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카메라의 프레임을 통해 다시 피어난다. '오겡끼데스까'라는 절규가 하얀 설원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우리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겨져 있었을까? 얼마전 종영한 <구르미 그린 달빛>이 청춘 남녀의 사랑을 '엽록소'가 터져나오는 봄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 싱그러움이 한껏 돋보일 수 있었을까? 이렇게 드라마나 영화 속 계절은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중요한 배역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런데 드라마 속 계절에는 편애가 존재한다. 청춘의 봄이거나, 이별의 가을이거나, 혹은 겨울이거나, '삼복더위'의 그 무더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그리 흔치 않다.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라면 모를까? 그런데, 여름, 그것도 딴 곳도 아닌 경상분지에 위치한 무더운 안동이라니. 하지만 그 여름엔 무지 덥고, 겨울엔 무지 추운 안동이 <드라마 스페셜-국시집 여자>를 통해 싱그러운 여름의 도시로 거듭 태어났다. 




왜 하필 여름이었을까?
드라마 속 안동에서 만나게 된 두 남녀, 좀 더 정확하게 미진(전혜빈 분)의 국시집에 들렀다 첫 눈에 안동 촌구석 국시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도회적 분위기의 미진에게 시선을 빼앗겨 안동에 내려올 때마다 참새가 물레방앗간 드나들 듯 국시집을 들른 진우(박병은 분), 왜 하필 이들은 여름에 안동을 휩쓸고 다녔던 것일까?

두 사람은 국시집에 안동 국시를 먹으러왔다는 핑계로 드나드는 진우와, 그런 진우의 속이 빤히 보이는 추근거림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미진과의 안동댐을 비롯하여, 도산 서원 등 안동의 주요 명소를 연애인지, 동행인지 모를 행보로 돌아다닌다. 그 쨍쨍한 여름날에. 드라마는 '여름'의 햇빛을 화사한 화면에 잔뜩 머금고, 그 빛을 반사해 안동을 비춘다. 

그러나 그 쨍쨍한 햇빛 속의 두 남녀의 처지는 그리 밝지 못하다. 일단 유부남인 진우, 아내와 결혼 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없어, 병원을 가보자는 요청을 받는 처지의 그가, 죽은 선배의 원고 정리를 핑계로 주말마다 안동에 내려온다. 그런 그가 들른 국시집 미진도 도대체 이런 곳에서 국시집을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모호한 존재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미진의 이름도 모른 채, 진우의 정체도 모른 채 안동의 여름을 거닌다. 진우가 사준 양산까지 쓰고. 

여름은 '욕망'의 계절이다. 봄에 돋아난 새싹은 더운 여름의 열기를 업고 청록빛의 녹음을 발산한다. 온도가 올라가는 만큼 생명력을 그 속에서 저마다 한껏 자신을 열어제친다. 바로 그런 '욕망'의 계절에 미진과 진우는 안동이란 고장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모른 척 방기하며 관계를 지속시킨다. 

사랑이 끝난 후 비로소 솔직해진 욕망
하지만 사랑인 듯 불륜인 듯 관계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의 존재는 물을 막아선 안동댐의 수문처럼 닫혀있다. 진우가 들려준 선배 도근(김태우 분)의 소설 속 사랑하는 연인의 자살을 목격하고 후각을 상실한 조향사가 미진이듯이, 진우 역시 도근의 소설을 통해 드러나듯 한때 소설을 써보려했던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후각을 잃고 도시의 삶을 포기한 미진과 꿈을 덮은 채 도시에서 살던 진우가 여름의 안동에서 만나, 짖눌렀던 '욕망'의 한 자락을 슬며시 내보이기 시작한다. 병원에 가는 대신 조금 더 노력해보자는 아내의 말에 슬그머니 뒤돌아 눈을 감던 진우가 미진과의 모텔행을 꿈꾸고, 사랑하는 이를 눈앞에서 잃고 사랑을 포기했던 미진이 그와 같은 체취를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아슬아슬하던 욕망인지, 욕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관계는 유부남이었던 진우, 미진과 상규(오대환 분)의 관계를 오해한 진우를 통해 어긋나기 시작한다. 손 한번 잡지 못했던 그저 흘러오는 체취만으로도 아찔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오해와 어긋남이 드러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솔직해 진다. 



그리고 파탄 이후에 비로소 솔직해진 관계를 통해, 두 사람은 비로소 그동안 억눌러왔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찌질하게 미진 앞에 아내까지 데리고 와서 호기를 부리다 이혼까지 당해버린 진우는 이제 좀 어른이 되어보라는 아내의 말에 비로소 '소설'이라는 진짜 욕망을 마주설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후각을 잃었다는 이유로 안동까지 도망쳤던 미진 역시 진우와의 알듯모를 듯한 관계가 깨진 후 여전히 삶을 내던질 수 없는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인정한다. 

쨍쨍 내리쬐는 여름의 열기 속을 기꺼이 거닐던 두 사람은 그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여전한 자신들의 진짜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비록 이제 거리에서 마주쳐도 그저 스쳐지나갈 인연이 되었지만, 여름, 그리고 안동의 한 시절은 두 사람을 비로소 자신으로 드러내게 만든다. 

이렇게 여름이라는 계절과 안동이라는 아름다운 고장을 배경으로 탄생된 <국시집 여자>는 마치 고등학교 미전의 수채화같은 드라마다. 지난 여름의 열기를 망각하고, 여름의 안동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여름이, 그리고 안동이 이렇게 싱그러운 계절이었으며, 아름다운 고장이었는가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드라마는, 그저 계절과 고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배경과 그 배경 속의 이야기를 절묘한 상징의 고리를 통해 설명하고 드러내 줌으로써, 완성도 높은 단막극으로 탄생된다. 특히 빗속에서 안동댐 수문의 방류와, 그런 모습을 보며 삶의 욕구를 되찾는 미진이라던가, 여운을 잔뜩 남긴 두 사람의 재회 장면 등은 드라마 스페셜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단막극의 묘기를 한껏 풀어낸다. 물론 이런 배경과 서사의 절묘함을 더욱 맛깔나게 만든 건 분위기있는 전혜빈과 모호한 박병은의 안정감있는 조화이다. 
by meditator 2016. 11. 7. 17:09

꿈이 없다고 무시하고, 꿈이 있으면 허황하다고 빈정대고 날 보고 어쩌란 말이예요!'

<웃기는 여자> 극중 개그우먼을 꿈꾸는 고은희(문지인 분)가 자신의 개명을 받아주지 않는 판사 오정우(김지훈 분)를 향해 울부짖는다. 
그런데 왜 하필 개명일까? 오정우의 말대로 미모가 재능을 가려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재능이 미모를 가리는 것도 아닌, 데뷔 6년차 아직도 무대 '따까리'난 하는 개그우먼 고정희는, 자신의 평범함의 이유를 이름에서 찾는다. 그래서 고은희라는 아빠가 지어주신 평범한 이름대신 그 누가 봐도 웃겨서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 '고릴라'로 개명을 신청한다. 



이름을 바꿔 웃기려는 여자와, 머리를 심어 취직하려는 남자
<웃기는 여자>는 판사 오정우와 개그우먼 고은희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물이다. (4월 3일 방영) 하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건 데뷔 6년차 아직도 무대에 서지 못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개그우먼이 되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하는 고은희의 유예된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직도 무대에 서지 못한 채 무대 뒷바라지나 하는 그녀를 보고 엄마는 기술을 배우라고 한다. 같은 개그맨 선배는 6년이나 된 똥차 주제에 후배 앞길이나 막는다며 막말을 서슴치 않는다. 개명 신청 과정에서 만난 판사는, 자신의 공정한 '판단 능력'을 내세우며, 개그우먼이 되기엔 재능이 없어보인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한다. 
하지만 고은희는 개그가 좋다. 자신의 좁은 고시원 방에 붙인 거울에 챨리 채플린의 반쪽 자리 모자를 붙이고, 콧수염을 그려 넣고 늘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맞춰 보며, 10년 무명 후에 성공한 찰리 채플린을 롤모델로 삼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꿈은 현실에서 무능하다. 뚱뚱하고 못생긴 동료들은 이미 뜨거나, 드디어 무대에 설 기회를 얻지만, 생긴 것도 평범한 그녀에게 그런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택한 방식은, 이름이라도 웃기게, 얼굴이라도 웃기게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머리 심는날>의 주인공 변임범(최태환 분) 역시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취업 준비생이다.(3월 27일 방영) 매번 시험을 볼 때마다 떨어지는 그는 그 이유를 하루가 다르게 빠지는 머리에서 찾는다. 여친을 만날 때에도 모자를 푹 눌러쓰는 변인범은 그래서, 머리만 풍성하다면 자신의 취직 운도 풀릴거라 여기며, 머리를 심으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고시원 비도 밀린 채 여친네 고깃집에서 숯불 피우는 알바를 전전하는 그에겐 머리 심을 돈이 없다. 
변인범의 여친 역시 마찬가지다. 스튜어디스 시험을 볼 때마다 자꾸 떨어지는 그녀는 그 이유를 얼굴에서 찾는다. 그래서 이미 손을 댄 얼굴에 다시 한번 칼을 대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수술비, 돈이 없다. 
여친을 만날 때조차 모자를 벗지 못하는 변인범이 마땅치 않은 여친 봉화원(하은설 분)은 드디
어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이별을 통보한다. 금속 알레르기가 있는 손에 자국을 남기는 변인범이 준 은반지를 뽑아 가차없이 변인범에게 전달한다. 변인범은 이제 와 이별을 통보하는 여친이 야속하기만 하지만, 지금 그에게 당장 급한 건, 아침에 발견한 전단지에 나온 머리 이식 세일이다. 그렇게 서운한 듯 하면서도 각자의 이해관계가 앞서 일사천리로 이별을 해결하는 오래된 언인들의 머리 위로 돈이 날린다. 하늘에서 오만원 권 돈더미가 뿌려진 것이다. 잠시 전 이별로 인해 아웅다웅한 게 언젠가 싶게 변인범과 봉화원은 있는 힘껏 돈을 챙겨 도주, 모텔에 든다. 하지만 연인이었던 기억이 무색하게, 모텔에서도 그들을 사로잡는 건, 머리를 심을 수 있게 해주고, 다시 한번 성형 수술을 가능케 해주는 돈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움켜 쥔 돈은 각자의 삶을 업그레이드 해주기엔 부족하다. 그 부족한 돈을, 그리고 그 부족한 돈마저 날리게 생기자, 변인범은 예상치 못하게 목격한 봉화원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빌미로 삼아 협박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유예된 꿈을 향한 왜곡된 욕망을 풀어가는 서로 다른 방식
<웃기는 여자>의 고은희는 스물 여덟이다. 그리고 <머리 심는 날>의 변인범은 27살이다. 그들의 거주처는 모두 고시원이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 그리고 고시원비 조차 밀려 쫓겨나게 생긴 그 좁은 공간이 그들의 현실을 대변한다. 그들의 벌이는 변변치 않다. 변인범은 여친 봉화원네 집에서 숯불 피우는 알바를 하지만 현실은 머리를 심기는 커녕, 고시원 비 조차 빠듯하다. 동료 개그우먼 무대 뒷바라지를 하다, 그 마저도 포기한 채, 엄마가 말했던 기술을 배우고자 알바를 하는 고은희가 선택한 일은 그녀가 원하던 '고릴라' 탈을 뒤집어 쓴채 아이들에게 고릴라에 대해 알려주는 동물원 알바이다. 

이십대 후반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비정규직 알바를 전전하는 고은희와 변인범,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다. 취직을 하고 싶고, 개그우먼이 되고 싶은 그들이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변인범은 매번 취직 시험에 떨어지고, 고은희는 개그 심사에서 매번 고배를 마신다. 현실의 벽을 기어오르다 매번 미끌어 지고 마는 그들, 세상이 받아들여 주지 않는 자신들의 꿈, 그리고 노력에, 그들의 욕망은 왜곡되어져 간다. '노력을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들, '솔까 대한민국이 우리에게 해준 것이 뭐 있어!''라면 냉정한 현실 인식을 하는 그들이 택한 선택은 결국 '신의 한수' '머리 이식'과 '개명'이다. 머리 이식과 개명을 둘러싼 <웃기는 여자>와 <머리 심는 날>의 해프닝이 웃픈 것은, 강고한 현실에서 정당한 노력을 통해 성취를 할 수 없는 88만원 세대의 왜곡된 욕망을 '해학'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객관적 판단력'을 지녔다는 판사의 판단처럼, 그리고 길을 막고 물어보았던 사람들의 반응에서 처럼 멀쩡한 이름을 고릴라로 바꾼다던가, 머리를 심는다면 취직이 되겠다는 엉뚱한 시도는 그들이 유예된 욕망을 해결할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고릴라로 바꾼다고 해서, 머리를 심는다고 해서 극중 주인공들의 삶이 달라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보이니까. 하지만, 그 왜곡된 욕망을 위해 <웃기는 여자> 주인공 고은희는 개명을 해달라며 1인 시위를 하고, <머리 심는 날>의 변인범은 협박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에서 진짜 개그맨 시험장에 얼굴을 보여준 순간 '합격'을 하게 되었다는 후일담과, 실제 취직을 하기 위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형 수술조차 마다하지 않는 취업 전쟁의 현장담들이, 드라마 속 이야기들을 그저 해프닝처럼만 여기지 않도록 만든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을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왜곡된 욕망을 다룬 <웃기는 여자>와 <머리 심는 날>이 그 욕망의 발현을 풀어가는 방식은 다르다.
판사와 개그 우먼 지망생, 계급이 다른 두 남녀의 해피 엔딩을 위하여 <웃기는 여자>의 고은희는 다시 한번 개그 우먼이 되어 보기로 한다. 그런 그녀에게 판사인 오정우는 현실의 법적 판단으로는 개명을 허락할 수 없지만, 대신 아름다운 한자 뜻을 가진 예명 '고릴라'를 선사하는 절충주의를 택한다. 그와 함께 계급이 다르지만 인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사랑도 결실을 맺는다. 

물론 오래된 연인 변인범과 봉화원도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상황은 전혀 다르다. 기호가 빼돌린 아버지의 도박 자금을 가지고 머리를 심은 변인범, 드디어 당당하게 취직 시험장에 들어선다. 하지만 정작 그를 '멘붕'에 빠뜨린 것은 시험관들의 질문, 면접을 망치고 나온 그는 그제서야 현실에 발을 딛는다. 봉화원 역시 마찬가지다. 역시나 원하던 수술을 하고 당당하게 면접에 응한 그녀, 정작 그녀를 좌절에 빠뜨린 것은,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키가 작다'는 면접관들의 한 마디이다. 게다가 남의 돈으로 심은 머리 조차도 구제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돈을 주어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기호(장성범 분)를 구하는 바람에 애써 이식한 머리를 다시 잃게 만든고서야 변인범은 부질없는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난다. 

<웃기는 여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왜곡된 욕망조차, 꿈을 향한 소중한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끌어안는 반면에, 정작 현실은 당신들의 왜곡된 욕망과 다르다며 원칙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환타지로서 판사와의 사랑도, 꿈도 안고 다시 일어서는 <웃기는 여자>나, 머리를 심었지만 역시나 면접에서 실패하고, 머리를 잃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머리 심는 날>의 처절한 션실이나, 그 어느 것도 88만원 세대를 향한 정답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꿈이 없으면 없다고 무시되며, 꿈이 있으면 허황되다며 빈정거림을 당하는' 이래도 저래고 풀리기 힘든 현실에서 쉬이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게 단막극 한편을 통해 그들의 자화상을 먹먹하게 공감하는 시간을 가질 뿐이다.  


by meditator 2015. 4. 4. 12:59

비록 2015년의 괴작 소리를 듣긴 했지만 <아이언맨>을 재미있게 시청했다. 기괴한 설정과 달리 동화와도 같은 소박한 이야기가 좋았고, 그 소박함을 등에서 칼이 솟는 기괴함에 잘 버무려 전달한 연출이 좋았다. 등에서 돋는 칼이 안쓰럽고 애잔하게 느껴지게 만든데는 갖가지 장치를 동원하여 시청자들을 설득하기에 진력한 연출의 공이 크다.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단 하나의 장면에서, 원래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김용수 감독의 연출은, 단지 이것이 다수의 사람이 공유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특히나, 논두렁에서 두 연인을 따라가는 반딧불이 씬에서는 보는 시청자의 마음마저 정화가 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2015년 다시 찾아온 <드라마 스페셜-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가 무엇보다 반가웠던 이유는 바로 그 김용수 감독의 예술을 다시 한번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김용수의 예술
아니나 다를까, 단편이라기엔 아쉬울 정도의 구도가 잡힌 화면, 그리고 거기에 덧입혀진 극의 분위기를 점층시키기에 충분한 ost. 역시 김용수월드라 할만한 장면들이 2회 연작 <드라마 스페셜-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를 꽉 채운다. 10.26이 일어나던 해 발생한 대대적인 죄수들의 탈옥 사건은 김용수만의 예술을 펼치기에 손색없는 역시나 또 한번의 '기괴한 사건'이다.

2회로 이어진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의 1회는 과거로 돌아가, 그 소송차에 탔던, 혹은 탔을 것으로 예상된 죄수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된다. 36년이 지난 후 뜻밖에도 그 당시 형사였던 조성기(김영철 분)가 당시 죄수 중 한 명이었던 열쇠 수리공을 찾아와, 과거의 사건을 들춘다. 36년 동안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해 왔던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소송차에 탔던 죄수 중 3 명이 사라졌고, 그 3명의 죄수는 일제 말 일본 장교 무다구치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으러 갔다는 것이다. 이제 와 다시 열쇠 수리공을 찾은 이유는 이제는 노인이 된 열쇠 수리공이 당시 그들을 소송차에 타기 전에 빼돌린 하수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36년이 지나서야, 아니 36년이 되도록 그 사건에 집착한 조성기의 열쇠집 방문을 시작으로, 36년 전 교도소의 한 방에 모여든 유재만(이원종 분), 문종대(이원철 분), 방대식(이영훈 분)의 사연이 풀어진다. 조성기의 말대로 그들은 그 방에 함께 지냈던 장기수 우문술(김기천 분)의 숨겨진 금괴를 찾기 위해 탈출을 감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알고보니 금괴를 찾아나선 사람들은 그들이지만, 그들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열쇠 수리공을 보내는 등의 일을 꾸민 배후의 인물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탈주에 성공한 세 사람, 금괴에 눈이 먼 그들은 금괴를 독차지 할 요량으로 천상사를 배신한다. 하지만 월남에서 민간인을 12명이나 학살했다는 '악명'이 자자한 천상사는 문종대의 애인을 잔인하게 살해하며 그들의 흔적을 쫓아, 결국 그들을 따라잡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사람, 지금의 조성기 역시 그들을 찾고자 하지만 뜻밖에도 10.26이 발목에 잡힌다. 뒤숭숭한 정국에 탈주한 죄수들이라는 흉흉한 사건은 당시 사건 기록의 행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렇게 1부가 과거 죄수들의 탈주 사건의 경과를 자세하게 풀어갔다면, 2부는 36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36년 전과 똑같은 수법으로 다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눈을 땡글거리는 어색한 표정은 그 표정을 대신할 둔중한 몸짓과, 생각 외로 자연스러운 대사를 치는 '힙합 비둘기' 데프콘, 경찰대 수석 졸업이지만 오래 살기 위해 운동을 하느니, 좋아하는 도넛을 맘껏 먹으며 덜 살겠다는 소신을 가진 양구병 형사로 분해, 현재의 사건 속에서 과거 죄수들의 탈주 사건을 길어 올린다. 그리고, 36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 사건을 추적하는 조성기 형사까지 그 흔적을 찾아낸다. 

'반전'의 희생된 주제 의식
하지만 이렇게 그럴 듯하게 진행되던 현재 사건과 과거 사건이 만나게 되는 퍼즐은 2부 중반을 흐르면서 여러 사건이 나열된다. 극은 다시 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목사가 된 문종대에 이어 열쇠 수리공 유원술(박길수 분)이 살해되고, 노인이 된 방대식을 찾아간 양구병 병사와 동료는 함께 불 속에 갇히는 사건을 겪는다. 또한 금괴로 인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듯이 보이는 유재만 앞에 과거의 천상사가 등장하여 도끼를 휘둘러 댄다. 
결국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사건은 조성기의 집을 찾아간 양구병 형사가 조성기 형사가 천상사와 쌍둥이 형제였음을 확인하고, 불구자라던 천상사의 외모를 빼어닮은 그의 아들과 혈투를 벌이며 명확해진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형 조성기마저 죽이고 조성인 채 살아오며 과거의 탈주했던 3인을 쫓은 천상사의 보복극이었음 마지막 유재만과 조성기의 독대씬에서 드러난다. 

'반전에 반전'을 숨기고 있는 극들의 맹점 중 하나는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술래잡기 놀이의 묘미를 한껏 배가하기 위해, 애초에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마저 숨기는 것이다.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죄수들의 탈주극으로 시작하여, 양구병 형사의 범죄 수사극으로 이어진 이 단편 역시 반전에 반전이라는 묘미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보니 시청자들은 죄수들의 금괴 찾기에 빠져들다, 다시 양구병 형사의 범죄 수사극에 집중하다, 뜻밖에도 마지막에 조성기 형사의 변신과 그 예상 외의 결말을 조우하고서는 허무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제작진은 잔뜻 등 뒤에 숨겨놓고, '놀랐지' 하는데, '뭥미?'라는 느낌을 받는 달까? 소망하는 곳으로 불 수 없는 바람의 아이러니는 만끽될 수 없었다. 

물론 제작진은 충분히 그 반전에 반전이 숨겨놓은 퍼즐을 종종 힌트로 알려주었다. 양민을 학살했다는 베트남전 천상사의 이야기에서 과도하게 감정을 이입한 조성기라던가, 장면 장면이 바뀔 때마다, 막간으로 등장한 당시 사건들을 다룬 신문 기사들에서, 수많은 힌트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2부작을 다 보고 나서도,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라는 제목의 의미가 갸우뚱해질 만큼, 극은 이리저리 시청자들을 데리고 '반전'을 향한 숨바꼭질에 치중하다 보니, 정작, 마지막에 금괴 찾기가 아니라, '복수'를 향한 천상사의 일념에 대한 천착이 충분한 설명을 가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결국 1부에서 주인공처럼 등장한 죄수들의 최후 역시 해명 한 마디 없이 마무리 되고 만다. 궁금한 것은 멋들어지게 한 입 베어불고 던져 진 양구병 형사의 폼나는 마무리가 아니라, 가짜 금괴를 발견한 이후, 살아온 그들 각자의 삶이었는데 말이다. 사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깜짝 놀랐지!'하며 끝냈는데, 정작 할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미진함이랄까. 그래서 분명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 놓았음에도 용두사미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반갑다, 드라마 스페셜
그래도 일요일과 월요일 한 주가 넘어가는 한껏 외진 자리라도 그래도 자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드라마 스페셜>이 이젠 핫해진 금요일 저녁의 막간극으로 등장했다. tvn <삼시 세끼>와 맞붙은 각 방송사의 전력 투구로, 그나마 이 자리조차 얼마나 보전할런지, 기약할 길없다. 그나마 사라지지 않을 걸 감사해야 하는 건지 입맛이 씁쓸하다. 그래서일까, 용두사미이든, 기괴하든, 여전히 거뜬하게 등장한 단막극이 우선은 반갑다. 기존 드라마들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을 보는 맛은 그 미완의 결말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별미다. 
by meditator 2015. 3. 21. 11:36
휴지기를 가졌던 드라마 스페셜이 다시 돌아왔다. 
9월 14일 <그 여름의 끝>에 이어, 9월 21일 <세 여자 가출 소동>까지 두 편이 방영되었다. 공중파 유일의 단막극 드라마 <드라마 스페셜>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서 일까? 이제 막 첫 술을 뜬 두 편의 <드라마 스페셜>, 배부르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어쩐지 술이 너무 작다는 느낌이 든다. 

9월 14일에 방엳된 <그 여름의 끝>은 남편이 교통사고 이후 식물인간이 된 후, 주민등록 등본을 통해 알게 된 남편 진우(이광기 분)의 숨겨진 자식을 맞닦뜨린 주부 수경(조은숙 분)의 혼란을 다룬다. 알고보니, 남편의 사고는 업무차 출장이 아니라, 춘천에 사는 첫 사랑 연인과, 그녀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암으로 죽은 첫사랑 연인의 아들은, 혼란을 겪는 수경에게 떠맡겨진다. 그녀는 처음 자신에게 맡겨진 초록이(전진서 분)를 미워하지만, 엄마를 잃고 누군가에게 살갑게 정을 붙이려고 애쓰는 초록이에게 차츰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이어서 9월 21일에 방영된 <세 여자 가출 소동>은 제목에서도 대번에 알 수 있듯이, 대뜸 시끌벅적 세 여자 가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랫동안 식당일을 하며 모은 행상 트럭 살 돈을 들고 튄 주부 형자(박해미 분), 룸살롱에서 도망나온 여진(장희진 분), 회사일을 배우기 싫어 학교를 땡땡이 친 수지(서예지 분) 세 여자가 가출과 관련된 해프닝을 연속적으로 벌인다. 도망가다 지쳐 공원에 앉아있던 형자는 아버지의 비서와 실랑이를 벌이던 수지를, 원조 교제남과의 실랑이로 오해하고 개입하고, 그 옆에서 소주를 마시던 여진 역시 나서는 바람에, 형자와 수지는 도망갈 수 있게 된다. 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하려던 형자와 수지 앞에 여진이 등장하고, 여진을 쫓던 나이트 클럽 직원들로 인해 세 사람은 함께 쫓긴다. 엄마의 생일을 맞은 수지를 위해 두 여자는 함께 수지 엄마를 모신 납골당을 찾고, 그 과정에서, 하루 동안, 엄마와, 언니의 가족 관계가 탄생된다. 하지만, 의사 가족 관계는 여진의 나이트 클럽 빚을 갚고 자유를 얻는 과정에서, 납치 사건으로 둔갑하고, 결국, 세 사람은 백화점 옥상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신세가 된다. 

공교롭게도 새롭게 시작한 드라마 스페셜의 두 편, <그 여름의 끝>과 <세 여자 가출 소동>은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그 여름의 끝>에서 숨겨진 남편의 소생이라 여겼던 초록이는, 친자 검사 결과 남편의 핏줄이 아닌게 밝혀진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들의 핏줄이라며 오매불망 안타까이 여기던 시어머니는 단번에 안면을 바꿔, 아들을 사고로 이끈 '재수없는 녀석'이라며 초록이를 내쫓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그간 초록이와 정이 든 수경은 고뇌한다. 그리고 과연 지금까지 그저 첫사랑에 대한 사랑으로만 느꼈던 남편의 마음을 다시 한번 헤아리기 시작한다. 결국, 초록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수경의 가족이 된다. 
<세 여자 가출 소동> 역시 마찬가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세 명의 여자가, '가출'이라는 공감대를 통해 하나가 된다. 죽은 엄마를 생일날 찾은 수지가 안타까워, 수지 엄마와 동갑인 형자는 그녀의 엄마를 자청하고, 샘이 난 여진은 그럼 자기는 언니가 되겠다 한다. 그렇게 마음 넉넉한 두 사람에 대한 보답이라도 되는 듯, 수지는 엄마의 놀음 빚을 갚기 위해 룸살롱을 전전하는 여진의 빚 1억을 갚아준다. 가끔씩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혼돈스러워 하면서도, 세 사람은 그들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똘똘 뭉쳐 해결하며, 가족이 되어간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대안 가족 이야기는 막상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싱겁다. 노희경의 드라마들처럼 자신의 삶의 경험 속에서 서로가 머리쥐어 뜯으며 싸우다 공감하며 하나가 되어가는 대안 가족이 아니라, 너무 쉽게 서로의 정에 기대어,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 뜨리는 '온정주의'로 모든 사건을 풀어가기 때문이다. 단막극이라는 한 시간의 시간 탓으로 돌리기에도, 수경이 초록이에게 허물어지는 것도, 형자가 쉽게, '너의 엄마가 되어줄게' 하는 것도, 드라마로서는 그렇게 하는게 틀리지 않지만, 어쩐지 쉽다. 2014년의 드라마인데, '응답하라' 때 드라마라 해도 이물감이 없다. 과연, 21세기의 세 여자가, 혹은 가족에 대해 천착한 현실이 담겨있지 않다. 

또한 각각의 해프닝을 풀어가는 방식은 실험적인 단막극을 지향하는 <드라마 스페셜>이라기엔 너무 전형적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여름의 끝>에서 수경과 초록의 만남과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의 끝에, 가족으로 보듬기까지가,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전형적이다. 심지어 시어머니의 이반까지. 
<세 여자 가출소동>의 행로 역시 다르지 않다. 가출 해서 우연히 조우한 세 사람, 그 중 누군가를 쫓는 사람들로 인해, 함께 쫓기다, 차츰 정이 들어가는 과정, 그리고, 돈으로 인해 생기는 어려움을 또 다른 누군가가 사심없이 해결해 주고, 마지막에, 회개한 아버지의 사죄로 인한 해피엔딩까지. 
초록이가 사실은 남편의 자식이 아니라는 <그 여름의 끝>의 반전도, 함께 가출한 세 여자가가, 납치범으로 오인받는 <세 여자 가출 소동>은 전에 어디선가 본듯 익숙하다. 


그러기에 <드라마 스페셜>의 장점은 무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공중파 유일의 단막극을 방영하는 것 이외에.
아마도, 그것이, 사극, 스릴러, 코미디, 기존 드라마에서 감히 해볼 수 없었던 다양한 장르적 시도를 해온 실험주의 정신도 있지만, 그에 덧붙여, 그것이 어떤 장르가 되었든, 바로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사회가 고뇌하는 문제를 담은 '현재성'에 방점이 찍히기에 때로는 미흡한 완성도에도 빛났던 것이 아닐까 싶다. 
기존 드라마들이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각종 사회 문제들, 인간간의 문제들을, 마치 가장 날선 시선을 가진 단편 소설들처럼, <드라마 스페셜>의 단막극을 통해 발언해 온 것이, 지금까지 이 드라마가 살아온 내력이다. 아름다운 동화같은 드라마들도,되돌이켜 보면, 가장 현실적인 기반에 발을 담글 때, 소통되지 않았었나 싶다. 사극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성에서 길어내어진 역사적 해석이어야 의미를 얻었다. 

그런 면에서, <그 여름의 끝>이나, <세 여자 가출 소동>은 어쩐지 맹숭맹숭하다. 갈등은 첨예하고, 스토리는 완결적이지만, 그뿐이다. 새롭지도 않고, 실험적이지도 않고, 그저 어디선가 보았을 법한 이야기, 전개들이다. 그러니, 배우들의 연기도, 열연이긴 한데, 어딘가 한 구석이 비어있다. 이래서야, 월요일의 부담을 접어두고, 밤 열 두시 넘어 잠을 쫓으며 <드라마 스페셜>을 보아야 할 의미가 부여되겠는가.


by meditator 2014. 9. 22. 11:00

일단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글을 시작해 볼까?

<드라마 스페셜 단막극 시리즈 -연우의 여름(이하 연우의 여름)>은 시청률이 잘 나올 드라마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참 스토리는 뻔하다싶기에. 
엄마와 둘이 살아가는 인디 밴드의 보컬인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딸 연우(한예리), 다친 엄마를 대신해 어쩔 수 없이 빌딩 청소부 일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초등학교 동창생 지완(임세미)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를 대신해 소개팅을 나가는데, 거기서 만난 남자가 괜찮다. 그래서 딱 잘라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자꾸만 거짓말을 하게되고, 그 사람을 만나게 되고......
엄마 대신 빌딩 청소부라는 설정은 희귀하지만, 친구의 남자를 대신 만나 사랑을 싹틔우는 설정은 어디선가 흔히 마주치던 드라마의 소재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연우의 여름>을 진부하다고 눙쳐버리면 몹시도 섭섭하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몇 줄의 글로 정리되는 스토리 라인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매력은, 우리가 차에서 내려 애써 골목길을 걸으며  좋다라고 하는 '공감의 정서'가 필요한 것이기에, 누구나 다 좋아할 드라마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드라마 스페셜>이란 영역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신선한 태도, 바로 그것 말이다. 그러니 제발, 이 시간만큼은 시청률의 잣대로 드라마들을 묶어 놓지 말기를. 



마치 수능 국어시간 시험문제의 답안처럼, <연우의 여름>이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연우의 청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청춘은 인디밴드의 보컬이라는 사회적 존재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대신해 빌딩 청소부로 나갈 수 있는,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능력이 없어 엄마에게 빌붙어 사는 존재로 보일 수 있는 애매하고 나른한 존재처럼 보인다. 
드라마는 그런 연우의 처지를 구구절절 스토리로 설명하는 대신 2013년 서울의 여름을 비춰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청소부 연우가 빌딩 난간에 기대어 보는 막막한 하늘, 연우를 제외하고는 싱그럽게 여름의 활기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 

윤환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연우의 마음은, 한강 다리 너머로 보이는 흑백의 톤같은 하늘과 풍경이 대신한다.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수능 국어 시간 문제같은 제목보다 더 은유의 효과를 한껏 내보이고 있는 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풍경들이다. 집이 어디냐며 데려다 주겠다고, 연우를 친구 지완의 집 앞에 내려주고 떠나는 윤환(한주완 분)의 차 뒤로 이어지는 건, 차 한대도 들어갈 수 없을 거 같은 연우네 집 앞 골목이다. 
이 심오한 풍경의 문제를 애써 노력해서 풀어내는 여유가 리모컨 조급증에 시달리는 요즘 사람들에게 있을까 저어되면서도, 한편 애써 그 시험에 든 사람들은 조금 더 보태, <8월의 크리스마스>같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심전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 <8월의 크리스마스>다. 80년대라는 뜨거운 공간에서 사랑과 죽음을 논하면서, 감독은 카메라를 전주의 오래된 거리로 끌고 들어갔다. 그것처럼 <연우의 여름>은 2013년 대한민국의 청춘을 논하면서, '연우 수리점'이란 간판이 무색한 낡은 연우의 집과, 조촐한 바 '아르투르 도밍고'를 비춘다.
그래서 연우의 삶은, 그저 대기업을 다니지 못하는 엄마의 청소 일을 대신해야 하는 비정규직 젊은이라는 딱딱한 틀을 넘어, 2013년의 조금 다른 세계관을 지닌 젊은이로 다시 탄생한다. 
아직 발에 메니큐어도 발라보지 못한, 멋드러진 레스토랑이 아니라 한강 둔치의 바람에 몸을 맡길 줄 아는, 아빠에게 물려받은 솜씨로 낡은 라디오를 고쳐낼 줄 아는 이 시대의 청춘의 속도와는 조금 다른 연우가 탄생한다. 덕분에, 뻔하게 드라마틱한 친구를 대신한 그녀의 처지조차도 조금은 다른 빛깔로 다가와, 진심 연우처럼 느리게 사는 삶을 선택한  청춘의 속내를 들여다 보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우의 여름>을 연우답게 만드는 것은 배우 한예리이다. 못난이 삼형제의 그 누군가를 닮은 거 같은 익숙함이, 드라마가 흐르면서, 한없이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만으로도 연우가 다 설명될 거 같은, 드라마가 있는 배우의 모습을 보여준다.물론 많이 나오지 않아도 캐릭터가 다 보여지는 엄마 김혜옥과 청소부 아줌마 황정민은 물론, 친구 세미도, 남자 친구 윤환도, 진짜 요즘 직장인들 같아 보여 좋았다. 
좋은 배우들의 뒷받침 위에서, 독무를 추듯, 인디 밴드의 느린 삶을 살아가다, 뜻하지 않게 빠른 2013 대한민국에 걸려 넘어진 연우를 말갛게 그려낸 한예리의 연기는 진짜 연우 같았다. 그림좋은 수채화 전시회를 보고 나온 느낌이다. 


by meditator 2013. 9. 5. 10:44

얼마전 전 배우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며느리인 박상아씨와 현대 그룹의 며느리가 된 전 아나운서 노현정씨가 외국인 학교에 자녀를 부정 입학시켜 경찰에 소환된다는 기사가 떴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인 삼성가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는 이재용씨의 아들이 명망높은 사립고에 사회적 배려자 전형으로 합격해 물의를 빚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나라에서는 화장실 휴지로도 쓸래야 찾기 힘든)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밥말아먹은 지배층의 '도덕적 아노미'의 전형적인 예로도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아홉을 가지고도 열을 탐하는 것이 우리나라 가진 사람들이라지만, '자식이 뭐길래? 교육이 뭐길래?' 저렇게 까지 '추접한' 행태를 보이나 싶은 생각도 든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란 캐캐묵은 슬로건은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더 절박한 소망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 예전 줄줄이 알사탕으로 낳아 하나가 죽어도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많은 아이들이 있던 그래서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던 무사태평의 시대에도 우리나라 부모들은 오로지 입신양명의 기회를 교육을 통해 찾았는데, 하나 아니면 둘을 겨우인 이 시대에 자식은 부모의 체면과, 성공과, 부의 '재생산'의 관건이 되었다. 그러기에 사회 지도층이던,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던 자식의 교육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드라마 스페셜-그녀들의 완벽한 하루>는 그런 학부모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드라마 스페셜-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는 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을 상회한다는 강남의 유명 유치원을 배경으로 네 명의 엄마들의 씁쓸한 '고군분투'를 4주에 걸쳐 '옵니버스식'으로 담았다.

4회에 걸쳐 주인공으로 등장한 엄마들은 유치원 같은 반의 학부모들이며, 학기초 개원에서 부터 크리스마스 발표회까지의 기간을 각 엄마의 시점에서 서로 다르게 조명해 나간다.

처음 시작은 대기업 마케팅 팀장까지 했던 일에 있어서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 자신의 딸을 하나 유치원에 보내면서 유치원 엄마 들 중 '루저'가 되어 겪는 그리고 거기서 벋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상대적으로 작은 아파트에 상대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그녀가 보기에 그녀가 어울리고 싶은 나머지 엄마들이 사는 모습은 '캐슬'이라는 강남 모 아파트의 명칭에 걸맞은 다가가기 힘든 스트레스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가 흥미롭게 전개되는 건 바로 그 성과도 같이 견고한 강남 '진골'들의 삶의 균열을 다루면서 부터이다. 거기다, 유치원에서 사라진 예지와 그 엄마의 미스터리한 스토리에, 크리스마스 발표회에서 사라진 도훈이까지, '스릴러'적 요소를 갖추면서 다시 매회 한 엄마 별 에피소드를 색다르게 변주해가며 구성의 묘미를 살려낸다.

그토록 공고해 보였던 잘난 엄마들의 '카르텔'이란 것도 서로의 이해가 엇갈린 순간,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게 눈꼽만치라도 해가 돌아올 것 같은 순간, 예지와 예지 엄마를 내치듯, 가차없이 밀어내 버리는 주먹 세계보다도 냉혹한 이해 관계였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엄마들은 그녀들이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이라는 반추없이, 내 아이를 내 뒤로 감추듯 '나만 아니면 돼'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는 빈번히 강남 최고의 유치원에서, 그리고 최고의 교육 환경에서 결코 행복해 하지 않는 아이와, 그런 환경에 끝없이 아이를 내몰며 스트레스를 받는 엄마를 비춰준다. 마치 '그게 최선입니까?'라고 질문하듯이.

제목이 역설적으로 말해주듯, 그리고 예지 엄마가 마지막에 결론을 내렸듯, 그 누군가가 그들의 잘못을 단죄하기 전에 엄마들은 자신이 쌓아놓은 '허영'과, '위선'의 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 그리고 하나 유치원을 가야만 이 사회의 1%의 카르텔에 선착할 수 있는 그 허상을 낱낱이 드러내고야 만다. 그리고 네 명의 엄마들은 결국 모두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로 밀려나든 유치원을 떠나게 된다.

 

 

 

청년층의 우울증이 놀라운 속도로 증가 추세에 있고, 평균을 훨씬 상회한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젊은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어려서 부터 그저 공부, 공부만 하고 자라났던 세대이다.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부모에게 교육 받은 세대이다. 종일반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세대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88만원 세대가 되었다. 그러니 우울증이 안오겠는가? 그러니 지금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세대들은 더 죽자사자고 달려든다. 내 아이는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되겠다고. 드라마는 네 엄마들의 참회의 눈물로 끝이 났다. 어쩌면 그녀들의 삶은 더 이상 완벽하지 않을지 몰라도, 역으로 그녀들과 그녀의 자녀들은 행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기사에서 만난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한 교육 비리를 보면서 침을 튀기며 욕을 한다. 하지만 가만 뒤돌아 서 생각해 보면, 과연 나는 다를까 싶다. 모두가 내 아이 하나 잘 살게 만들면 땡! 이라며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세상에서.

by meditator 2013. 3. 11. 09:3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