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 첫 회를 방영했던 sbs의 수목 드라마 <질투의 화신>, <w>와 <함부로 애틋하게>의 스타들이 포진한 양 강 구도에서, 1회 7.3%, 2회 8.3%(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로 거뜬히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양호한 성적과 달리, 1,2회를 방영한 직후 <질투의 화신>과 관련하여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극중 기상 캐스터로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캐릭터 상 설정이었다. 




빨간 출입증의 기상 캐스터, 표나리
실제로 기상 캐스터로 일하는 사람의 입장까지 등장하며(실제 기상캐스터가 본 질투의 화신, 사실 왜곡 화난다, 스타뉴스) 온라인 상에서는 극중 기상 캐스터로 등장하는 표나리(공효진 분)의 처신과 표나리를 대하는 방송국 사람들의 적나라한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극중 표나리는 3회에 설명되는 것처럼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아나운서 학원을 다니고, 몇 번의 낙방 끝에 아나운서 대신 기상 캐스터가 되었다. 7시 뉴스의 마지막 5분을 책임지는 경력 5년 차이지만 여전히 정규직 아나운서들 앞은 물론, 방송국에서 기를 못펴는 비정규직이다. 거기에 뉴스 디렉팅을 맡은 부조 피디의 '엉덩이를 좀 더 빼라'는 식의 성적 수치심을 주는 디렉팅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 아르바이트 명목으로 갖은 잔심부름까지 하는 형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기상 캐스터의 존재론이다. 3회에 드러나듯이, 서숙향 작가가 표나리를 통해 그리고자 한 것은 정규직의 파란 줄 출입증을 가지지 못한, 빨간 줄의 비정규직 기상 캐스터이다. 거기에 분명 뉴스의 일부이면서도, 보도국의 일원으로 대접하지 않는 방송국의 노골적인 위계 질서와, 방송이 여성을 다루는 관습에 대한 '통찰'이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의견은 '성적'으로 희화화된 표나리와 노골적인 '을'의 존재로 인해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여자 아나운서'를 '뉴스의 꽃'이라고 일찌감치 규정했던 세상에, 거기에 '연성화'되어가는 방송에서, 케이블을 위시한 각 프로그램의 여성 캐스터들의 '야한' 옷차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질투의 화신> 속 표나리의 노골적인 을의 처지는 그 누군가에게는 모욕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현실적인 설정으로 '공감'을 주는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 속 기상 캐스터의 설정이 줬던 불편함은 '진실'과 '왜곡'의 경계에서 문제를 던진다. 이렇게 서숙향 작가의 <질투의 화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미묘한 지점'에 촛점을 맞춘다. 

유방암에 걸린 남자, 이화신 
방송국내 '을'인 기상 캐스터 표나리의 수모로 이어졌던 1,2회에 이어, 3회는 남자 주인공 이화신의 수모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이미 첫 회에서 이화신의 가슴을 '탐'하여, 그 조차도 여성에 의한 성희롱 논란을 빚었던 드라마는 그 '미묘한' 접촉을 이화신의 유방암 설정으로 이어간다. 부담스레 이화신의 가슴에 집착했던 표나리는 그 이유를 유방암에 걸렸던 할머니, 어머니와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라 밝히며 '성희롱'의 경계를 넘어선다. 자신에 대한 집착이라 무시했던 이화신은 하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병원 치료 과정에서, '유방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기에 이른다. 

결국 이화신은 여성들이 입는 '분홍색' 가운을 입고, 유방암 진단을 위한 촬영을 하게 된다. 건강 검진을 해본 여성들이라면 공감할 그 어떤 검진보다도 고통스럽고, 때론 모멸스럽기까지한 유방암 진단 촬영을 가슴이 없는(?) 남자 이화신이 하게 된 것이다. 가슴이 없어서 쥐어짜서 촤영을 해야만 하는 과정을 드라마는 애교스럽게(?) 그 옛날 영화에서 남녀 상열지사를 물레방아로 대신하듯, 과즙이 쥐어짜지고, 호두가 부서지는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표현해 냈다. 하지만 어거지로 유방암 촬영기 앞에 가슴을 짖눌리는 이화신의 모습에서, 앞서 표나리의 기상 예보 과정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경계에 다시 한번 서도록 만든다. 과연 저 장면을 유방암 진단 과정의 '리얼'함으로 웃어 넘겨야 할까? 아니면, 표나리가 이화신의 가슴을 주무르는데서 느꼈던 불편함처럼, 또 다른 성적 '희롱'으로 보아야 할까? 



드라마는 마치 장군멍군처럼, 여주인공 표나리에 이어, 이화신에 대한 경계성의 설정을 통해 서사를 풀어나간다. 과연 이런 것들은 '노이즈 마케팅'처럼 '논란'을 통한 화제성의 부추김일까? 

아니 오히려 <질투의 화신>이 하고자 하는 바의 이야기가 바로 그 '경계'인 듯하다. 극중 남자 주인공 이화신은 가족과 '절연'에 가까운 상태다. 그 이유는 바로 촉망받는 기자였던 그가 자신의 형인 이중신이 했던 사업체의 가짜 차돌박이 사용 보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 보도로 인해 이화신은 기자상을 받았지만 도피하듯 지난 3년간 방콕에서 보냈다. 이화신은 어차피 형의 가짜 차돌박이 사용은 보도가 될 사안이었기에 동생인 자신이 먼저 해서 언론의 '가차없는' 뭇매를 피해 정확하게 보도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그 결과 형의 사업은 망했고, 형의 딸인 빨강을 비롯한 가족, 심지어 형의 전처까지 그를 '사람'처럼 보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이화신의 진심과, 그의 진심이 드러나는 현실은 '공감' 대신, 그를 천하에 형까지 팔아먹는 나쁜 놈으로 '모욕'한다. 아니 '곡해'한다. 작가는 그런 '오해받기 딱 좋은' 경계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려가고 싶은 것은 아닐까? 세상은 한 발 물러서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신, 갈수록 니 편과 내 편, 남자 편과 여자 편을 갈라, 서로의 편먹기와 그 편의 성을 공고히 하는 전열을 정비하는데 골몰한다. 제반의 사건들은 조금의 이해 대신, 과연 이것이 내 편의 전략에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의 전술적 가치로 나뉘어지고, 그런 가로세로 구획 정리가 바쁜 세상에서, <질투의 화신>은 가장 미묘한 경계로부터 오해를 불러 일으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위험천만한 시도가 대중의 공감을 살지, '모욕'만을 남기며 사라질지는 서숙향 작가의 내공에 달려있다. 부디 그 경계의 서사에 행운을. 


by meditator 2016. 9. 1.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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