏 외치기도 전에 잡혀가는 선배들로 인해 시대를 먼저 느껴야 했던 그 시절,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그 시절 대학을 다녔던 우리에겐 대학의 낭만 대신, '억압'이라는 시대가 먼저 짖눌렀을 것이다. 대번에 신춘 문예에 당선하고야 마는 글 재주를 지녔던 문사도, 고이고이 자신 속에 시를 간직했던 청년도,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전에 시대라는 무게에 짖눌려 애초에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하고 유명을 달리했던 동주의 주인공들과 비록 그 삶과 죽음의 경계는 달리하지만, 여전히 현대사를 살아냈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시대가 지닌 무게는 강고했다. 

그리고, 그 시대가 '민주화'가 되었다고 했다지만,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김은희 작가의 주인공들은 증명한다. 동사무소 여직원을 말 한 번 못건네보고 짝사랑하던 순경 이재한은, 차수현의 마음조차 외면하며 전출해야 하는 외곬수 형사가 되었다. 그를 그리 만든 결정적 조건은 그의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었지만, 그를 그렇게 되도록 만든 배경은 억울한 죽음을 양산하는 체제이다. 박해영도 다르지 않다. 과외한번 받지 않아도 형의 가르침으로 문제집의 문제를 만점 받던 영민한 소년은 형의 죽음과 가족의 붕괴로 외톨이가 되어 형의 복수를 향한 일념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15년을 기다린 차수현은 어떻고. 아니, 그들 이전에, 그들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시그널>의 배경이 된 '밀양', '성수대교', '신정동'이란 지명으로 남은 사건의 피해자들은 또 어떻고. 애꿏은 젊은이들이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가 되어 현대사의 그늘 속에서 죽어간다. 

<동주>에서 <시그널>은 몇 십년의 간극을 지닌 우리의 근 현대사를 다룬다. 물론 영화와 드라마 안에서 주인공들에게 죽음을 가하는 대상은 달라졌다. 일제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권력의 카르텔로. 하지만, 그것이 1940년대이건, 1990년대이건, 그리고 2010년대이건, 여전히, 우리의 땅에서 '포기하지 않는 젊은이들'은 젊음을 볼로모 잡힌 채,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죽임의 방식이 노골적이냐, 교활해졌냐의 차이만 달라졌을 뿐이지. 아마도 그 공포를 일찌기 경험한  우리의 어른들은 일찌기, 청년들에게 '나서지 말라'라는 교훈을 주입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16. 3. 12. 17:58

<시그널> 10회 2015년의 박해영(이제훈 분)은 이재한(조진웅 분)으로부터 '우리 팀 막내'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 막내가 이제는 팀장이 되었음을 전한다. 그 소식을 들은 이재한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한다. 팀장? 쩜오가? 그리고 반문한다. 그 팀은 잘 굴러갑니까? 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운전은 못해도 강단은 있으니, 잘 굴러갈거라고.


<시그널> 과거에서 강력반에 배치됐지만, 경찰제복조차 벗지 못한 채 선배들의 심부름이나 도맡는 여경 차수현(김혜수 분)을 선배 조진웅은 말 끝마다 '점오'라 부른다. 한글 맞춤법 표기에 따르면 '점오'라 씌여져야 하지만, 어쩐지 '점오'라 읽으면 제 느낌이 살지 않는 '쩜오'. 이는 1이 되지 못한 0.5를 뜻한다. 즉 아직 온전한 한 사람의 구실을 하지 못한 부족한 사람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청 홍보 차원에서 강력반에 배치됐지만, 사건 수사는 커녕 운전조차 못하는 차수현은 말 그대로 쩜오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쩜오가 있다. 바로 어릴 적부터 사회 정의에 앞장서는 경찰이 되겠다는 의욕을 실현시킨 신참 토끼 경찰 주디 홉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경찰학교 수석 졸업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경찰 등록조차 하지 못한 채 주차 단속원으로 배치된 주디는 역시나 아직 온전하게 경찰로 대접받지 못하는 쩜오다. 



이렇게 강력반이지만 모든 것이 어설픈 차수현이나, 신입 경찰이지만 배치조차 받지 못한 채 주차 단속이나 하는 주디는 경찰이지만, 온전히 그 몫을 해낼 수 없는 쩜오다. 하지만 그녀들이 쩜오인 것은 경찰이라는 직무에서만이 아니다. 남성들의 전유물인 강력반에 홍보용으로 배치된 차수현은 처음 머물 숙직실조차 없는 '여성'이다. 숙직실은 어찌어찌하여 마련되었지만, 임무에서 그녀의 몫은 쉽사리 얻을 수 없다. 가장 무뚝뚝한 선배 이재한이 '니가 다방 레지냐'며 화를 내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선배들의 커피 심부름에 서류 정리 따위 '강력반'이랑 무관한 허드렛일이다. 그녀는 의욕을 불태우지만, 차량 운전부터 사건 수사까지 그 어느 것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그나마 이재한 정도가 툴툴거리며 자신의 편의에 따라 그녀를 수사에 동반하는 정도지, 다른 선배들에게 그녀는 그저 있으면 보기 좋은 꽃같은 존재일 뿐이다. 

설정상 주디 역시 여성 경찰이지만, 주디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보다도, 포식자가 아닌 '토끼'라는 그녀의 생물학적 정체성이다. 물소 서장에서 부터, 북극곰, 코뿔소 등 생물학적으로 포식자의 DNA를 가진 거대한 경찰 동료들 사이에서 왜소한 토끼인 그녀는 한 눈에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생물학적 불평등의 전사를 극복하고 진화한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의 도시 주토피아라지만, 정작 그곳을 지배하는 건 여전히 동물들의 DNA 정체성에 따른 보이지 않는 차별이다. 거기서 경찰이 되겠나고 나선 토끼는, 강력반의 여성 차수현만큼이나 쩜오이다. 

차별없는 공정 사회를 지향한 우화, 주토피아 
애니메이션이란 장르가 무색하게 주토비아가 드러낸 상징성은 현실적이다. 한때는 포식자였던 육식동물과, 그 육식동물의 먹이였던 피포식자인 초식 동물들이, '진화'하여 한데 어울려 살아간다는 주토피아는, 마치 강대국과 약소국으로 뒤엉킨 우리 세계의 이상향과도 같다. 하지만, 주토피아를 이상적으로 바라본 주디의 생각이 순진했음을 드러낸 연쇄 실종 사건과 그 배후는 '진화'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불공정한 세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심지어, 그 불공정을 이어가기 위해, '역이데올로기'를 차용하는 '공포' 정치는 '무기' 산업을 기반으로 한 내전과 긴장으로 점철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특히나, 가장 평화로운 상징으로 '공포'를 무기로 내적 갈등을 조장하는 벨 웨더 시장의 정략은 현 한국 사회에서 너무도 익숙한 정황이다. 



그런 이상적이지만,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주토피아를 이상적으로 여기며, 그 속에서 정의로운 토끼 경찰이라는 꿈을 일궈나가고자 애쓰는 주디의 모험은, 곧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찾는 과정과도 같다. 수석 졸업임에도 등록조차 하지 못한 채 주차 단속원으로 던져진 편견에 맞서, 불공정한 세상의 민낯과 만나고, 그 속에서 자기 안에 내재화되어 있던 역시나 불공정의 논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깨나가는 주디의 도전은, 그저 평범한 히어로물의 성장담을 넘어선다. 즉, 그저 약자였던 초식 동물의 성공담을 넘어, 초식 동물이라는 피해 의식을 넘어, 자신 안에 내재화한 또 다른 약육 강식의 논리를 발견하고 깨뜨려 나가는 것은, 의식적으로 진일보한 자각인 것이다. 즉, 약자로서 초식 동물의 성취를 강자인 포식자에 대한 제압을 넘어, DNA의 속성을 넘어 강자와 약자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주토피아>는 끊임없는 불평등으로 점철된 이 사회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담는다. 

거기서 쩜오, 즉 사회적 약자였던 주디는, 스스로 약자의 역할론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약자의 피해의식을 넘어, 주토피아가 가진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이것은, 최근 마블 코믹스 버전의 헐리우드 영웅담의 수준을 뛰어넘는 해결책이다. 그저 쩜오였던 토끼 경찰은 주차 단속원을 넘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임을 증명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던 또 다른 차별 의식을 깨고, 주토피아의 근본적 모순을 해결하는 진정한 해결사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닉 와일드의 도움을 받던 주디는 그와 진정한 파트너쉽을 가진 한 사람의 경찰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가부장적 사회의 해결사, 차수현
강력반의 꽃으로 커피 심부름이나 하던 차수현은 자신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던 이재한의 사건을 도우면서, 그녀가 원하던 강력반의 일원으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의욕이 앞서 홀로 홍원동 사건 수사를 하던 차수현은 연쇄 살인범의 덫에 걸려 검은 비닐 봉지를 뒤짚어 쓴채 죽음에 맞선다. 겨우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건졌지만, 사건의 트라우마에 고통받던 그녀에게, 무뚝뚝하게 다가온 이재한은, 그 거구의 자신 역시 그녀와 다르지 않음을 토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당위성을 진솔하게 설득한다. 

2015년의 차수현은 그 예전 꿈많은 여경대신, 경찰을 그만두려는 자신을 돌려 세웠던 이재한의 실종을 밝히고자 하는 맹목적 본능만이 남은 노련한 형사가 되고, 그녀의 맹목성과 과거와 통신한 박해영의 뜻이 어울려 본의 아니게 이재한이 풀어내지 못한 미제 사건의 해결사가 된다. 그저 꿈많던 강력반 쩜오는, 스스로 여성 가해 사건의 피해자에서 떨쳐 일어나, 다수의 여성이 희생된, 결국은 남성 중심 사회의 폐부를 도려내는 전사로 거듭나게 된다. 역시나 차수현은 그저 능력있는 미제 사건 전담팀의 팀장일 뿐만 아니라, 10회에서 보여지듯 그녀 스스로 갇혀있는 트라우마로부터 스스로 탈피하는 승화의 과정을 겪는다. <시그널>의 전개는 이재한의 미스터리한 실종과, 그가 못다한 사건의 해결이지만, 동시에 그 과정은 이제는 팀장이 된 차수현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6. 2. 25. 00:35

사전에서 골목의 뜻을 찾아보았다. 

골목; 큰 길에서 쑥 들어가 동네나 마을 사이로 이리저리 나있는 좁은 길
이 '골목'은 요즘 획일적으로 도시화된 도시 문화 속에서 고유의 색깔을 지닌 '골목 문화'로 각광받는다. 그래서 '무슨무슨 골목'하며 저마다의 정체성을 가진 골목이 등장했고, 거기에 '골목길 상권이 나타났고, 결국엔 그 개성있는 이름으로 인해,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양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간 시대 '유적'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 시대에 출현하고, 사라져가는 골목은 드라마를 통해 또 다른 시대의 역사로 돌아온다. 바로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과 <시그널>의 골목길이다. 

응팔과 시그널의 같고도 다른 골목길
<응팔>과 <시그널>에는 동일한 서울 변두리 지역의 골목길이 등장한다. <응팔>에 등장한 쌍문동이 아직도 유효한 서울 지역의 지명을 구체적으로 따온 반면, 포탈 사이트에 그 지명을 검색하면 경상북도의 어느 곳이 뜨는 <시그널>의 홍원동은 1994년 서울 변두리 가상의 지역이다. <응팔>이 구체적 지명을 등장시킨데 비해, <시그널>이 가상의 지명을 쓴 것은 바로 드라마 속에서 지역에서 벌어진 일의 희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즉 드라마 속에서는 홍원동이라고 지칭되지만 그 사건에서 시청자들이 신정동 연쇄 살인 사건을 떠올리는 사건의 비극성이 그리고 드라마와 달리 여전히 미해결로 남은 사건의 결과가 <시그널> 속 지명을 가상화한다. 



두 드라마 속 골목은 각각 1988년과 1997년 거의 10년의 간극을 가진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를 통해 지켜보게 된 두 서울의 변두리 골목길이 주는 정서는 전혀 다르다. 쌍문동의 골목길이, 골목길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지칭될 정도로 도시화된 서울에서 잔존한, 사람 냄새 그윽한 인간적 유대의 장소라면, <시그널>의 골목은 연쇄 살인을 무려 10년간 움켜쥔 불온한 공간이다. 1988년에는 공동체적 문화가 살아있던 골목길이 불과 10년이 흘러, 인간성 상실의 증거인 연쇄 살인을 품은 공간으로 전화된 것일까?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골목길을 바라보는 두 드라마의 상이한 시각, 그리고 골목길을 배경으로 풀어진 서울이라는 도시의 극심한 빈부 격차의 역사가 이런 현격한 결과를 낳게된 것이라 보는 것이 적당하다. 

동일한 골목길을 배경으로 했지만 막상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는 골목길은 그 넓이에서 부터 다르다. <응팔>의 골목길이 심지어 자가용은 물론, 트럭 한 대가 들어서고도 공간이 한참 남는 널찍한 공간인 반면, <시그널> 속 사건이 벌어지는 골목은, 그 자체가 폐소 공포증을 느끼게 할 만큼 좁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로 막혀있다. 뿐만 아니라,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은, 그 어느 후미진 곳에서 '납치'가 벌어질만큼 외지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다르다. <응팔>의 골목은 그 자체로 사람이다. 피 한 방울도 섞지 않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람들이 한 골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피붙이처럼 엉켜 살아간다. 아버지들은 아버지들대로, 어머니들은 어머니들대로 틈만나면 뭉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이들은 친구가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 아이를 같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고백'을 포기할 만큼 형제애를 나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뒷담화'대신 진심으로 이웃의 안녕을 걱정할 뿐만 아니라, 거리로 나앉게 된 선우네를 경제적으로 돕는 굵직한 부조에서부터, 용돈, 식사, 심지어 쓰러진 택이 아빠의 간호까지, '가족'이란 이름으로 하기 힘든 일까지 너끈히 해내는 곳이다.

반면에 <시그널>에 등장한 골목은 같은 서울이되 서울이 아니다. 홍원동 골목길을 홀로 가던 여성들은 그곳에 움크리고 있던 연쇄 살인마에게 납치된다. 그저 다리 다친 불쌍한 강아지가 애닮아 발을 멈췄던 여성들은 연쇄 살인마(이상엽 분)의 어미가 강아지에게 했듯 검정 비닐 봉지가 머리에 씌워진 채 세상과 이별한다. 하지만 십 여년에 걸쳐 연쇄 살인이 벌어지는 동안, 역시나 사람들이 사는 그 골목엔 목격자가 없다. 어디 목격자만 없나? 그녀들의 실종조차도 백골 사체가 발견된 이후에야 드러날 만큼, '의문의 실종'이 가능한 곳이다. 심지어 '납치'되었던 점오 여경 차수현(김혜수 분)이 검정 비닐 봉지를 쓰고 거리로 나뒹굴고, 거기를 질주할 때, 그리고 연쇄 살인마가 다시 그녀의 목을 조를 때 골목의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건 그뿐이 아니다. 어미를 잃고 아비를 따라 쌍문동 골목길로 온 불쌍한 소년 택이는 비록 불면증 약을 한 움큼 씩 먹으며 성장했지만, 봉황당이라는 금은방을 하는 아비의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어린 시절 부터 바둑이라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함께 자란 골목길 아이들 덕분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설움도 잊은 채 우정을 쌓았고, 심지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자 아이와 결혼까지 한 성공의 삶을 산다.

하지만 <시그널> 속 골목길에서 자란 소년은 다르다. 엄마와 둘만 남겨진 소년, 하지만 봉황당을 하는 택이 아버지와 달리, 가난한 소년의 어미는 견디기 힘든 현실의 고통을 소년과의 동반 자살로, 그리고 소년에 대한 학대로 푼다. 바둑 기사로 어엿하게 자기 앞가림을 하는 택이를 아빠가 아프다고 여자 친구가 중국까지 따라가서 보호를 해주고, 그 여자 친구의 부모는 어린 딸을 남자 친구를 따라 중국까지 보내주는 결정조차 흔쾌히 하는 쌍문동 골목 공동체와 달리, 수시로 어미에게 목이 졸리고, 독을 탄 음식을 먹고 변기에 토해내야 하는 소년에게 손길을 내미는 이웃은 없다. 아니 오히려 소년이 데리고 온 강아지도차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약을 먹으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견녀내기 위해 여자들을 죽이며 살아간다. 



골목의 풍경은 다르지 않다. 쌍문동 골목길에도 야한 섹규얼리티를 강조한 영화의 포스터가 흩날리고, 홍원동 역시 삭막한 골목길에서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색채는 그 포스터의 짙은 색감이다. 그러나 똑같은 삭막한 콘크리트 담벼락과 거기에 붙은 조잡한 포스터이지만, 쌍문동의 그것들이 그저 시대를 나타내는 데코레이션에 불과한 반면, 홍원동의 그것은 여성을 상품화하고 도구화했던 20세기 정신 문화의 세계를 대변한다. 쌍문동의 소년들은 그저 의례로 소비했던 그것들이 홍원동 소년에게로 가면 트라우마의 실현으로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용이한 문화적 기반이 된다. 

골목, 경제적 빈부 격차가 낳은 다른 풍경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응답하라 1988>이 우스꽝스럽게 조명했던 야한 포스터가 나붙고 상영되던 그 시대는, 이른바 3s 문화 정책이 구체화되던 시대다. 군부가 민간 정부로 자기 변신에 성공하고, 경제적 호황이 그 성공을 뒷받침할 때, '독재'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정부가 내세운 것은 바로 sex, screen, sports의 3s이다. 

그에 따라 1982년 프로야구, 83년 프로 축구, 86년 아시안 게임, 그리고 88년 올림픽으로 sports 정책은 정점을 이루었다. 또한 82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거리는 불야성의 환락의 도시로 번쩍이기 시작한다. 또한 80년 컬러 tv가 보급되기 시작되었고, 영화는 그런 컬러 tv에 대응하는 자구책인 양 tv에서는 만날 수 없는 성인용 19금 영화들을 양산해 낸다. 그리고 그렇게 3s의 우민화(愚民化)정책이 벌어지는 동안, 사회적 비판 의식이 무뎌지는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삶에 매몰되고, 그 과정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일한 서울의 골목이지만, 그 골목길에서 배태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응팔>을 매개로 등장한 이야기는 철저한 서울 중산층의 자기 성장 스토리이다. 단칸방에서 끼니를 굶었던 정팔이네의 복권 당첨. 덕선이네 보증이라는 극적인 스토리까지 끼얹었지만, 결국은 전자대리점, 은행원, 금은방을 하는 당시 좀 살만했던 중산층의 약간은 굴곡있는 부의 에스컬레이션, 그리고 그런 안정된 기반 위에서 탄생한 아이들의 성공을 그려낸다. 골목길에서 위협이래봐야 바바리맨같은 위협적이지 않은 변태일 뿐이다. 심지어 그 마저도 미래의 남편감이 구해준다. 안온한 중산층다운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그런 중산층의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응팔>을 보며 향수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골목길의 그 누군가가 안정된 경제적 기반과 그에 따른 성공적인 자식 농사를 지었던 반면, <시그널>의 연쇄 살인마처럼 그런 경제적 기반을 누리지 못한 그 누군가에게 골목은, 상실과 범죄의 태반이 된다. 이미 사전에 제작된 <시그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지력이라도 가진 듯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된 아동 학대와 범죄를 다룬 데서 보여지듯, 2016년에 드러나고 만 아동 학대의 시초는 이미 저 1997년, 아니 <응팔>이 다루고 있지 않은 1980년대의 그 어느 골목길에서 비롯된다. 아니, 만약에 정환이네가 복권을 맞지 않아다면이라는 단 하나의 물음표만으로도 가능하다. 과연 그래도 여전히 쌍문동 골목길의 그들은 형님, 아우하면서 즐겁게 지냈을까? 거리로 나앉게 될 선우네를 택이 아빠가 돕지 않았다면 선우는 무사히 서울대 의대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가족도 없이 홀로 공장을 다니다 수은 중독이 된 여공과 다른 삶을 살수 있었을까?

by meditator 2016. 2. 21. 18:02

1월 22일 첫 방영된 tvn의 금토 드라마 <시그널>은 마치 <응답하라>가 미처 그려내지 못한 그 시대들의 뒤안길을 파헤쳐간다. 드라마는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올 법한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라는 조동진의 노래를 따라, 그 시절로 시청자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5년전 유괴된 아이의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비오는 날 운동장에서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산을 든 여자와 사라진 아이, 그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15년이 흘러 이제 그 아이, 김윤정 유괴 사건의 공소 시효가 만료될 시점이 다가왔다. 하지만, 젊은 윤정이의 엄마가 초로의 나이가 되도록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 박해영(이제훈 분)이 우연히 집어든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온 15년전 그 시절 사건에 뛰어들었던 형사 이재한(조진웅 분)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공소 시효가 다가온 김윤정 양의 사건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갑동이>와 <시그널> 같은 듯, 다른 듯
이재한이 제공한 단서로 범인 윤수아(오연아 분)를 잡았지만, 박해영과 차수현(김혜수 분)을 가로막은 건 바로 공소시효다. 2014년 방영된 <갑동이>처럼, 범인을 눈 앞에 놓고도 공소 시효로 인해 눈 앞에서 범인을 놓치는 상황이 다시 한번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갑동이 때처럼, 공소 시효는 범인을 잡는 또 다른 트릭으로 작용한다. 결국 김윤정 유괴 사건의 공소 시효를 넘겨버린 사건, 그리고 미소를 띠며 유유히 조사실을 걸어나가는 윤수아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살해한 또 다른 사람, 서형준의 살해 공소 시효였다. 하지만 여론은 윤정이의 범인을 눈 앞에 두고도 놓아줘야 하는 이 상황에 분노하고, 공소 시효법 자체가 개정된다. 그리고 경찰 안에 미제 사건 전담팀이 생기고, 윤정이 사건을 덮으려 했던 수사국장 김범주(장현성 분)는 보란듯이 윤정이 사건에 뛰어들었던 박해영, 차수현 등을 미제 사건 전담팀에 배치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 던져진 첫 번째 미제 사건은 바로 경기 남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이다. 

'경기 남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은 우리에겐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으로 더 익숙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미 2003년 제작된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 영화 속 형사의 몸서리쳐지는 대사를 통해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2014년 드라마 <갑동이>를 통해 재연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대표적 미제 사건으로 박해영, 차수현의 미제 사건 전담팀에게 던져졌다. 



경기 남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을 다시 한번 파헤치는 <시그널>의 주체는, <갑동이> 때처럼 형사들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갑동이>가 그 시절 80년대의 막무가내 식 수사로 희생자가 되었던 희생자의 아들이 형사가 되어,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정신과 의사와 함께 사건을 추적해 들어간다면, 이제 2년만에 다시 <시그널>을 통해 재연된 경기 남부 연쇄 살인 사건을 풀어가는 주체는 그 시절의 신참 순경 이재한과, 미제 처리 전담반의 박해영, 차수현이다. 드라마는 과거로 부터 온 무전이라는 '환타지적 모티브'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이재한이라는 인물의 전사를 자유자재료 오간다. 김윤정 유괴 사건에서 서른 중반의 이재한으로 부터 무전이 왔다면, 이제 경기 남주 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이재한을 그 시절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신참 시절의 이재한이다. 그렇게 이재한의 전사를 씨줄로 한 드라마는, 그와 무전을 하는 박해영을 매개로, 유족들을 '통한'으로 몰아넣는 '미제 사건'이라는 날줄로 이 사건을 엮어간다. <갑동이>가 제목에서 처럼 경기 남부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사건 자체와 그 사건의 범인에 집중해 들어갔다면, <시그널>은 앞서 1회에서 김윤정 유괴 사건을 시작으로, 경기 남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으로 사건을 이어가며, '미제 사건' 이라는 줄기 자체에 집중한다. 

경기 남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이 또 다시 <시그널>을 통해 재연된 이유는?
똑같이 재연된 경기 남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이지만, 그 온도는 다르다. <갑동이>가 드라마 전체를 통해 이 사건에 집중하듯, 드라마는 현재에 되살아난 '갑동이'의 카피캣을 통해 특수 수사대가 만들어 질 정도로 경찰의 중심 사건으로 풀어진다. 그에 반해, <시그널>은 이미 김윤정 사건을 들춘 형사들이 6개월 뒤에 사라질 미제 사건 전담팀으로 보복성 배치되듯, '미제' 사건을 만든 경찰의 '정의롭지 않음'을 드라마의 한 축으로 끌고간다. 거기엔 아직 드러나지 않은 2회에 총성으로 끊긴 이재한 형사의 부재도 미스터리로 자리잡는다. 



즉, 이미 전작 <쓰리데이즈>를 통해, 위기의 대통령과, 다수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협조한 대통령을 경호해야 하는 경호원의 딜레마와, 그들이 찾아가는 정의를 통해, 세월호 사건이 벌어진 2014년의 암울한 정의의 세상에, 한 줄기 '정의'의 가치를 강직하게 논했던 김은희 작가는, 이제 '미제 사건'을 통해, 돌아오지 않는 아이와, 그 아이의 죽음을 은폐하는 '정의'의 문제를 끄집어 낸다. 그리고, 홀홀단신 대통령과 그를 목숨을 바쳐 경호하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으로 가능한 '정의'의 문제를 논했던 작가는, 이제 다시, '아이'의 생명으로 부터 시작하여, 여전한 피해자들의 '진혼곡'을 울릴 또 다른 정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하다. 600일 하고도 다시 반이 지나도록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건, 그리고 우리에게 잊혀져 가는 '정의'가 배제된 다른 사건들의 기억을 복기시킨다. 부디,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의 진범 '갑동이'를 잡고 싶다 절규했던 <갑동이>가 아쉽게도 사이코패스 갑동이와 그의 카피 캣에 짖눌려 버린 <갑동이>의 전철을 밟지 않고, 과거에 침잠되지 않은 채 무전을 보내온 이재한 형사의 이야기로 귀결될, 현재의 정의를 제대로 풀어내 주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6. 1. 24.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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