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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광복절 특선 영화'를 검색하는 사이 광복절이 지나갔다.
하지만 69주년을 맞이한 광복절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었다는 일본의 망언과, 그 망언에 못지않은 역사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역사 교과서가 '검정' 교과서가 버젓이 등장하는 세상에서 무색해 지고 있다. 아니, 그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수능 선택 과목이 아닌, 국사를 배우지 않아 유관순을 모르는 아이들을 키우는 세상에서, 우리는 정말 '광복절'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일까? '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며, 무너진 조선 수군을 이끌어,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영웅담이 천만 관객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명량 해전 못지않은, 세계 전쟁사에서 기적의 승리라 칭해지는 '청산리 전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지. ebs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8월 15일(금) 밤 10시 45분 ~ 11시 40분에 청산리 전투를 복원하였다.
10여 명의 전문 인력이 투입되어, 1년 여에 걸쳐 한,중, 일 3개국을 돌며 자료를 조사하고, 이 조사한 내용에 근거하여 5박 6일간의 청산리 전투 과정을 3d로 복원하였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벌어진 청산리 전투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가 없는 승전보로 기록된 이유는, 당시 일본군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나아가 아시아 전역을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으로 만들 파죽지세의 강고한 전력을 가진 군사 선진국이었다. 더구나, 1차 대전의 승전국으로 이름을 올린 덕분에,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전쟁에서 유리한 교두보를 달성한 일본은, 그 기세를 밀어, 한반도를 넘어 만주로 그 군사적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한 것은, 바로 도저히 숫자 상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일본군의 숫자이다. 당시 일본군은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개시했고 이를 위해 5천 영의 군 병력을 집결 시켰다.
또한 마적들에 의한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출병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조여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좌진이 이끈 '북로 군정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은 대규모 일본 병력에 맞서, 이순신 장군이 명량의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하였듯이, 이미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암약해왔던 독립군의 경험을 살려, 유리한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 전투로 통칭되는 전투는,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봉밀구, 고동하 등의 지역에서 벌어진 10여 차례의 전투를 통칭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승리를 얻은 것은 어랑촌 전투였다. ebs는 이 전투 과정을 당시 병사의 실물에 가장 근접한 3d 영상으로 복원하여, 전투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즉, 일본군들이 다수의 병력과, 엄청난 물량의 무기를 내세워 밀어붙인 것에 대해, 독립군은 그들에 앞서 골짜리로 들이닥친 일본군을 보다 높은 지역에서 매복해있다 기습 공격을 하는 식으로 제압해 나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묘사해 낸다. 또한 독립군 사관학교에서부터, 훈련과정, 무장 정도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소개된다.(당시 전투에 참가한 북로 군정서의 병력은 독립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한 1600여 명이었고,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21세기 정치학 대사전)
이런 독립군의 선전으로 5박6일간의 대규모 물량을 쏟아부은 작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2,3천 정도의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청산리 전투>의 성과는 단지 전투 과정을 3d로 복원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전투의 실마리가 되었던 훈춘 사건과, 당시 청산리 전투가 승리로 이끌었던 요인, 그리고, 전투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식민지 조선의 슬픈의 운명까지 추적한다.
특히 당시 독립군이 성공을 거둔 이면에, 망국 이후, 대규모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 간도 지역으로 이주해 온 조선인들과, 그들 사이에서 자라난 민족 의식, 그리고 그에 기반한 학교들의 성장이, 바로 독립군 인력의 충원과, 군자금, 무기 공급을 가능케 했던 원인이 되었음을 짚는다. 또한 청산리 전투 후 이를 간파한 일본이, 독립군과의 전투 대신, 독립군의 근거지가 되었던 조선인 마을을 해가 바뀐 이듬해 1921년 4월에 이르기까지, 방화, 약탈하고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다행히 독립군은 이미 중, 소 국경지대로 근거지를 옮겨 피해를 피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3700여명이 죽임을 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다수의 항일 단체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 결과, 독립군의 영광은 더 이상 재현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영화 <명량>이 역사 속의 명량 해전을 한 시간 여의 해전씬을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 그 '기적'을 체험케 했듯이, ebs <청산리 전투> 역시, 책 속에서 그저 한 줄로 지나쳤던 독립군의 쾌거를 생생하게 재현해 냈다는데 의의가 크다. 이를 위해 들인 1년이 아깝지 않게, 단지 아쉽다면, 이런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공들여 애쓴 결과들이 좀 더 시청자들과 만날 기회을 얻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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