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개봉한 영화 <다가오는 것들> 이 영화의 원제는 해석한 그대로 Things to come, 그리고  L'avenir이다. 이 중 avenir 은 영어로 future 즉 미래이다. 이 희망 가득할 것같은 단어로 이름표를 붙인 영화, 하지만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맞이할 미래는 그녀를 원치않는 일상의 파괴로 밀어넣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건 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의 장황한 철학적 담론이다. 68세대로 한때는 소련까지 가면서 급진적 흐름에 몸을 맡겼던 나탈리는 이제 파리의 한 고등학교의 철학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전히 '급진적'인 내용의 책을 읽으며 출근하는 그녀를 막아서는 건 경찰이 아니라, 노동자와 학생의 권리를 내세우며 교문을 봉쇄한 '급진적 주장'을 하는 학생들이다. 나탈리는 그 학생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대신 선생님으로 수업권을 주장하며 막아선 학생들을 제치고, 심지어 본의아니게 시위대에 발이 묶인 학생들을 설전을 하며 시위대로부터 '구출'해오기까지 한다. 그런가하면 급진적인 제자를 아들의 자조적인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편애하고, 여전히 철학 교사, 혹은 저자로서, 그리고 남편과의 대화 속 그녀는 '레디칼radical'한 진보적 지식인이다. 이런 자신의 삶을 '원칙'과 '행동'이 일치한 일관된 삶이라 자부하며. 

그냥 모르는 척하며 살 순 없었어? 
이제는 그녀가 쓴 교재의 재출간조차 여의치않은 한 물간 철학 교사,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사상이 정도를 걷고 있다 자부심을 느끼는 그녀에게 삶은 '자존'을 허락치 않는다. 25년을 서로의 사상을 배척하면서도 '부부'로서의 사랑으로 엮어져 있다 생각했던 남편은 그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그리고 이제 그 여자와 살겠다 선언한다. 한밤중에도 전화를 걸며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며 그녀에게 의지했던 홀어머니는 억지로 요양원에 모시자 그 삶의 일탈을 견디지 못해 그녀의 곁을 떠난다. 표지를 바꾸는 것에도 허락할까말까 했었던 그녀의 철학 교재는 상업적 승산이 없어 재간 계획 자체가 무산된다. 늘 그녀를 종종걸음치게 만들었던 그녀의 삶이 이제 그녀의 곁을 떠나며 그녀를 공포스런 '미래'로 밀어넣는다. 



남편의 외도 고백에 대한 나탈리의 반응은 '왜 그걸 말해? 그냥 모르는 척하며 살 순없었어?'이다. 이 말의 뉘앙스로 보건대, 아마도 아내 나탈리는 굳이 남편이 '고백'이 아니라도 그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녀들 앞에서 이들 부부의 대화는 신랄한 사상 투쟁 같아 보이지만, 그 '말'의 형식을 벗겨놓고 보면, '권태기'조차 지나버려 '애'보다는 '증'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한 부부란 이름의 '남의 편'들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편의 외도 고백에 그녀는 25년을 이리 살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줄 알았다며 배신감을 피력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아쉬워하는 건, 남편과의 별거로 인해 그가 가져가 버린 자신의 손때묻은 책과, 역시나 그녀의 손길이 닿은 여름 휴가지의 별장이다. 즉 '양심적 지식인'이라 자부했던 그녀의 일상들은 한꺼풀 벗겨놓고 보니 누군가의 아내, 자녀 그리고 풍족한 중산층의 안온한 삶이었을 뿐이다. 

젊은이에게 '미래'는 '꿈'과 함께 찾아오는 '희망'이지만, 굳어져가는 일상에 자족하며 사는 나이듦의 '미래'는 악몽과도 같다. 그녀는 이제 꿈을 희망이라 말하지 않고, 욕망의 환타지라 정의 내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외도를 고백하는 남편에게 왜 나를 배신했냐 대신, 왜 그런 말을 하냐 반문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같던 결혼 생활은 사랑하는 남편에 의해, 올곧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사상적 삶은 애틋하게 여겼던 남제자에 의해 산산조각난다. 

버리면 채워지는 삶 
영화 속 나탈리는 어머니로 인한 울음 외에 두 번을 운다. 남편과의 이별? 혹은 자신의 손때묻은 별장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밤, 홀로 운다. 그리고 남편의 차를 타고 가는 나탈리의 눈빛은 그녀에게 닥친, '미래'란 이름의 상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실천적 삶이었다는 자신에 대해, 서명 따위나 하는게 무슨 실천이냐는 제자의 냉혹한 평가가 내려진 그 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그 제자와 애인의 흥건한 물놀이를 목격한 그 밤 그녀는 서럽게 오열한다. 그 서럽게 오열하는 그녀의 품에는 알레르기때문에 맡기 싫다는 어머니의 고양이 한 마리뿐이다. 마흔 넘은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며 스스로 말했던 그녀가 화려한 원색의 드레스로, 나이든 몸을 한껏 드러내었던 그 곳에서, 어쩌면 그 일말의 가능성마저 잃은 양 서럽게 운다. 

하지만 그렇게 잃어버리고 놓치고 버려지며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아니 삶도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남편의 별장에서 몰래 울고, 다시 남제자의 시골 집에서 다시 한번 서럽게 고양이를 끌어안고 울었던, 하지만 의연했던 그녀는 버릴 것은 버리고, 그 버린 자리 시간을 방패삼아 미래를 메꿔간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그 서럽게 오열하며 이별했던 그 제자의 시골집에 다시 방문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어머니의 부재 이후 어디를 가든 낑낑거리며 끌고 다녔던 검은 고양이를 방면하기 위해. 그리고 관객에게 물음표 혹은 느낌표를 선사하는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을 역시나 가차없이 '방면'한다. 잠시 후에 찾아올 손주와 자녀들의 식사 준비를 서두르며. 

아마도 나탈리 또래의 우리네 어머니를 그린 영화라면 어땠을까? 어머니가 남긴 고양이를 애지중기 키우며, 은근슬쩍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선물을 들고 찾아든 남편에게 궁시렁거리며 모처럼 온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가족애'와 '모성애'로 마무리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탈리는 늘 어머니의 집에서 움직이지 않아 들기조차 버거웠던, 하지만 시골집에 가자 그 하룻밤에 야생의 본능이 살아난 고양이를 자유로울 수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준다. 그리고 그 본능이 살아난 고양이처럼 하룻밤을 보낸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돌아온 집에서, 은근슬쩍 끼어든 남편을 거침없이 돌려보낸다. 대신 자녀들과 식사를 하며, 새로 생긴 손주를 달랜다. 그녀에게 닥쳤던 '미래'란 이름의 원치않는 자유는 이제 그녀의 다른 '현재'가 되어 그녀에게 새롭게 안착한다. 그것이 이자벨 위페르의 생생한 연기로 구현된 삶의 연속성이다.  

영화는 지난 2005년 출간된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의 여성편같다. 68세대로 진보적인 세대를 자부했던 남자가 세상이란 물결에 휩쓸려가던 이야기가, 이제 2016년 나이듦에 떠밀려 버린 68세대 여성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굳이 프랑스나, 68세대라는 수식어를 떼고 보면, 한때 '개혁'의 흐름에 앞장섰던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나이들고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이른바 386으로 상징되었던 이들의 자화상을 대신 그려주는 듯하다. 아니 뭐 굳이 한때 진보란 수식어를 떼어놓고, 그저 나이듦이란 주제만 놓고 봐도 감상 요건은 충분하다. 아쉽다면 현재의 우리가 반추할 이런 내용들이 외국 영화를 통해, 그것도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것뿐. 
by meditator 2016. 10. 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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