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개봉한 그의 극영화 입봉작 <환상의 빛(1995)>이래로, 2016년작 <태풍이 지나가고>까지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은 매우 다른 상황의 다른 이야기를 해오면서도,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결국은 기승전 고레에다가 되는 고레에다 식의 세계관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곤 한다. 하지만, 막상 <태풍이 지나가고>를 보고 나면, 이렇게 '직설적'으로 '인생'에 대해 질문을 던진 영화가 있는가 싶으니, 그런 면에서 <태풍이 지나가고>는 고레에다 식이면서도 기존 고레에다 영화가 우회적으로 접근했던 질문이 표면화된, 고레에다 월드의 결절점인 영화이다. 




여전한 '상실'-모두가 되고 싶은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언제나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에서 그래왔듯, 변함없이 <태풍이 지나가고>에도 '죽음'이 등장한다. 료타의 평생 무능력했던 아버지가 반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드리운 상실은 깊지 않다. 어머니(키키 키린 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물건을 다 정리해서 버렸고,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인 료타(아베 히로시 분)가 어떻게 평생을 같이 살았는데 그럴 수 있냐고 묻자, 50년을 같이 살았으니 그럴 수 있다고 명쾌하게 대답할 그런 관계들이다. 

평생을 무능력해서 어머니가 숨겨놓은 돈을 찾아내는데 신통한 능력을 지녔던 아버지, 심지어 어릴 적 아들이 모았던 우표책마저 전당포에 맡기는 아버지, 그래서 평생을 산 아내가 단번에 그의 흔적을 지워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아버지, 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아버지이지만, 이제는 중년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료타에게 사랑받지 못해 불편한 존재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료타 아버지의 부재'가 아니다. 그런 이전 세대 아버지가 '죽음'으로 '부재'한 것과 달리, 이젠 '이혼'으로 인해 '부재'당할 위기에 처한 현재의 아버지 료타이다. 

영화 속 상실은 중층적이다. 료타의 아버지가 죽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아버지는 죽음 이전에도 료타에겐 '부재'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가 미웠음에도, 아버지가 자신의 직업인 소설가를 인정해 주지 않아 늘 불만이면서, 그래서 어쩐지 자신이 없는 료타는 이제, 그 자신이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상실'의 대상이 되고, 동시에 그 자신에게는 이혼한 이후에야 새록새록 소중해 지는 '가족'을 상실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인생?- 행복은 무언가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다. 
한때는 촉망받았던 소설가였지만 이젠 흥신소 일이나 하며, 그나마 생긴 돈도 경륜으로 날려버리는 '루저'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이면에는 세대를 막론한 '아버지'에 대한 존재론과, 인간 혹은 협소하게는 가족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채우는 '상실', 나아가 인생에 대한 질문을 영화는 하고 있다. 

여전히 글을 씁네 하며 인상적인 고객의 말을 적은 메모로 한 벽을 가득 채우고, 시간만 나면 책상에 앉지만, 쓰레기통 같은 방에, 혹시나 전기나 가스 요금 집달리가 올까 숨죽이는 처지, 아들에게 미즈노 글러브를 사주고 싶지만, 돈이 생기면 차곡차곡 모으는 대신 경륜장으로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소설'에 목숨을 걸고 '가족'마저 잃은 그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시대 탓을 하며 무능력으로 일관했듯, 그 역시 때를 기다리며 그 때를 위해 어머니의 집을 뒤져 아버지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거나, 누이에게 손을 벌리며 궁여지책으로 삶을 때운다.  

아버지의 유품 중 값나가는 것을 찾아, 혹은 그 옛날 아버지처럼 어머니가 몰래 숨겨놓은 돈을 찾기 위해 아들과 함께 어머니의 집에 들른 날, 태풍이 몰아치고 아들을 데리러 온 아내와 함께 온가족이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혼을 했음에도 여전히 료타와 그의 아내 교코를 한 가족처럼 한 방에 아들을 사이에 둔 이부자리까지 펴주며 '가족'의 회복을 도모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소박한 소망 사이로, 료타와 쿄코는 신경전을 벌이고.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오히려 분명해지는 건, 아내의 뒤를 밟으며 그녀가 만나는 새로운 남자에 집착하던 료코도 이젠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되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아내가 만나는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가 저지레 해놓은 지난 시간이 아내, 그리고 아들과의 '가족'이란 시간의 균열을 분명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어머니의 친절함으로도, 그리고 료코의 은근한 수작으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하지만 그렇게 되돌이 킬 수 없는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내에게 돈을 주지 않아 아들을 못나게 될 지도 모를 처지의 료타, 하지만 그는 아내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아들 싱고의 아버지였다. 한밤 중 그 옛날 아버지와 료타가 그랬듯이, 아들 싱고와 함께 태풍이 몰아치는 놀이터로 숨어든 아버지 료타. 그 시간을 통해, 아내에게 자랑스레 만화 원작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자랑했다가, 아내의 때늦은 지청구를 들은 료타는 뒤늦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런 아들의 질문에 어머니는 담백한 답을 준다. '원하던 모습이 아니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평생 돈만 생기면 들고 나가는 아버지를 피해 돈을 숨겼던 어머니, 겨우 마련한 연립 주택에서 기뻐했던 것도 잠시, 이제 40여년을 살고 조만간 이곳에서 생을 마칠 것이라 생각하는 어머니는 하지만 아들이 쥐어준 만 엔 한 장에 기뻐하고, 오지않는 아들 대신, 아들이 심은 귤나무와 거기에 날아든 나비에 위로를 받고, 오늘도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다. 되돌아 보면 그녀의 인생은 고달팠고, 여전히 연금을 받는 나이에도 딸의 반찬을 해주고, 아들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지만, 그녀의 얼굴엔 그늘이 없다. 이혼한 아들 내외의 이부자리를 한 방에 깔 만큼 귀여운 뻔뻔함이 그녀의 매력이다. 그런 긍정적인 어머니는 료타에게 삶을 '단순'하게 살라고 충고한다.

그 충고는 경륜을 해서라도 일확천금을 모아 아들에게 폼나는 아빠가 되거나, 다시 소설을 써서 되돌릴 수 없는 가정에 연연해 하는 대신, 소설이 안되면 만화 원작이라도 쓰고, 그래서 돈을 벌어 아들을 만나고, 그래서 태풍이 지나가는 그 밤처럼, 아들과 함께 추억을 만드는 그 시간의 소중함을 영화는 삶의 소중함으로 치환한다. 가족도 잃고, 이젠 그가 매달렸던 소설마저 잃었지만, 하지만 삶은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연다. 이런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제 의식은, '가부장제'와 '성장 지상주의'라는 세상의 화두을 뒤엎은 삶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세속의 잣대로 돌아가는 세상 너머의 삶을 살만한 가치에 대한 질문이자 고레에다 식의 해석이다. 





이런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제 의식은 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관통한다. <환상의 빛> 속 남편을 잃은 이유를 몰라 헤매이던 아내는 어느 덧 새로 꾸민 가족 속에서 위안을 얻고, 아버지를 매개로 만난<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네 자매는 오래된 할머니의 저택에서 새로운 가족을 꾸린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버지는 아들을 잃고나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 그들은 살면서 소중한 것을 잃지만, 료타 어머니의 말처럼, 인생은 그렇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한, 또 다른 미래가 열리고, '포기'라지만, 그 '포기'로 인해 다른 소중한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고레에다 감독은 <태풍이 지나가고>를 통해 가장 직설적으로 선언한다. 요시코 할머니를 통해 그간 동심원처럼 퍼져갔던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에 대한 천착이 귀결된 지점이다. 

이런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 이야기들, 다른 의미로 '상실'의 시리즈들은, 가깝게는 '가족'간의 상실이지만, 그 저변에 일본 사회가 겪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로 인한 '상실'에의 위로를 담는다. 그리고 그런 감독의 위로와 상실에 대한 해석이 우리 나라 관객들에게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이유는, 우리 사회도 그와 다르지 않은 상실감에 빠져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기에, '상실'을 겪고서도, 그 속에서 살아갈 '희망'을 찾아내는 감독의 잔잔한 위로는 언제나 반가운 화두였었다. 
by meditator 2016. 8. 6.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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