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3일 <슈퍼 매치> 파일럿방송에서 노익장의 양희은은 가수 인생 40년이나 어린, 데뷔한 지 두 달된 김예림과 '제주도의 푸른 밤'을 듀엣으로 불렀다. 

두 사람의 콜라보레이션은 여러가지를 상징한다. 이제는 <불후의 명곡>에서 전설 대접을 받는 양희은이 개인 콘서트가 아닌 노래 부를 무대를 얻기 위해서는 40여년이나 어린 김예림과의 콜라보레이션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두 사람의 낭랑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화음만으로는 그 어느 세대에게서도 1위의 승인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 등이다. 
이런 양희은의 모습은, 그리고 그 날 모처럼 오랜만에 무대에 선 이승환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시대 가수들의 현실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한 단면일 지도 모르겠다. 

(사진; 스포츠 월드)

굳이 그 시작을 까탈스럽게 걸고 넘어지자면 텔레비젼 속 가수들에게 부박한 선택을 강요하게 된 것은 <슈퍼스타 K>일지도 모른다. 
아직 데뷔를 하지 않은 가수 지망생들에 의해 불려지는 다양한 노래들에 사람들의 시선이 빼앗겼고, 서바이벌 속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를 불러왔다. 살아남기 위해, 살아남아 가수가 되고, 상금을 받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지망생들의 모습은감정의 절정을 치달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자고로 한껏 고조된 지각은 다시 되물릴 수 없으니, 사람들은 프로패셔널한 가수들이 나와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무대를 심심해 하기 시작했다. <슈퍼스타K>를 통해 불려진 지난 시절의 노래들이 흥하면서 잠시 잠깐이나마 <유희열의 스케치북>과 비슷한 무대가 각 방송국마다 만들어 졌지만, 이미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그저 '노래'란 원조 평양 냉면처럼 심심할 뿐, 원조 <유희열의 스케치북>만을 남기고 다시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나는 가수다>가 등장했다. 
기존의 가수들도  더 이상 이곳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조건과, 프로패셔널한 가수로써의 자존심을 내걸고 '서바이벌'에 나섰다. 하지만 그 절박함은  금의환양을 꿈꾸는 전국의 무수한 가수 지망생들을 등에 업은 <슈퍼스타K>와 달리, 극강의 편곡과 가창력을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오히려 무리수가 되는 <나만 가수다>의 조건이 오히려 프로그램이 '조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오히려, <나는 가수다>의 절박함을 덜고, 거기에 프로패셔널한 가수들의 버라이어티함과 오락성을 덧붙인 <불후의 명곡>은 100회 특집을 하며 자신의 포지션을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른다지만 <불후의 명곡>의 분류는 어디까지나 오락프로이다. <불후의 명곡>의 특징은 이른바 그 프로그램이 낳은 가수로 불려지는 문명진의 무대를 통해 보여진다. 처음 무대에 선 문명진은 마치 국악의 고수가 산 속에서 피를 토하며 목소리를 갈고 닦았듯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갈고 닦은 그의 애절한 R&B창법만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그의 절실한 노래가 화제가 되었지만, 이미 <불후의 명곡> 스타일의 무대에 세련된 선배 출연진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회를 거듭할 수록 문명진의 무대에도 조금씩 무언가가 하나씩 더해지고, 그가 들고 나온 노래의 편곡도 화려해 지기 시작하면서 1등을 거머쥐게 되었다. 물론 늘 <불후의 명곡>에서는 1등이 별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기사가 되는 건 단 1승에 불과하더라도 1위이다. 가창력으로 날고 기는 가수들의 무대를 결국 결정하는 건, 오로지 노래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곡의 선정과 편곡, 무대 구성이 되는 것이 <불후의 명곡>의 불문율이다. 


결국 이미 가수로써 인정받은 프로패셔널들이라도 그들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서는 '서바이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힙합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서는 <Show Me The Money>를 통해야 하고, 이미 지명도가 있는 락밴드라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그들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밴드 서바이벌>이나 <탑 밴드>의 출연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아니 그것 말고는, 이제는 아이돌에게조차 자리를 나눠주어,  1주일에 겨우 한 자리만 알려지지 않은 가수나 팀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유희열의 스케치북>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을 노릇인 것이다. 
하지만 자리는 얻었으되, 그 결과가 단비가 되었는지는 회의적이다. <Show Me The Money> 자체가 이미 시즌 2에 들어서는 대중적 관심도가 더 낮아졌고, 비록 거듭하면서 '노예 계약'이나 개인간의 인정 투쟁으로 변질되기는 했지만, 애초에 힙합퍼들의 디스전의 시작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적 지명도와 실제 힙합계의 존재감의 불협화음을 평하고 했던 것처럼, 시즌 2 내내 여러 문제들이 돌출되어 역효과를 낳은 감마저 있었다. 

그래도 <Show Me The Money>나, <슈퍼 매치>, <불후의 명곡> 정도까지는 애교 수준이다. 
여기까지는 신인과 기성의 가수들의 경계가 분명했고, 선배와 후배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새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들은 더 이상 기존 정도의 수준으로는 관심을 끌 수 없기에 더 '센' 서바이벌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jtbc의 <히든 싱어>이다. 
기존의 가수와 그 가수를 모창하는 사람들이 장막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관객들이 누가 진짜인지를 알아맞추는 게임까지 하게 된 것이다. 가수가 그저 자신의 노래가 아닌 다른 가수의 노래를 누가누가 잘 부르나의 수준을 넘어, 내가 내 노래를 부르는데 이게 진짜야, 아니야 의 수준까지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에 열광한다. 심지어 '누가 더 잘해'의 소리까지 나온다. 존재감을 건 서바이벌이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하나의 노래를 가지고, 가수와 가수가 아닌, 혹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서바이벌을 벌이다 못해, 그 판정을 하는 <퍼펙트 싱어 VS>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30일 첫 방송을 탄 <퍼펙트 싱어 VS>에서 92점을 넘은 점수로 1위를 한 성진환은 '이제까지 감성보컬인 줄 알았는데 기계적인 보컬임을 깨달았다'는 촌철살인의 소감을 내보인다. 처음, 16세 여중생과 손승연이 대결을 할 때만 해도 그저 노래를 잘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박완규도, 이정도, 그리고 가요를 자신 분야의 창법으로 해석한 성악가 서정학, 국악인 고금성의 절창도 소용없이 오로지 기계의 판독에 맞춘 정확한 창법만이 유효한 결과는, 제 아무리 박완규가 기계의 판정으로 가름할 수 없는 개성있는 노래라고 면피를 하려고 해도, 이 시대의 가수란? 음악이란? 질문을 허무하게 던져보게 만든다. 

자신의 노래를 제껴두고 남의 노래를 그럴듯하게 부르고, 그걸 관객들의 판정에 맡기는 것도 모자라, 이젠 그걸 기계의 판독에 맡기게 되는 상황, 이게 2013년 대한민국 가요계의 자화상이다. 


by meditator 2013. 8. 3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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