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6일 백상 예술 대상 작품상은 후보에 오른 sbs의 <펀치>, mbc의 <킬미힐미>가 아닌 sbs의 <풍문으로 들었소>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중 펀치는 권력과 밀착한 검찰의 비리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수작으로, 박경수 작가에게 '갓경수'란 별칭을 선사하며, 조재현, 김래원등의 연기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기에, <펀치>를 제치고 <풍문으로 들었소>가 작품상을 수상한데 대해 일각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아직 종영도 하지 않은 <풍문으로 들었소>가 작품상을 받은 것에 대해 정성주-안판석 콤비가 그간 jtbc와 작품을 해왔던 의심의 눈초리도 있었다. 결국, <풍문으로 들었소>가 작품상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후의 과정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 스스로 그 의문을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6월 2일 <풍문으로 들었소>는 6월 2일 30부작으로 그 긴 여정을 마무리하였다. 과연, 백상 작품상을 받을 만한 마무리가 되었을까?
블랙 코미디로서의 시도
아마도 <풍문으로 들었소>가 <펀치>와 동일하게 사회 비판적 시각을 다룬 내용임에도 백상이 <풍문으로 들었소>의 손을 들어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가 그간 우리 나라 드라마들이 걷지 않았던 '블랙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데 있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회 인상의 입을 통해 밝혀졌듯이 알고보니 조상 대대로 살던 집도 아니고 선친 대에서 시골 양반 집을 사들여 들인, 그 태생적 존재로 부터 속물적인 한정호 일가의 집이 바로 블랙 코미디 <풍문으로 들었소>의 배경이다.
존재 자체가 코미디같은 이 장소를 배경으로 한 편의 연극을 보듯 우리나라 최고 법무법인 한송의 대표 한정호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 그리고 비서, 집사, 찬모 등 식솔 들이 연극같은 풍자의 장을 벌인다.
최고 법무법인의 대표이지만 선친이 물려 준 인맥과 부를 배경으로, 아버지 대의 방식으로 '갑'의 존재를 이어가는 한정호, 하지만 그의 공식적 직함과 거들먹거리는 그의 위세와 달리, 드라마 속 유준상이 연기하는 한정호는 한없이 경박하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할 정도로 체신이라고는 없다. 그의 기분에 어긋나면 대뜸 주먹이 날아가고, 칼을 휘두르는 그의 감정적 태도가, '갑 중의 갑'의 위선을 가장 극명하게 그려낸다.
그의 아내 유호정이 연기하는 최연희라고 다를 것이 없다. 한없이 우아한 척 하지만, 비서의 도움 없이는 그 무엇도 스스로 할 수 없는 한송의 안주인, 하지만 그녀가 말 끝마다 내뱉는 언사는 '갑'으로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다. 이들 부부를 중심으로, 그들이 '가솔'이라 지칭하는 한정호 일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정호 집안의 일거수 일투족을 결코 놓치지 않고 공유한다. 그리고 드라마의 제목처럼, 이 집안의 모든 일들은 시시각각 곧 '풍문'이 되어 '갑'의 세계에 떠돌게 된다.
제 아무리 코미디언 같은 한정호라도 '한송'이라는 권력을 배경으로 '갑'으로 위세 등등하게 살아가는 중, 이 집안의 궤멸은 뜻밖에도 그의 아들 한인상(이준 분)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가 사랑하게 된 여자가 아직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그리고 가진 것없는 서형식(장현성 분)의 딸인 서봄(고아성 분)이고, 그녀는 만삭의 몸을 한 채 한정호의 집으로 쳐들어 온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정호 일가의 갑질은 가장 만만해 보이던 '을'인 서봄으로 인해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다.
을들의 존재로 부터 비롯된 '갑'
그렇게 한정호 일가에 불청객으로 등장한 서봄으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 한정호의 아성, 드라마는 이물질같은 서봄을 소리소문없이 내치려다, 풍문때문에 자신의 집안에 맞아들이고, 그녀를 이종교배의 교본으로 삼기 까지의 이야기를 갖은 해프닝으로 끌어간다.
그리고 한정호 부부가 벌이는 엎치락뒤치락 해프닝의 맞은 편에서, 쫓겨날 뻔하다가 겨우 며느리로서 생명 보전을 하고, 나아가 특유의 영민함으로 한정호 일가의 작은 마님으로 등극하게 된 서봄의 인생 역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하면, 그 흔한 재벌가의 신데렐라 스토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풍문으로 들었소>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한정호 일가의 작은 마님으로 자족하던 서봄이 자신의 권력이 결국 꼭두각시같은 것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한정호가 '가솔'이라 지칭하던 집안 사람들에게서도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서봄의 작은 아버지 서철식, '한송'의 비서 민주영을 중심으로 윤제훈, 유신영 변호사가 합류한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을 알린다.
마지막 회 텅빈 집안에 홀로 남겨진 한정호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정호, 이 갑중의 갑을 채우는 것은 결국 '을'이라는 것을 드라마는 증명한다. 그가 '갑'일 수 있는 것은, 그 '갑'의 권위에 굴복하고, 갑의 떡고물을 받아 챙기고, 갑의 그늘에서 자신을 죽이며 살아가는 '을'들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극중에서 보여지듯이 가솔들의 파업 한 번으로 한정호 부부가 졸지에 자기 집을 버리고 나가야 하는 해프닝에서 보여지듯이, 결국 그의 강고한 성체 역시 '을'들이 없이는 존재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저 엿듯는 사람들에서 점점 드라마의 중심부로 진입한 '가솔'들을 통해 '을'의 존재론적 정당함을 그려낸다.
이땅의 을들에게 '연대의 희망'을
거기에 덧붙여, 포기하지 않는 싸움이 보여주는 가능성도 더한다.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폐인이 된 민주영의 오빠, 그리고 역시나 어깨가 꺽어진 서철식, 그들은 과거 한송이 책임진 재판의 희생자들이다. 재판은 종료되었지만, 그들의 상처와 고통은 끝나지 않은 현재형으로 그들 본인과 가족에게 드리워져 있다. 한송의 녹을 먹는 처지이지만 민주영은 그 현재형의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밥벌이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한송에서 돈을 벌지언정, 그로 인해 자기 오빠의 고통을 상쇄시키지 않고, 싸움을 시작한다. 그녀로 부터 시작된 싸움은 서봄의 삼촌 서철식을 설득하고, 그리고 서봄, 한인상, 윤제훈, 유신영을 설득하여, 거대한 한송을 상대로 한 해볼만한 싸움이 되었다.
블랙 코미디로 시작된 드라마는 중후반부에 들어서 진지해지기 시작한다. 주인집 이야기를 엿듣고 뒷담화나 하던 을들이 이 집안에 이물질처럼 들어온 서봄과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감히 얼굴조차 마주보기 저어하며 '가솔'의 지위에 감읍하던 사람들이,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법적 존재를 인지하고, 당당하게 자기 존재론적 주장을 내세운다. 한송의 또 다른 '을'이었던 민주영을 비롯한 유신영, 윤제훈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이 손을 맞잡는다. 그러자, 그저 한 사람으로는 무기력한 반발이었던 해프닝이 이제 해볼만한 싸움이 되었다. 비록 겨우 엄청난 연봉을 뒤로 하고, 월급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고,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한정호의 눈치를 보던 때와 다르게 웃음이 절로 난다. 한정호의 의리의리한 집에 눌려 보잘 것 없던 서봄의 좁은 집이 이제 들끓는 사람들과 그들의 떠들썩한 웃음으로 들썩인다.
갑중의 갑 한정호에 대한 풍자와 조롱으로 시작한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렇게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어떻게 사는게 행복한 삶인지. 그리고 한인상, 서봄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의 서두에서 처럼, 이 땅의 젊은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삶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답에 대한 예시를 <풍문으로 들었소>를 통해 모범적으로 제시한다. 아버지 세대가 사는 삶의 방식과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면, 손쉬운 출세가도가 아닌 길을 선택한다면, 그리고 노예와 같은 삶에 주저앉지 않는다면,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끼리 손을 잡는다면, 어쩌면 우리가 손쉽게 '갑'이라며 포기해버린 거대한 성채조차도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마치 '한 뼘이라도 여럿이 손을 잡고,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절벽을 오르는 담쟁이'(도종환의 시 담쟁이 중)처럼 말이다.
물론 <풍문으로 들었소>가 제시한 답안은 너무나도 모범 답안이라, 환타지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6월 2일 한겨레 신문의 정태인씨의 칼럼에서 처럼, 정규직이 된다한들 30년을 모아도 집을 살까말까한 시대, 하지만 그 조차도 상대적 실업률이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차라리 혁명을 준비하렴>이라는 그의 말처럼 '고립된 을'로 숨죽여 쓰러지지 말고, 담쟁이처럼 절벽이라도 넘어 볼 가능성을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한 것만으로도 <풍문으로 들었소>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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