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북벌'을 계획했다. 백성들이 당한 수모를 좌시할 수 없다는 그의 결심을 중신들, 그 중에서도 좌상 조태학(유성주 분)이 막아선다. 그들의 전횡을 알기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왕은 출병을 서두르지만, 출병령을 가지고 가던 군사는 비명횡사했다. 수상한 꽃가루를 넣은 음식을 먹은 왕은 하룻밤 사이에 종창이 부풀어 올랐다. 극중 주인공 유세엽(김민재 분)이 종창을 치료하려했으나 오히려 피가 멈추지 않아 죽게 된다.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첫 회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북벌'을 계획하다 서른 아홉의 나이로 극중 내용처럼 종기 치료를 받다 과다출혈로 사망한 '효종'사의 역사적 사실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대신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이덕일이 지은 <조선왕 독살 사건>은 효종의 죽음을 '독살'로 의심했고 드라마는 그런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다. 드라마는 이렇게 뒤숭숭한 '호란' 이후의 조선 사회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마음의 병까지도 고치는 '심의' (心醫) 유세풍이라는 인물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아직 유세풍이기 이전에 유세엽인 주인공은 왕을 치료한 자신의 '조선판 메스'가 변색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왕을 죽였다는 사실에 자지러진다. 일찌기 문과 급제를 했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 유후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과에 나서 장원을 따냈으며 친구였던 세자의 급체를 해결하여 왕으로부터 '신침'이라 칭송을 받았었다. 하지만 어의와 결탁한 조태학의 세력은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들을 구하 왕의 독살을 밝히려 동분서주하던 아버지 유후명조차 피습당하고 만다. 다행히 친구였던 새 왕은 유세엽의 목숨만은 구해주었다. 하지만 '한양'에서 잘 나가던 내의원 수재는 이제 성문 밖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때를 기다리라 
동가숙서가숙하던 유세엽과 그의 집안 머습 만복을 계수의원 계지한이 '빛'을 핑계로 잡아앉힌다. 하지만 계수의원에 있으면 뭘하나, 침만 쥐면 그의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은 벌벌 떨리는 것을. 그런 그에게 '돈만 밝히는 스승인지, 빚쟁인지 헷갈리는' 계지한은 말한다. '때를 기다리라고.'

일찌기 간질병 궁녀의 치맛자락을 잘라 목숨을 구할 정도로 '의원'으로서의 사명감에 투철했던 유세엽이었다. 하지만 가문은 무너지고, 신침이라던 그가 침도 놓지 못하게 되자 세상을 버리려 했다. 목숨을 구하고 계지한이 빚을 핑계로 그를 다시 '의원'노릇을 하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의지 상실'이었다. 그런데 벼랑 위의 그를 구하며 살아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이를 구하라 했던 그녀 서은우(김향기 분), 그 초롱초롱하던 눈빛의 그녀가 그의 앞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존재'가 되어 나타났다. 자꾸 죽으려는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고픈 그의 '열망'이 '침'이 아니도 환자를 고치는 '심의' 탄생의 서막이 된다. 

드라마는 망한 가문의 전직 내의원, 굴러들어온 계수의원 반푼이 유세엽이 '심의' 유세풍으로 거듭나기 위해 두 여인의 삶을 계기로 삶는다. 

그 첫 번째 여인은 바로 벼랑 끝의 유세엽을 삶으로 인도한 서은우, 하지만 그녀는 결혼 당일 신랑의 죽음으로 시어머니로 부터 죽음을 강요당하고 있는 청상과부이다. 또 한 사람은 계수의원의 매병(치매) 할망이다. 

유세엽은 서은우에게 자신을 '동일시'한다. 시어머니는 가문의 부흥을 위해 열녀문을 하사받기 위해 그녀가 죽기를 원한다. 친정은 '출가외인'이라는 법도를 들어 그녀를 품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그녀의 삶을 바라지 않는 세상에 자꾸만 죽으려는 서은우에게 임금을 죽이고, 아버지도 죽인 거나 다름없는 이제는 능력을 상실한 의원 유세엽 본인의 모습이 '투영'된다. 

또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문과 급제를 했던 그가 의원으로 마음을 돌렸듯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품어주듯이 매병 할망은 그를 '풍이'라 부르며 보다듬는다. 비록 그런 그녀의 맹목적인 모성이 '매병'으로 인한 착각이요, 정작 풍이는 따로 있지만, 매병 할망을 통해 비로소 유세엽은 계수의원을 자신의 '안식처'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제 유세엽 대신 할망이 잃어버린 아들 '풍이'가 되어 유세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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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대신 마음을 돌보다 
드라마에서 유세엽이 유세풍이 되도록 매개가 된 두 여인은 '죽어야 하는 여인, 잊혀져야 하는 여인, 버림받은 여인들'이었다. 유교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 성격이 강한 성리학을 사회적 윤리관으로 수용한 조선, 중기 이후 '남존여비'의 체계가 확고히 되고, 그런 가운데 남편이 죽은 양반가의 여성에게는 이른바 간접적 '명예 살인'으로 '자결'이 강요되곤 했다. 그 '대가'로 수여되는 '열녀문'은 가문의 영광이자, 드라마에서 보여지듯이 남은 자손들에게 '입신양명'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대의와 명분을 위해 여성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삼는 조선이 청에 침략을 당했다. 청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때 소현 세자, 봉림대군과 같은 왕족 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계수의원의 할망이 바로 그 포로로 잡혀간 여성이었다. 고향이, 자식이 그리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할망, 하지만 고향 집의 아들은 그런 그녀를 외면했다. '어머니는 이리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온 포로 여성들, '환향녀', 하지만 그들은 돌아온 고향에서 버림받고, 몰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에게 버림받은 채 '매병'을 앓는 할망을 유세엽이 아들과의 '해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시도 풀어놓지 않던, 아들을 위해 그녀가 시시때때로 챙겼던 물건들의 보따리를 아들 앞에 풀어놓음으로써 할망은 묵은 짐을 내려놓는다. 

서은우와 할망, 이 두 여인을 돌보면서 유세엽은 침이 아니라도 의원으로 자신이 할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유세엽은 할망이 자신을 부르던 '풍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택한다. 

이름은 그저 이름일뿐입니다. 


가문이 존재를 대신하는 조선 시대에 그는 이제 자신의 가문 대신 서은우와 할망같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보살피겠다는 자기 선언을 한 것이다. 심의로서 '유세풍'은  '입신양명'했던 '신침' 내의원 유세엽이란 존재를 버리고, 사회가 외면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가 택한 길은 결국 궁극에 가서 그를 제물로 삼고, 그의 아비를 죽음으로 내몬 선대 왕 독살 사건으로 이어질 것이다. 북벌의 뜻을 꿈꾼 왕을 죽음으로까지 내몬 권문 세가, 그들과의 '심의' 유세풍의 대결은 어떻게 풀어질까? 퓨전 사극이라지만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의 포부가 결코 가볍지 않다. 

by meditator 2022. 8. 3. 17:28

작품 속 악역은 '엔진'과도 같다. 악역다움의 정도와 질에 따라 드라마의 궤도가 정해진다. 그들의 악행이 어느 만큼 진폭을 보여주는가에 따라 주인공들의 활약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드라마들은 보다 더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 내고자 고심한다. 그런 면에서 TVN의 월화 드라마 <군검사 도베르만>과 수목 드라마 <킬힐>은 중견 배우 오연수와 이혜영을 앞세운다. 그녀들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행, 그리고 그런 악행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워버리는 강단에 드라마가 힘을 받는다.

 

 

세상 남자들 위에 군림하겠어 
'잘랐어, 내가 잘랐어,' 자신의 약점을 잡았다고 의기양양해하는 변호사 앞에서 노화영(오연수 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한다. 지뢰밭에 들어가 부하를 구한 영웅이라 칭송받지만 사실 다리를 다치지 않은 수색대장, 그 사실이 드러나면 노화영이 쌓아올린 것들도 무너진다. 그러자 노화영은 스스로 나서 수색대장의 다리를 자른다.

선천적으로 오른손 검지 한 마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장애는 그녀의 인생에 큰 걸림돌이 아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육사를 졸업 후 승승장구 여성 최초 사단장이 된 노화영은 당대 여성들의 '워너비'한 존재다. 

하지만 당사자인 노화영은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 사단장 부임 후 첫 행사로 치른 장관 취임식 날 아들의 탈영 사건으로 인해 취임식이 망치자 장관은 그녀의 뺨을 때린다. 더는 세상의 남자들이 자기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뺨을 내줘야 하는 처지이다. 그리고 뺨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조차 내걸어야 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분하게, 하지만 시릴 정도로 냉정한 눈빛으로 자기 앞을 가로막는 그 누구라도 다 해치워버리는 노화영, 아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가 차우인의 아버지로부터 빼앗은 방산업체를 아들에게 맡겼지만 그 아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 아들을 군대로 보내버린다. 이제 그 군대에서 탈영을 하며 다시 아들이 말썽을 일으키자 최전방으로 배치한다. 그녀의 앞길을 막는다면 아들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다. 아들은 예외다. 목숨은 부지시키니까.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부하의 다리 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스스로 자르는 노화영, 그렇게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차우인의 아버지도, 도배만의 부모도 희생시켰다. 그녀가 세상의 남자들 위에 군림하려는 목표에 그 어떤 수단도 상관이 없었다. 최초의 여성 사단장, 방산업체의 실질적 오너,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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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서는 안되는 거? 그걸 왜 지들이 정해!
그래도 노화영에 비하면 <킬힐>의 기모란(이혜영 분)은 나은 편일까? 사람을 죽이거나, 직접 누군가의 다리를 피를 튀겨가며 자르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전쟁터와도 같은 홈쇼핑 업계에서 그녀의 세 치 혀에 누군가의 밥줄이 오간다면 그런 면에서 노화영과 막상막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물 간 쇼호스트가 되어 MD에게도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인 우현, 판매를 망친 채 사람들 앞에서 주저앉아 버린 우현에게 손을 내민 건 모란이었다. 모란의 인도주의였을까? '왜 이제서야 너를 발견했을까?' 그건 우현이 모란의 오너인 UNI 홈쇼핑 사장 현욱의 첫 사랑과 닮았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현을 통해, 우현이라는 인물을 첫사랑과 닮았다는 점을 이용해 사장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시도를 하려는 것이었다. 

UNI 홈쇼핑 평사원으로 부터 시작해서 전무가 된 기모란, 사람들은 그녀의 대단함을 칭송하지만, 칭송을 얻기 위해 그녀가 바쳐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사장 부인의 카톡 한 줄에 달려가 그녀의 히스테리를 다 받아내고, 그녀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사장 주변을 기웃거리는 여성들을 처리하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 그렇게 윗사람들의 뒤치닥거리를 군소리없이 해주며 그 자리에 올랐다. 아마도 그런 뒤치닥거리에는 아직 그녀가 간직한 사장의 첫 사랑에 대한 '처리'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그 자리에 오른 그녀에겐 늘 보험이 필요했다. 더 나은 자리, 예를 들면 계열사 사장 같은 자리로 가기 위해, 우현처럼 사장의 첫사랑을 닮은 여자를 스스로 쥐락펴락 할 수있는 그런 보험들 말이다. 우현이 사장을 뒷배로 삼으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갈 때 모란은 그런 우현에게 '야옹~'하며 조롱한다.  그녀에게 사장은 '호랑이'가 아니라, 장난감을 쥐어주며 놀아주면 되는 고양이였다. 하지만 그 고양이가 이제 모란에게 자신이 우현을 아낀다며 우현에게 프로그램을 빼앗으려 했던 모란에게 경고를 한다.  그런가 하면 오랜 벗인 줄알았던 옥현이 그녀에게 칼을 겨눈다. 하지만 애초에 승승장구하던 옥현의 자리를 빼앗은 건 모란이니 인과응보일까?

노화영과 기모란, 두 드라마에서 '악의 축'이 된 그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녀들은 남들보다 똑똑했고, 그 자신의 똑똑함에 걸맞는 자리를 욕망했다는 것이 아닐까. 단지 안타까운 점은 그 욕망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 전혀 정의롭지 않았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이 사회적 진출을 가로막는 '무형의 유리 천장', 어쩌면 노화영과 기모란이 벌이는 '악행'들은 그녀들이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유리천장을 깨뜨린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 유리천장을 깨뜨리고 끝없이 성공하려는 그녀들의 욕망이 결국 그녀들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by meditator 2022. 4. 6. 23:38

언제부터인가 대신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kbs의 <tv, 책을 말하다>에서 <tv, 책을 보다>로 면면히 이어지는 프로그램이 그것이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위시한 팟 캐스트의 여러 책 관련 프로그램들이 그것이다.  처음엔 '책'을 소개해 준다고 하던 취지들이, 어느샌가 바쁜 생활 속에서 진득하게 책을 붙들고 앉아있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정보'로서, 혹은 '힐링'으로 대신 책을 읽어주겠다고 입장이 바뀐 프로그램들이다. <tv, 책을 보다>는 '책 소개 프로그램의 틀을 벗어나 책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 or 책에 대한 색다른 주장을 다룬 강독쇼로 시청자와 공감의 폭을 충분히 넓히고 이해를 공유함으로 인문학적 재미의 확대를 목표로 한다'며 '독서 권장'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고, 9월 15일 첫 선을 보인, tvn의 <비밀 독서단> 역시 책 읽을 시간 없는 시청자들 대신 책을 읽어 주겠노라 당당히 밝힌다. 


이는 성인 세 명 중 한 명이 한 해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실질 문맹률 oecd 꼴찌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한, 자구지책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시기마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길을 밝혀준' '책'을 포기할 수 없는 문화적 안간힘이기도 하다. 거기에, 책은 읽지도 않으면서, '인문학'에는 솔깃한 기이한 '인문학 열풍'의 편승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지 않는 문화 속에서 탄생한 '책 읽어주는 프로그램'에 또 하나의 새 프로그램이 얹혀졌다. tvn의 <비밀 독서단>이 그것이다. 





익숙한 듯 새로운 독서 프로그램

tvn의 <비밀 독서단>은 기존 대신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의 전통을 따라하면서, 그 '교양'적 성격을 조금 더 희석시키고자 노력한, 즉, '예능화'한 책 읽어주기를 시도한 프로그램이다. '예능화'한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이라니, 잊혀진 슬픈 전설인 2013년 3월 종영된 강호동의 <달빛 프린스>가 떠올려진다. 그리고 보면, <달빛 프린스>는 최근 범람하고 있는 '인문학적 열풍'에 혜안이 밝았던 거였다. 단지, 그 혜안의 방향과 코드가 잘못되었을 뿐, 그렇게 첫 단추부터 '근육질 강호동'을 내세워 불협화음을 빚어 실패했던 책읽기의 예능화가 tvn으로 오면 어떻게 달라질까?


새로인 시작한 <비밀 독서단>,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새 프로그램인데 낯설지 않다. 우선은 단원들이 모여 앉은 스튜디오가 이미 tvn에서 선보인 인문학적 토크쇼 <젠틀맨 리그>와 유사하다. 심지어 그 구성도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인기를 끌었던 <킹스맨>을 패러디 한 듯한 젠틀맨들을 등장시켜, 매너 대신, '인문학적 지식'이 사람을 만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젠틀맨리그>처럼, 마치 원탁의 기사들을 연상시키는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튜디오에 비밀 단원들이 모여 각자 준비한 책을 소개하는 방식이 크게 이물감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인문학적 지식'을 통해 '매너'가 사람을 만들 듯 제대로된 젠틀맨이 되어가고, 비밀의 책을 통해, '기사'가 되어가는 어떤 제식이, '교양'으로서의 격을 만든다. 그렇게 '인문학적 지식'이나, '독서'는 거창한 목적이나, 필수불가결한 효용대신, 거리의 양아치가 젠틀맨이 되어가듯, 멋들어진 삶의 한 방식으로 접근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이끄는 사람들의 구성도 대동소이하다. 연예인 + 전문가의 적절한 콜라보레이션을 추구한다. <젠틀맨 리그>가 정재형과 장기하라는 실질적 면모와 상관없이 좀 '지적'이어 보이는 mc  두 사람에 인하대 로스쿨 교수 홍승기, 경제 전문가 이진우, 역사 교사인 김준우를 합세시켰다면, <비밀 독서단>은 개그맨 정찬우에, 데프콘, 예지원, 미술에 일가견있는 아나운서 김범수, 기자 신기주, 베스트셀러 저자 조승연을 합류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엎어치든 메치든 결국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은 책을 소개하고, 그 내용을 함께 공유하는 형식을 벗어날 수 없다. 과연 이런 천편일률적일 수 밖에 없는 '책소개'의 형식을 <비밀 독서단>은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책읽기의 진부함을 극복하기 위한 비법은?

이런 진부한 형식에 대한 <비밀 독서단>의 해법은 '책으로 입털기'이다. 한 시간 여의 프로그램 동안 다섯 명의 단원이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하듯이, 책에 대한 소개는 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마치 요리비법의 '킥'처럼, '생명줄'을 통해, 단 한 줄로 책을 설득하고자 한다. 대신, 그 짧은 소개의 부족분을 채우는 것을, 그 책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출연자들의 입담이다. 


조승연이 소개한 라 로슈프코의 <잠언과 성찰>을 두고 벌인 데프콘, 신기주 기자와의 설전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전문가로서 야심차게 <잠언과 성찰>을 소개했지만, 그런 소개에 아랑곳하지 않고, 데프콘은 책이 너무 어렵다고 논박한다. 그리고 그 논박에 이어, 이런 잠언 식의 책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거나, 생각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신기주 기자의 반박이 뒤따라 조승연 단원을 무색하게 한다. 심지어 이 날의 책으로 뽑힌 신기주 기자가 소개한 발로 쓴, 사례가 풍부한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과 비교가 되면 <잠언과 성찰>의 자리는 더더욱 협소해 지고 만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그저 교양으로서의 책 소개를 넘어, '책을 가지고 물고 뜯는 재미를 주는 <비밀 기사단>의 묘미이다.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자신은 읽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그 책을 읽은 양 프로그램에 소개된 책들을 '소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런 책 소개 프로그램의 장단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맛깔나게 혹은 감질나게 소개되는 과정을 통해 결국 내 스스로 읽어보게 만들고 싶은 것이 그 장점이라면, 결국 '남의 말'에 불과한 소개를 듣고, 마치 자신이 읽은 것인양 '만족'하게 되는 단점이 그 반대편에 자리한다. 책을 안읽은 사회에서 그나마 이렇게라도 책을 점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냥 그렇게 책을 소비하고 말 가능성도 남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9. 1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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