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기리에 방송되는 <응답하라 1988>, 그 드라마 속 성동일의 장녀 성보라는 운동권 여학생으로 등장한다. 그 당시 성보라같은 운동권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읽는 책 중에 하나는 바로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었다. 대학 입학 초기 교양 강의에서도 종종 권장되었던 이 책에서는 중간자로서의 지식인의 정체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어떤 분야의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이 곧 지식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 사회의 지배 체제를 이끌어 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존재인 전문가들이 지배 계급과 비 지배계급의 중간자로서의 위치에서 지배 계급 유지의 '집 지키는 개'가 되는 대신, '자신의 권한 밖에', '자신과 무관한 일에 참여하는 귀찮은 존재'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존재로서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7,80년대의 대학생들은 '선택받은 자'로서의 지식인의 사명과 고뇌를 대학 입학의'세례'로 받아들이는 것을 시대적 숙명으로 여겼었다. 그래서 88년의 시대상을 그려내는 대중적 드라마에서 대학생 성보라는 고뇌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운동권 학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자신의 사상적 계급의 선택 기로에 놓인, 그래서 고뇌해야 했던 지식인은 자본주의 발전, 그리고 신자본주의의 발현과 더불어, 지배 계급 체제 속으로 '흡입'된다. 한때 운동을 했던 선배들이 대기업을 다니며 자연스레 소시민이 되어갔고, 그 다음에는 imf와 무한 경쟁의 사회 속에서 각자도생의 삶에 침몰되었다. 그 과정에서 '재벌과 관료, 법조의 커넥션'이 대한민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입시 전쟁'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지식인으로서의 고민 이전에 불경기 안에서 그 커넥션 속에서 어떻게든 한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다시 '취업 전쟁'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청년 실업률이 장년의 실업률을 앞서는 나라에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사치가 되어가는 것이다. 



2015년의 지식인은? 내부자 혹은 송곳이 되어 
그렇게 모두가 저 마다의 밥그릇조차 찾아먹기 버겁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2015년에 등장한 영화와 드라마들은 저 오래된 지식인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물론, 2015년의 그들을 '지식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바로 '재벌과 관료, 법조' 커넥션 속의 '내부자들'로, 혹은 참을 수 없는 '송곳'같은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11월 29일 12부작으로 종영한 jtbc의 <송곳>, 이 드라마의 주인공 이수인은 프랑스계 유통 대기업 푸르미의 과장이다. 과장이라는 간부직인만큼, 그는 재벌 카르텔의 내부자이지만, 드라마 속 그는 '재벌'의 밥그릇을 지켜주는 대신, 정리해고를 당할 푸르미 직원들의 편에 선다. 드라마는 하지만, 그런 그를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중간자적 위치의 지식인'이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에 걸림돌같은 인간들, 삐죽 튀어나오는 송곳같은 인간들'이라며 '인간의 존재론'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하지만 드라마 속 지현우가 분한 이수인의 송곳론은 샤르트르의 '지식인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고, '앞잡이가 되는 대신' 자신과 무관한 일에 참견하려 드는 귀찮은 존재를 드라마는 '송곳'인간형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 자신의 송곳같은 심성을 어쩌지 못해 결국 노조를 만드는데 앞장서는 이수인이 그 이전 세대의 운동권으로 고문 휴유증에 시달리는 노동상담소장 구고신과 연대하는 것은, 세대와 세대를 이은 지식인의 만남으로 상징적이다. 

그렇게 내부자들로 피지배계급 속으로 들어간 이수인이 드라마 <송곳>에 있었다면 영화 내부자들은 대놓고 '내부자들'의 각성을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을 확고하게 쥐고 흔드는 재벌-언론-법조의 커넥션 속에서, 결국 그 커넥션을 궤멸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내부자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래서 영화 속 손을 잃은 이병헌이 분한 안상구는 조국일보 주필 이강희(백윤식 분)의 똘마니였고, 조폭 이병헌 대신 내부 고발의 총대를 멘 우장훈(조승우 분)은 검찰 카르텔의 또 다른 똘마니였다. 내부자로 입신양명 해보려 했던 그들이, '토사구팽' 당한 후 자신들이 들었던 칼의 향방을 바꾸어 카르텔의 궤멸에 나선 '한바탕 신명난 환타지 영웅극이가 바로 영화 <내부자들>인 것이다. 

드라마 <송곳>이 '송곳같은 인간형'으로서 지배 계급의 카르텔에 동조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객관자로서의 지식인의 고뇌에 집중했다면, 영화 <내부자들>은 그 카르텔의 '개로서 내부자들의 숙명에 대한 서사에 집중한다. 



<애인있어요>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최진언의 각성과 도해강의 회개
그런가 하면 이혼한 남녀의 다시 만난 사랑 이야기로 화제가 되고 있는 <애인있어요>에는 또 다른 지식인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이 드라마에서 드러난 이야기의 주된 줄기는 4년전 불륜으로 아내를 저버렸던 남자 최진언(지진희 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잊지 못하고 기억을 잃은 아내 도해강(김현주 분)을 찾아 다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순애보이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타고 저변에 흐르는 이야기의 본질은 드러난 사랑 이야기와 다르다. 

제약 회사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부도덕한 사업 방식에 불편해 하며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최진언, 아내를 치워달라며 아버지에게 매달린 대신 그는 회사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맞추어 불륜녀와 유학을 마친 그는 아버지 회사의 중역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아내 도해강을 만나면서, 그는 아버지 회사의 변호사로 온갖 궂은 일 처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의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부도덕한 제약 회사의 '헬게이트'로 들어선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벌어진 부작용을 덮기 위해 살해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도덕한 경영을 알게 된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거기에 뛰어든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결백하다 외면했던 그 진실'에 뛰어든 최진언의 각성과, 백석이란 인물을 만나 정의로운 변호사로 거듭난 도해강이 '천년 제약'의 개로 살았던 지난 날을 회개 과정이 이제 후반부에 들어선 <애인있어요>의 실질적 이야기이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정의를 논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은 이제는 굳건하게 자리잡은 대한민국의 재벌-언론-법조-관료의 카르텔의 내부자들로부터 시작된다. <복면 검사>의 의로운 주인공은 검사였고, 남은 생의 마지막을 정의롭게 펼친 <펀치>의 박정환 역시 검사였다. 이것은 곧,  7,80년대의 지식인이 변화된 사회 체제 속에서 편입된 자신의 존재로부터의 각성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강고한 체제 속 지식인의 존재론의 새로운 모색이기도 하다. 또 한편에서는 지배 체제가 강고해 지는 반명 그에 저항하는 대체 세력의 무기력이 '내부자'나 '내부 고발'의 소극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내부자'나 '송곳'으로 돌출한 영화나 드라마의 지식인의 선택은 '환타지'적인 영웅서사로 마무리되어 가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12. 7. 16:26

측근이 소속된 집단의 리더는 소통은 커녕,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며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문제가 되었다 한다. ㅇㅇㅇ를 제대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이 리더는 여전히 군대에 있는 듯, 군대 시절의 경험을 고스란히 사회로 확장시켜 주변에 물의를 끼치는 중이다. 남자들이 모이면 군대 다녀온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이유는, 그들의 인생에서 그 군대가 그만큼 자신의 전인생사의 경험을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고 이질적인, 그리고 그 여파가 이후의 삶에 지대하게 미친 충격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대라는 건, 이른바 '조직 사회'의 가장 첨예화된 형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 하고, 그 반대편의 누군가는 인생에서 가장 무용한 시간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그 남자들의 전형적 후일담 '군대' 이야기가 육사 출신이 송곳의 이수인(지현우 분)의 이야기에 종종 등장한다. 성공하는 직업 군인이 희망이었던 이수인은 하지만, 결국 직업 군인이 되지 못했다. '군대'라는 조직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할 거 같았던 그는, 결국 '군대'라는 조직 문화를 견녀내지 못했다. 그놈의 '송곳'같은 성정 때문에. 




하지만 그가 사회 생활을 하는 구비구비마다 그의 군대에서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는' 예방 주사로 작동한다. 그 누군가가 '군대'에서의 경험을 사회로 확장하여 '군대식' 행태를 보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반면, 이수인에게 '군대'는 철저한 삶의 복기 대상이다. 그가 프랑스 인 점장의 총애를 받는 과장에서 직원들의 부당해고에 맞설 수 밖에 없는 송곳같은 인물이 되는 그 순간부터,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드라마는 그가 겪었던 '군대'의 경험을 들먹인다. 



군대 이야기, 노조에서 인간으로 넘어가는 매개제
그렇게 시작된 군대 이야기는 11월 15일 8회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회사가 노조원들의 월급을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지불하자, 많은 노조원들이 노조를 탈퇴한다. 그러자 남은 노조원들과 탈퇴한 노조원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그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남은 노조원들은 탈퇴한 노조원들을 배신자라 지목하며 그들이 돌아와도 받아주지 않아야 한다는 둥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다. 구고인이 나서서 이렇게 같은 편끼리 싸우는 걸 바로 회사가 원하는 거라 설득하지만 그의 말조차 잔뜩 화가 난 노조원들에게는 별 무 소용이 없다. 바로 그 순간 이수인의 군대 이야기가 등장한다. 십여일의 거친 훈련 과정, 전우애로 똘똘 뭉칠 것 같은 그들은 다음 순간 이수인이 짊어졌던 10kg의 화기를 모른 척 할 정도로 자신이 견뎌야 할 현실의 무게에 짙눌려 있다. 심지어 이수인조차 조장의 일어나라는 소리를 모른 척 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 하나쯤이야 제일 먼저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눈을 붙일 동안, 그 시간 동안 조장은 목이 쉬어 터지도록 동기들이 일어날 것을 독려했다. 

그런 이수인의 군대 이야기는 이제 푸르미 노동조합 결성 과정에서 맞부닥친 현실의 문제로 다시 되돌아 온다. 그리고 이수인은 회사의 부당한 월급 강등에, 그리고 동료 노조원들의 후퇴에 화가 나고 좌절한 노조원들에게 말한다. 여러분들도 그만하셔도 된다고, 각자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짐의 무게만 짊어지면 된다고. 아마도 이수인의 그 말이, 그의 군대 경험이 보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풀어졌다면, 그럴 듯은 했지만, 그만큼 감동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군대 시절에 대한 복기는, 그저 현재의 노조 상황을 넘어, 인간의 삶에 짙눌려진 무게에 대한 촌철살인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송곳>은 푸르미 노동 조합 결성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전개를 하면서 이수인이라는 인물이 가진 경험의 전사를 동시에 풀어낸다. 그럼으로써, 이런 상황이 그저 노동조합 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삶의 요소요소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보편적 상황임을 설득해 낸다. 즉,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그저 푸르미란 특수한 조건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굳이 노동조합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며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 벌어질 수 있는 동일한 문제라는 것을 드라마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푸르미란 작업장에서 일을 하게된 사람들에게는 노동조합이란 형태로 다가왔을 뿐, 그 상황이 군대로 바뀌면 군대에서, 혹은 학교로 바뀌면 학교에서 우리들은 언제나 동일한 문제의 상황을 맞부닦치게 되고, 그 상황에서 똑같은 갈등과 결정의 기로에 설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드라마는 남자들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 '군대'를 구구절절히 들먹이고 있다. 그 누군가는 군대를 통해 그저 사람들을 휘두르고 부려먹는 방법을 배웠다면, 이수인은 그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을 '인간'의 민낯에 대한 충실한 선험적 학습을 완료했다. 누군가에겐 트라우마 된 경험이, 이제 이수인에게는 그를 쉽게 흔들거나 좌절치 않게 만들 단단한 토양이 된 것이다. 그렇게 이수인의 군대처럼, <송곳>도 마찬가지다. 그저 푸르미란 가상의 마트에서 사람들이 노조를 만드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노조에 관심이 없으면 모지 않아도 될 이야기가 아니다. <미생>이 환타지로 일관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송곳>은 일하는 곳에서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처절한 민낯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진짜 미생들의 이야기이다. 갑이면 갑, 갑중에 을은 을대로, 그리고 을들 속에서도 저마다 서로 다른 입장들의 얼굴을, 하지만, 그래서 보기 싫고,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치장하지 않은 그 민낯에서, 이수인이 군대 생활을 통해 인간에 대한 단단한 배움을 쌓았듯이, 쉽게 기대하거나 허물어 지지 않는 인간사를 배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대어 살아가야 하고,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길어올리게 된다. 그래서 <송곳>은 그저 노동조합 만드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말해주지 않는 진국의 '인간학'으로서 2015년의 우리가 보아야 할 드라마 된다. 
by meditator 2015. 11. 16. 14:54

사랑과 복수가 지천에 늘어져 있는 tv드라마에서 생소한 화법의 두 드라마가 있다. 바로 sbs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와, jtbc금토 드라마 <송곳>이 그것이다. 고려 말 권력 투쟁을 다루는 드라마라 생각하며 리모컨을 고정한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혁명'이 등장하고,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발 내딛고 마는 그런 인간의 이야기 <송곳>은 섬세하게 노동조합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고려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혁명과, 2003년년 까르푸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역설적으로 드라마 속 현실은 2015년의 현실을 복기한다. 그래서, 드라마 속 '혁명'은 과거의 혁명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요, 드라마 속 노동조합으로의 결집은 현실 속 우리의 단결을 촉구한다. 




'혁명 전야' <육룡이 나르샤>
왜 고려 말이었을까? 그것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답을 해준다. 백성들이 가진 것 30%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90%로 세율을 높이는 권력, 그것도 부족하여 백성들이 피땀으로 일군 황무지까지 자신의 힘을 동원하여 빼앗는 권력,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는 권력, 빼앗긴 자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나라, 가진 자들의 권한이 되어버린 나라, <육룡이 나르샤>는 말한다. 그건 더 이상 그 누군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고려 말에 시청자들은 묘한 현실의 기시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고려 말에 새로운 지켜야 할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혁명'을 외치는 일군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드라마는 본원 정도전(김명민 분)을 그 핵심에 두고, 그를 중심으로 이성계(천호진 분), 이방원(유아인 분), 땅새(변요한 분), 연(정유미 분), 분이(신세경 분), 무휼(윤균상 분) 등의 여섯 용을 등장시켜, 고려에서 조선이라는 역성 혁명의 과정을 그려낸다. 

조선의 시조 이성계의 성업을 기리기 위해 정도전이 지었다는 '용비어천가'는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건국까지 이성계의 선조들의 업적을 전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중 첫 구절, '해동의 육룡이 나르시어, 그 행동하는 일마다 하늘이 내리신 복이시니'에서 유래된 <육룡이 나르샤>는 이성계의 선조 육룡 대신, 하잘것없는 백성들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는 곧,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그저 왕씨 왕조에서 이씨 왕조로의 역성 혁명이라는 왕조의 변화가 아니라, 고려 말 그 억압의 구조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민중'의 대변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상징적으로 '용'으로 승화시켜, 조선의 건국이 바로 이런 '민중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드라마는 그리고자 한다. 그에 따라 드라마는 장황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구구절절 땅새와 연희, 그리고 분이와 무휼의 사연과 역할을 부여하기에 고심한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정도전과 이성계, 이방원의 대업이 아니라, 바로 고려 말 민중의 참을 수 없었던 저항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참을 수 없음과, 저항 의지는 곧 견디기 힘든 우리의 현실로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더구나 이방원을 비롯하여 분이, 무휼 등이 대부분 젊은 연기자인 이 드라마의 육룡들의 활약은 결국 2015년 젊은이들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한다. 



2015 당신을 위한 노동조합 안내서, <송곳>
시작은 이수인(지현우 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 스스로도 그 다음에 어떤 결과가 올 지 뻔히 알면서도 불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듯 그렇게 삶의 고달픈 행보를 밟으며 살아왔던 이수인의 지난 여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 육사생도 시절, 늘 선택의 고민이 이수인을 휩싸였던 순간, 이수인은 결국 송곳같은 결정을 내리지만, 동시에 그의 결정은 그걸 지켜본 시청자들에게 지금 혹은 지나간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이수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푸르미 마트의 노조원들과, 구고신의 노동상담소에 있는 문소진(김가은 분)으로 확산되어 가는 송곳들의 행렬, 그들이 선택한 노동조합의 여정은, 또 다른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진다. 드라마는 매 상황마다, 섣부른 정답의 행보를 가는 대신, 의문부호와, 물음표를 던진다.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은 함께 모여 싸움을 하려고 하는 푸르미 식구들에게 지표를 제시해 주지만, 동시에 그들이 얼싸안고 쉽게 들썩일때 마다 찬물을 뿌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상은 강고하고, 세상의 편견은 그보다 더 굳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구고신의 찬물 덕분에, 역설적으로 <송곳>은 쉬이 희망에 중독되지 않도록 한다. 노동조합 만들기의 여정이 어설프게 강령하되지도 않는다. 드라마의 제목, 송곳처럼, 어쩌지 못해 벼랑인 줄 알면서도 선택하는 과정처럼, 서로가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기 위해 결국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최후의 선택지로서, 그리고 단단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2003년 까르푸 노동조합 결성 과정을 다루지만, 드라마에서 시작된 정규직 해고와 비정규직 확산의 현실이 2015년의 암울한 현실에 잇닿아 있기에, 오히려 <송곳>의 2003년은 현실적이다. 또한, 이제는 굴뚝에 올라가서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 열악한 현실이, 더더욱 구고신의 찬물 한 바가지가, 드라마가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자기번민이, 드라마 속 대안을 수긍하게 만든다. 세상에 세뇌당하고, 현실에 지레 무릎끓은 시청자들은 그래서 <송곳>을 보며, 역설적으로 정답을 찾아간다. 

by meditator 2015. 11. 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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