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가 넘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리고 시청률을 뛰어넘는 박정환(김래원 분) 검사의 마지막 6개월을 신드롬으로 만들며, 박경수 작가의 권력 3부작은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로써, <추적자>을 통해 정치 권력, 그리고 <황금의 제국>을 통해 재벌의 권력, 마지막 <펀치>를 통해 검찰의 권력을 조명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부패한 권력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리며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을 냉엄하게 그려내었다. 이렇게 현실의 잔혹한 이면을 그려내었던 <펀치>를 보며, 그 권력의 귀추에 숨죽이던 시청자들은 <펀치>의 종영 이후 어떤 선택으로 방향을 틀었을까? <펀치> 종영 이후 첫 주에 제일 먼저 미소을 지은 것은 그간 꾸준히 <펀치>를 추적하던 <빛나거나 미치거나>였다.

 

 

아쉽게도 단점이 돋보이는 후발 주자들; <풍문으로 들었소>, <블러드>

<펀치>을 선보였던 sbs는 후속작으로 권력의 비리에 이어, 상류 사회 갑들의 부조리한 삶을 다룬 <풍문으로 들었소>을 선보였다. 장르 상으로는 전혀 다르지만, 우리 사회 '갑'들의 이면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작품이다. 이미 <아내의 자격>, <밀회>에 이어 jtbc를 통해 상류층의 부조리를 형상화시켰던 정성주, 안판석 콤비가 공중파로 진입하며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 경햠을 연장, 발전시켰다며 밝히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안판석 pd 특유의 고상한 상류층의 분위기를 한껏 드러낸 미쟝센이, 이번에는 너무 힘을 줬는지, 뜻밖에도 어둡고 칙칙하다는 반응에 부딪치며 정성주, 안판석 월드에 시청자가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영화<표적>을 통해 가장 악랄한 악역의 면모를 보인 것과 달리, tv에서는 언제나 좋은 이미지로 등장했던 유준상의 한정호 연기나, 역시나 선한 이미지를 유지해왔던 유호적의 최연희 연기 역시 아직은 낯설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또한 당찬 여고생 서봄 역의 고아성이 그 누구보다 자연스런 연기를 선보인데 반해, 싸이코패스로 익숙한 이준의 어리버리한 고딩 연기는 연기면에서나, 캐릭터의 개연성 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형편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에 비해 한 주를 먼저 선보인 <블러드>의 경우는 더 쉽지 않은 처지에 봉착해 있다.

케이블 작품 <뱀파이어 검사>나 미드를 통해 이미 익숙해진 '뱀파이어'라는 캐릭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중파 미니시리즈라는 대중적 장르로 안착하기에는 아직 생경한데다, 그 뱀파이어를 연기하는 남주인공 안재현의 연기나, 여주인공 구혜선의 연기마저 시청자들이 적응하기에는 생경하니,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게다가 전작 <굿 닥터>를 통해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의사라는 직업과 매치시켜 '인간 승리'의 미담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던 것과 달리, 뱀파이어와 의사의 만남은 어쩐지 갓을 쓰고 양복을 입은 듯 아직은 어색한 만남의 분위기를 일소해 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무난한 스토리, 거기에 가속 패달은 배우들의 호연; <빛나거나 미치거나>

전작의 성공에 힘입어 야심차게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 정성주, 안판석 콤비와 박재범 작가가 전작의 영광이 무색하게, 전작의 정서조차 아직 충분히 펼쳐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꾸준히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던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뜻밖에도 <펀치>의 빈 자리를 여유있게 차지한다. (13회 13.1% 닐슨 )

 

고려 광종을 주인공으로 삼은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경우,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마저도 외면할 수 있는 왕실 권력 쟁탈전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속에서 피어나는 지고지순한 남녀의 순애보를 그려내는 전형적인 사극으로 시청자들을 편안하게 맞아들인다.

 

또한 한껏 망가지는 코믹과, 운명적인 삶의 비극적 정서가 그 누구하나 어색함이 없는 호연을 통해 자연스레 전달되는 것이 무엇보다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장점이라 할 것이다. 이미 <운명처럼 널 사랑해>를 통해 <추노>의 대길이 같은 연기를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특화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장혁이, 다시 한번 그 캐릭터를 사극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시킴으로써 언제나 한껏 진지한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만이 아니라,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코믹 캐릭터까지 영역을 넓힌다. 예의 대길이 같은 웃음과 표정의 오글거림을 극복하고 나면, 어느 장면에서 성실한 장혁과, 그런 장혁과의 호흡에서 딸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는 오연서의 호연에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제 아무리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와, pd의 작품이라도, 결국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그것을 풀어가는 배우들의 호연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 잡기는 함든 것이다. 거의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반 토막에 불과한 나머지 두 작품들의 시청률이 버거워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첫 번째 대결이 마무리됐을 뿐이다. 30부작 <풍문으로 들었소>는 이제 막 첫 단추를 풀어 헤쳤을 뿐이고, 여전히 단 한 장면에서도 정성주 작가의 시선은 예리하고, 안판석 pd의 구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블러드> 역시 박재범 작가의 장기인 병원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풀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두 작품들이 부지런히 선방하고 있는 <빛나거나 미치거나>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우선 낯선 주인공들의 연기부터 친숙하게 만들 해법을 찾아야 할 듯하니, 갈 길이 만만치 않다.

by meditator 2015. 2. 25. 05:47

2014년 8월에 방영되었던 <야경꾼 일지>의 역사적 배경은 조선시대였다. 하지만 등장한 임금은, 해종, 실제 조선의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왕이었다. 왜 해종이었을까? 드라마 <야경꾼 일지>는 말이 사극이지, 왕실을 위협하는 귀신과, 그에 맞서 싸우는 황당무개한 이야기를 전개해야 했기에, 실제 조선에 실존했던 왕을 등장시킬 수 없었던 딜레마를, 해종이라는 가상의 왕과 그의 아들들을 통해 풀어나가고자 하였다. 드라마는 귀신이야기라는 환타지를 실존하지 않은 왕을 통해 풀어냄으로써 빠질 수 있는 역사적 함정을 피해가고자 하였으나, 방영되는 내내 사극이라기엔 정체 불명의 이야기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해를 바꿔 2015년 1월 19일, 다시 월화 드라마로 또 한 편의 사극이 등장하였다. 바로 현고운 작가의 <빛나거나 미치거나>가 그것이다.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고려 태조 왕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도,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그의 네번 째 아들 왕소(장혁 분), 사촌 동생 왕식렴(이덕화 분) 등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첫 회를 연 드라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실제 고려 역사에서 고려의 네 번째 왕이 되어, 왕실을 위협하는 호족들을 정리하고, 고려의 기틀을 세운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전혀 다른 역사적 상상력을 펼친다. 태조 왕건의 네번 째 아들로 태어난 그였지만 (역사적으로는 세번 째 아들로 추측된다), 왕실에 피바람을 몰고 올 별자리를 가지고 태어난 덕분에 8살 때 궁궐에서 쫓겨나 금강산에서 홀로 자라난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빛나거나 미치거나 리뷰> 이 악문 장혁, “이제 와서 날 부른 이유는 뭡니까” 이미지-1

 

하지만 실제의 광종은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 역시 일개 호족에 불과했던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주변 호족들의 힘을 한데 모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이른바 '결혼 정책'을 통해 여러 호족과 인척 관계를 형성하며 고려라는 나라를 구성했다. 하지만, 막상 나라를 이룩하기는 했지만, 그가 그 과정에서 편의적으로 맺은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맞아들이 29명의 부인과 거기서 태어난 34명의 자식들이, 왕건 이후의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벌일 수 밖에 없는 비극을 잉태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고려 초는, 왕위 쟁탈을 둘러싼 왕자의 난이자, 그 왕자들의 후견인인 호족들의 전쟁이었다. 그런 상황을 종식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킨 이가, 바로 다름아닌 광종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광종이 고려 초의 불안한 정국을 정리하고 왕으로 등극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바로 그의 외가, 당시 호족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충주를 대표한 유씨 집안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전혀 다른 궤도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광종이란 인물을 입지전적인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별자리라는 운명을 끌어들여 어린 시절 궁으로 부터 내처지는 인물로 그려내었을 뿐만 아니라, 외가의 절대적 후원에 힘입어 왕이 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성인이 되어 아버지 왕건의 부름을 받고, 궁으로 돌아온 그를 본 그의 모친의 반응은 다짜고짜 아들의 뺨을 때리며 아비의 목숨까지도 잡아먹으려고 궁궐로 돌아왔냐는 것이었다.

 

더구나, 어린 시절 궁에서 버림을 받아, 아비를 끝끝내 황제라 부르던 왕소, (후의 광종)은 왕건의 처소를 위협하는 자객들이 들이닥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비의 목숨을 구하는데 앞장서고, 심지어 그 자객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의 오해도 풀지 않은 채 다짜고짜 아비의 목숨을 구하려는 아들이라니, 제 아무리, 피가 땡기고, '부자유친'이 우선인 고대 세계라 하더라도, 왕소를 신율을 만나게 하기 위한 장치로는 개연성이 너무 떨어진다. 더구나, 굳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광종 대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까지, 끌어들인 상상력이 바다 건너 중국으로 가, 신율이라는 발해의 또 다른 버림받은 공주를 만나기 위해서라니, 사극 속 인물의 위상으로 너무 떨어지지 않는가.

 

역사적 상상력이라기엔 광종의 캐릭터가 허무맹랑함은 둘째치고, 최근 mbc사극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탈 역사적 장치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해를 품은 달>이라는 가상의 역사극에서, 등장하여 재미를 본, 점성학이 그 이후부터, 사극의 중요 장치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점쟁이들이, 등장인물, 그 중에서도 주인공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캐릭터로 등장한다. <야경꾼 일지>에서는 물론,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도 왕소의 운명은, 하늘의 뜻을 살필 줄 아는 지몽(김병욱 분)에 의해 달라진다. 하지만, 실제 고려는 불교 국가이다. 태조 왕건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불교적 교리에 따라 유언인 '훈요십조'를 남긴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의 재위 당시, 전통적 민속 신앙의 재례였던 '팔관회'마저 불교적 내용으로 개편하여 국가적 행사로 만든 이가 다름 아닌 태조 왕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태조 왕건은,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 편의적으로 점성학을 믿는 황제로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편의적인 사극의 장치들이, 단지 과거의 이야기란 이유만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을, 운명론적인 세계관으로 끌어들이고,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점성학'의 타당성을 논하기에 앞서, 매번 사극의 주요 동인을 운명론적 역사관으로 끌러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지점이다.

 

운명론적인 역사관만이 아니다. 고려 초의 의복에 대한 고증은 해봤는지 의심스러운 정체 불명의 복식에서 부터, 사극만 하면 익숙하게 등장하는, 두건을 둘러쓰고 궁궐의 담을 마구 질주하는 괴적의 무리들에, 중국하면 편하게 차용되는, 중국 무협 영화에서 익숙한 주점의 모습 등이 어느새 우리 사극의 클리셰가 되어가고 있는 지점도 아쉽다.

 

과연 이렇게 역사적 상상력이라기엔 왜곡에 가까운 역사적 인물을 애써 차용하면서 까지 첫 회를 선보인 <빛나거나 미치거나>가 과연, 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저 왕소와 신율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기 위해, 이 많은 역사적 장치들이 필요한 것이라면, 역사가 너무 소모적이지 않은가 우려가 된다.

by meditator 2015. 1. 20.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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