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학생 책임지라'. 1960년 4월 25일 마산 강남극장 앞에 할머니들이 모여들었다. 소복처럼 흰 옷을 입고, 호미와 방망이를 들고 모여든 할머니들은 3천 명에 이르렀다. 시위 도중 사망을 당하고 부상을 당한 학생들을 목격한 할머니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 할머니들의 시위는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4.19 혁명이 62년이 지났는데도. 4.19 혁명이 발발한 지 62년이 지났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4.19 이래도 수많은 피를 흘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기에 4.19는 지난 세대의 '역사'처럼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있다면?, kbs1은 특집 다큐로 1960년 그 역사의 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한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가 여성들에게는 어떤 시대였을까?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문맹률이 28.8%였는데 그중 72.2%가 여성이었다. 딸은 초등학교도 안보내던 시대였다. 농업 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발돋음하려던 이 시대 상당수의 저연령층 미혼 여성들이 저임금 노동력이 되었다. 1963년 15세 이상 여성 인구 중 경제 활동 참여 인구가 37%나 되었다. 여전히 '가부장제'의 완고한 틀이 지배하는 사회, 하지만 여성들은 그저 시대의 변혁 앞에 그저 뒤에 머물지 않았다.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성들 
4.19의 도화선은 마산에서 지펴졌다.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던 마산 시민들, 시위 후 집에 돌아오지 않던 김주열 군이 얼굴에 최류탄이 박힌 채 떠오르자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비참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나',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그 시민들 사이에 당시 마산성지여고생이었던 이영자 학생도 있었다. 

당시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던 이영자 씨는 마산 시대 학도 호국단 회의에 참석한다. '시신을 봤는데도 가만있으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는 공감대 하에 대대적인 시위 참여 독려가 이루어 졌다. 학생들이 앞장 선 시위, 그중 25%가 여학생이었다. 여성이 초등학교 문턱조차 여전히 밟기 어려웠던 시절에 여학생의 참여는 대단한 것이다. 여학생들 만이 아니었다. 중년 여성들이 나서 시위대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 당시 미 국무부 보고서는 '중년 여성의 비중과 참여도가 놀랍다'고 명시할 정도였다. 

마산으로 부터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점차 서울로 퍼져나갔다. 당시 고려대 법학과 1학년이던 오경자 씨, 역시나 고등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출신이던 오경자 경무대를 다녀온 것을 자랑하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타도'에 있어 갈등은 없었다.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들어간 대학, 하지마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고 김주열 군의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학교 광장에 모여든 학생들 무리에 당연히 합류했다. '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가자 국회의사당'으로'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4.18 고려대학교 데모의 행렬 안에 오경자 씨가 있었다. 

'하천에 물이 흐르듯 사람들이 광화문을 향해 갔다'고 당시 여고 2학년이던 이재영 씨는 회고한다. 날마다 신문을 읽으며 사회 현실에 눈을 떴다던 재영 씨는 '엄마, 저 데모하려구요. 죽어도 어쩔 수 없다'며 시위대의 흐름에 자신을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경무대로 향하던 사람들은 삼엄한 경비와 최류탄 공세에 막히고 만다. 전차를 밀고, 수도관을 굴려 경찰 저지선을 뚫으려 하자 경찰은 총을 든다. 경무대 앞에서만 21명이 죽고, 172 명이 부상을 당한 아비규환의 상황, 5개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부산 혜화여고를 다니던 김남영 씨는 전봇대 뒤에 서있다 총을 맞았다고 한다. 발이 튀어오르는 것 같았다는 당시의 소회, 복숭아 뼈가 깨지고 평범한 여고생은 평생 장애를 지니고 살게 되었다. 

피를 흘리며 사람들이 실려가고, 친구가 죽어가자 외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을지로 등 서울 한복판에서만 100 여 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 중에는 중2 여학생도 있었다. 진영숙 씨, 시간이 없어 어머니를 보지 못한 채 시위에 합류했던 앳된 여학생은 주검으로 돌아왔다. 영숙 씨가 남긴 편지는 당시 시위에 합류한 학생들의 심정을 그대로 담았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와 싸우겠습니다. 
제가 철이 없는 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저의 목숨을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정부 수립과 함께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원조물자에 의존한 경제는 미국의 무상원조 중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와중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더구나 두 차례나 무리한 개헌을 감행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공권력과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상상을 초월하느 부정 선거를 감행했다. 투표함 바꿔치기 부터 3인조, 5인조로 조를 짜서 누구를 찍었는지 확인하는 부정 투표 행위 등에 투표율 97% 이승만 100%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당시 투표 참관인이던 오무선 씨의 남편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며 투표장을 뛰쳐나왔고 마산 시민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다 구속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문 후유증으로 20년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내 오무선  씨는 당시 시위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학생들의 추모제를 20여 년 째 손수 만든 음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학생과 시민들이 앞장서 '부정 선거'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시위는 4월 25일 교수 시국단 회의를 기점으로 정권퇴진 운동으로 변모한다. 4.19 세대만 해도 3.1 운동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날의 '만세 운동'을 기억하는 이들, 그리고 8.15 해방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한번 거기로 나선 것이다. 

'광목 자투리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해서 광화문을 향했다. 모여든 시민들은 자석에 쇳가루에 붙듯이 탱크에 올랐다. 천지개벽하는 듯한 시민들의 함성 소리, 품었던 태극기를 꺼내들었다.' 


이재영 씨가 남긴 기록이다.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며 기록으로 남기자며 써내려간 일기이다. '우리 형님들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 수송초등학교 어린이들도 합류했다. 이재영 씨는 그런 초등학생들을 앞에서 인도했다. 초등학생들, 그리고 군인들까지 합류한 시위대,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서 하야를 발표했다. 

당시만 해도 바깥 일은 남자들의 일이란 의식이 우선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4.19는 시민으로서의 사회적 책무 앞에 남녀가 없었고, 어른 아이가 없었던 시민 혁명이었다. 무엇보다 여성들은 '시민 의식' 앞에 남녀가 따로 없다는 생각으로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여학생들이, 중년의 여성들이, 그리고 할머니들이 앞장섰다. 그들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4.19 혁명의 주역들이다. 어느덧 80줄의 할머니가 된 그녀들, 손녀에게도 조차도 할머니의 역사는 새삼스럽다. 

by meditator 2022. 4. 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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