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 10회 2015년의 박해영(이제훈 분)은 이재한(조진웅 분)으로부터 '우리 팀 막내'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 막내가 이제는 팀장이 되었음을 전한다. 그 소식을 들은 이재한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한다. 팀장? 쩜오가? 그리고 반문한다. 그 팀은 잘 굴러갑니까? 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운전은 못해도 강단은 있으니, 잘 굴러갈거라고.
<시그널> 과거에서 강력반에 배치됐지만, 경찰제복조차 벗지 못한 채 선배들의 심부름이나 도맡는 여경 차수현(김혜수 분)을 선배 조진웅은 말 끝마다 '점오'라 부른다. 한글 맞춤법 표기에 따르면 '점오'라 씌여져야 하지만, 어쩐지 '점오'라 읽으면 제 느낌이 살지 않는 '쩜오'. 이는 1이 되지 못한 0.5를 뜻한다. 즉 아직 온전한 한 사람의 구실을 하지 못한 부족한 사람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청 홍보 차원에서 강력반에 배치됐지만, 사건 수사는 커녕 운전조차 못하는 차수현은 말 그대로 쩜오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쩜오가 있다. 바로 어릴 적부터 사회 정의에 앞장서는 경찰이 되겠다는 의욕을 실현시킨 신참 토끼 경찰 주디 홉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경찰학교 수석 졸업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경찰 등록조차 하지 못한 채 주차 단속원으로 배치된 주디는 역시나 아직 온전하게 경찰로 대접받지 못하는 쩜오다.
이렇게 강력반이지만 모든 것이 어설픈 차수현이나, 신입 경찰이지만 배치조차 받지 못한 채 주차 단속이나 하는 주디는 경찰이지만, 온전히 그 몫을 해낼 수 없는 쩜오다. 하지만 그녀들이 쩜오인 것은 경찰이라는 직무에서만이 아니다. 남성들의 전유물인 강력반에 홍보용으로 배치된 차수현은 처음 머물 숙직실조차 없는 '여성'이다. 숙직실은 어찌어찌하여 마련되었지만, 임무에서 그녀의 몫은 쉽사리 얻을 수 없다. 가장 무뚝뚝한 선배 이재한이 '니가 다방 레지냐'며 화를 내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선배들의 커피 심부름에 서류 정리 따위 '강력반'이랑 무관한 허드렛일이다. 그녀는 의욕을 불태우지만, 차량 운전부터 사건 수사까지 그 어느 것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그나마 이재한 정도가 툴툴거리며 자신의 편의에 따라 그녀를 수사에 동반하는 정도지, 다른 선배들에게 그녀는 그저 있으면 보기 좋은 꽃같은 존재일 뿐이다.
설정상 주디 역시 여성 경찰이지만, 주디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보다도, 포식자가 아닌 '토끼'라는 그녀의 생물학적 정체성이다. 물소 서장에서 부터, 북극곰, 코뿔소 등 생물학적으로 포식자의 DNA를 가진 거대한 경찰 동료들 사이에서 왜소한 토끼인 그녀는 한 눈에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생물학적 불평등의 전사를 극복하고 진화한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의 도시 주토피아라지만, 정작 그곳을 지배하는 건 여전히 동물들의 DNA 정체성에 따른 보이지 않는 차별이다. 거기서 경찰이 되겠나고 나선 토끼는, 강력반의 여성 차수현만큼이나 쩜오이다.
차별없는 공정 사회를 지향한 우화, 주토피아
애니메이션이란 장르가 무색하게 주토비아가 드러낸 상징성은 현실적이다. 한때는 포식자였던 육식동물과, 그 육식동물의 먹이였던 피포식자인 초식 동물들이, '진화'하여 한데 어울려 살아간다는 주토피아는, 마치 강대국과 약소국으로 뒤엉킨 우리 세계의 이상향과도 같다. 하지만, 주토피아를 이상적으로 바라본 주디의 생각이 순진했음을 드러낸 연쇄 실종 사건과 그 배후는 '진화'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불공정한 세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심지어, 그 불공정을 이어가기 위해, '역이데올로기'를 차용하는 '공포' 정치는 '무기' 산업을 기반으로 한 내전과 긴장으로 점철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특히나, 가장 평화로운 상징으로 '공포'를 무기로 내적 갈등을 조장하는 벨 웨더 시장의 정략은 현 한국 사회에서 너무도 익숙한 정황이다.
그런 이상적이지만,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주토피아를 이상적으로 여기며, 그 속에서 정의로운 토끼 경찰이라는 꿈을 일궈나가고자 애쓰는 주디의 모험은, 곧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찾는 과정과도 같다. 수석 졸업임에도 등록조차 하지 못한 채 주차 단속원으로 던져진 편견에 맞서, 불공정한 세상의 민낯과 만나고, 그 속에서 자기 안에 내재화되어 있던 역시나 불공정의 논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깨나가는 주디의 도전은, 그저 평범한 히어로물의 성장담을 넘어선다. 즉, 그저 약자였던 초식 동물의 성공담을 넘어, 초식 동물이라는 피해 의식을 넘어, 자신 안에 내재화한 또 다른 약육 강식의 논리를 발견하고 깨뜨려 나가는 것은, 의식적으로 진일보한 자각인 것이다. 즉, 약자로서 초식 동물의 성취를 강자인 포식자에 대한 제압을 넘어, DNA의 속성을 넘어 강자와 약자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주토피아>는 끊임없는 불평등으로 점철된 이 사회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담는다.
거기서 쩜오, 즉 사회적 약자였던 주디는, 스스로 약자의 역할론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약자의 피해의식을 넘어, 주토피아가 가진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이것은, 최근 마블 코믹스 버전의 헐리우드 영웅담의 수준을 뛰어넘는 해결책이다. 그저 쩜오였던 토끼 경찰은 주차 단속원을 넘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임을 증명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던 또 다른 차별 의식을 깨고, 주토피아의 근본적 모순을 해결하는 진정한 해결사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닉 와일드의 도움을 받던 주디는 그와 진정한 파트너쉽을 가진 한 사람의 경찰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가부장적 사회의 해결사, 차수현
강력반의 꽃으로 커피 심부름이나 하던 차수현은 자신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던 이재한의 사건을 도우면서, 그녀가 원하던 강력반의 일원으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의욕이 앞서 홀로 홍원동 사건 수사를 하던 차수현은 연쇄 살인범의 덫에 걸려 검은 비닐 봉지를 뒤짚어 쓴채 죽음에 맞선다. 겨우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건졌지만, 사건의 트라우마에 고통받던 그녀에게, 무뚝뚝하게 다가온 이재한은, 그 거구의 자신 역시 그녀와 다르지 않음을 토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당위성을 진솔하게 설득한다.
2015년의 차수현은 그 예전 꿈많은 여경대신, 경찰을 그만두려는 자신을 돌려 세웠던 이재한의 실종을 밝히고자 하는 맹목적 본능만이 남은 노련한 형사가 되고, 그녀의 맹목성과 과거와 통신한 박해영의 뜻이 어울려 본의 아니게 이재한이 풀어내지 못한 미제 사건의 해결사가 된다. 그저 꿈많던 강력반 쩜오는, 스스로 여성 가해 사건의 피해자에서 떨쳐 일어나, 다수의 여성이 희생된, 결국은 남성 중심 사회의 폐부를 도려내는 전사로 거듭나게 된다. 역시나 차수현은 그저 능력있는 미제 사건 전담팀의 팀장일 뿐만 아니라, 10회에서 보여지듯 그녀 스스로 갇혀있는 트라우마로부터 스스로 탈피하는 승화의 과정을 겪는다. <시그널>의 전개는 이재한의 미스터리한 실종과, 그가 못다한 사건의 해결이지만, 동시에 그 과정은 이제는 팀장이 된 차수현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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