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보지 말자.' 
명절 덕담이랄까? 그래도 명절인데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지 하던 것이 웬만하면 보지 말자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부모님이 먼저 내려오지 말라고 하신단다. '아는 동생'은 벌써 햇수로만 2년 째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고 한다. 직계 가족이 이 정도니 그래도 명절 때나 되어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한 다리 건너 사촌, 친척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본의 아니게 '이산 가족'을 만들어 버린 '코로나 팬데믹', 안그래도 적조해져가는 가족 관계의 '소원함'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이렇게 만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가는 시절에도 서로가 가족으로서 '동질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지난 2월 4일 개봉한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를 본다면 지금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묶어주는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함께 할 수 없어도 '가족', 혹은 '고향'을 떠올리면 동시에 떠올려지는 건 '음식'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외려 어릴 때는 참 먹기 싫었던 음식이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이 글을 쓰는 기자가 어릴 적만 해도 고기를 넣은 미역국은 생일날이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렇지 않고 평상시 미역국은 그저 국간장을 푼 물에 미역 건더기를 넣은 멀건 국이었다. 그래서 고기를 넣은 미역국과 구분해서 '소미역국'이라 불렸었다. 어렸을 때는 그 물같은 국이 참 싫었는데 이제는 가끔 그립다. 그런 식이다. 멸치 다싯물에 밀가루만 뚝뚝 떼어넣은 수제비라던가. 쇠젓가락에 끼워 밥 한 공기를 비워야 했던  땅 속에서 꺼낸 겨울철 알타리 무 김치라던가 지나간 시절은 그렇게 그 시절에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들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식구(食口)'는 말 그대로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게 '밥상'을 함께 받던 '식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이상 한 집에 살지도, 밥상을 함께 받지도 않는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코로나는 명절 때만이라도 '식구'가 되었던 연례 행사마저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식구'가 더는 '식구'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이제 더는 '밥상'을 함께 하지 못해도 함께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여전히 '식구'라고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말한다. 

사라와 함께 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더는 '밥상'을 함께 할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는 '이별'로 말문을 연다. 바로 영화 제목 속 그 '사라'와의 이별이다. 영국 런던의 노팅힐 거리 그곳을 향해 사라의 자전거는 질주한다. 친구 이사벨라(셸리 콘 분)와 함께 그 거리의 한 상점에서 두 사람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디저트 베이커리 까페'를 열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라는 꿈에 그리던 자신의 가게에 도착하지 못한다. 주인을 잃은 가게, 사라가 셰프였기에 이사벨라는 혼자서 가게를 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채 집세만 날리던 가게를 더는 유지할 수 없었던 이사벨라는 다른 주인을 알아보려고 한다. 그때 엄마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해 자신이 다니던 무용학교조차 포기해버린 딸 클라리사(새넌 타벳 분)가 나선다. 하지만 다시 가게를 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자금, 클라리사는 오랫동안 엄마랑 '의절'하다시피 했던 외할머니 미미(셀리아 임리 분)를 찾는다. 한때는 공중곡예사로 전세계 공연을 다니던 미미, 자신을 플라잉 요가로 이끄는 손녀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수표책을 연다. 그리고 사라, 이사벨라와 함께 요리 학교를 다녔던 매튜(루퍼트 펜리 존스 분)가 합류한다. 

그렇게 '사라'는 세상에 없지만 사라를 사랑하던 이들이 사라를 기억하며 한 자리에 모였다. 사라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사라를 대신하여, 사라가 하고 싶던 곳에서, 사라를 사랑하던 이들이 시작한다. 그래서 가게 이름이 '러브 사라'이다. 저마다 사라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 미미에게 '러브 사라'는 각별한 의미다. 죽기 전 딸이 찾아와 디저트 베이커리 까페를 연다며 도움을 청했었다. 하지만 그때 사라의 엄마 미미는 거절했었다. 자신을 찾아온 클라리사에게 대뜸 '돈 때문이냐?'고 선을 그은 것처럼 사라에게도 그랬었다.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는 엄마 미미에게 사라는 돈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 서운함을 토로했었다.

그리고 엄마와 딸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코로나라던가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서로에 대한 서운함으로 두 사람은 멀어졌다. 그리고 뒤늦게 엄마인 미미가 딸 사라에게 엽서를 썼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라며, 하지만 그 엽서는 딸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딸이 자신의 가게에 도착하지 못한 그 날 쓴 엽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 미미는 보내지 못한 엽서 대신, 그때 들어주지 못한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녀의 수표 책은 얇아져 가지만 대신 딸이 그리던 까페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영업'은 별개였나 보다. 가까운 거리에 이미 까페가 여러 개인 거리에 새로 문을 연 까페는 첫 날부터 파리를 날렸다. 매튜의 매혹적인 디저트들만으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했다. 새로 개업했다며 인심쓰듯 나누어준 마카롱을 낯설어했다.  답답한 마음에 거리를 나선 할머니 미미의 눈에 노팅힐 거리를 지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민자들이 많은 영국, 그 중에서도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인 거리, 그곳에 자리잡은 '러브 사라', 이 까페가 잘 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일까?


 

고향이 된 까페 
할머니 미미가 딸 사라가 가장 좋아하던 책,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떠올렸다. '새로운 것을 원하거든 여행을 하라',는 책 속의 명대사처럼 사라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그런 사라처럼 '러브 사라'는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상징과도 같은 열기구를 까페 앞에 단다. 그리고 80일 간의 세계 여행 대신, 세계 각국의 디저트를 만들어 낸다. 

딸기 프레지에는 몰라도 , '크링글'을 기억하는 라트비아 출신의 택배 기사를 위한 '크링글'처럼 이민온 사람들이 원하는 고향의 디저트를 만들어 주기로 한다. 까페에 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고향 디저트를 만들어 준다면 꼭 다시 들러 그것을 먹겠다고 하고 그렇게 한다. 호주식 케이크, '레밍턴', 리스본에서 온 모자를 위한 '카넬스네일. 터키의 바클라바, 아랍의 전통 케이크 바스부사, 이스라엘의 오렌지 세몰리나 케이크 , 그리고 일본에서 온 여성이 부탁한 말차 밀 크레이크까지 까페의 디저트에 세계가 모였다.  까페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고향'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이렇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방식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고향을 기억하는 '디저트'로 잇는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시절에 이 영화는 함께 할 수 없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전해준다. 지금 여기서 함께 나눌 수는 없지만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함께 할 수 없다고 해서 함께 나누었던 시간,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우리가 그 시간과 마음을 어떻게 소중하게 이어가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다. 다가올 명절, 같은 곳에서 한데 어울려 밥상을 받을 수는 없지만 각자의 공간에서 이 영화 한 편을 통해 서로의 소중함을 더욱 진하게 나눌 수 있다면, 함께 나누었던 음식을 서로를 떠올리며 먹는다면 함께 할 수 없어도 함께 하는 따뜻한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by meditator 2021. 2. 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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