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역적>이 반가운 것은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민중' 사극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허균의 손에 의해 각색된 인물 홍길동이 아닌, 역사적 인물로서의 홍길동을 다루겠다며 포부를 밝힌 이 드라마는 조선의 3대 도적 중 1인, 그래서 전설이 되고, 결국 유구의 문학 작품의 주인공으로 남게 된 도적 홍길동을 다룬다. 조선의 3대 도적이라 일컬어 지는 임꺽정, 장길산, 그리고 홍길동, 이들이 전설적 도적이 된 것은 그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을 잘해서가 아니라, <역적>의 부재 '백성을 훔친 도적'처럼 '백성의 편에 선 의적'이라는 의미에서다. 이들 중 '임꺽정'과 '장길산'은 이들의 일대기를 다룬 문학 작품은 물론, 드라마로 이미 만들어진 바 있지만, 이들과 달리 '허균'에 의해 각색된 홍길동은 언제나 그 본 인물이 가진 서사보다, 율도국을 만든 귀신같은 영웅 홍길동으로 '둔갑'되곤 했다. 그러던 홍길동이 뒤늦지만 이제서야 연산군 시절 조선을 호령했던 의적으로 제대로 돌아온다.
황진영이 그려낼 신선한 사극
<역적>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 황진영이다. 일찌기 2007년 kt 디지털 공모전 대상으로 그 필력을 인정받기 시작, 영화 <쌍화점(2008)>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황진영'이란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특집 단막극 <절정>에서였다. 2011년 8월 15일 방영된 <절정>은 동명의 시를 쓴 시인 이육사의 일대기를 비록 단막극이지만, 일제 시대를 살아간 젊은 지식인의 고뇌를 그 어떤 드라마보다 실감나고 감명깊게 다루었단 평가를 받았다.
이어 황작가는 2013~2014년에 방영된 MBC수목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을 통해 고증이 어려운 백제사의 영역을 '사극'의 궤도에 맞춰 적절하게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100회가 넘는 일일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주제 의식을 관철시켜낸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감독의 영역이 강조된 <쌍화점>과 달리, 작가의 시각이 두드러진 <절정>과 <수백향>에서 기존 역사극과는 다른 구성을 가지면서, 시대적 과제에 충실한 주제 의식을 되살려내는 장기가 황인영 작가의 장점이다. 또한 황인영 작가는 <쌍화점>에서, <절정>, <수백향>까지 역사물이지만, 결코 '역사'란 테두리엔 두루뭉수리하게 묶을 수 없는 다양한 시대를 각각 그 시대적 특징을 잘 살려낸 작가라는 점에서 <역적>이 더욱 기대를 크게 한다.
이렇게 안정된 필력과 주제 의식이 돋보이는 황인영와 함께 <킬미힐미(2015)>의 김진만 연출이 합류했으니 <역적>은 든든한 양 날개를 얻은 것인 셈이다. 그런 역적의 든든한 날개에 힘찬 발짓으로 비상의 날개를 펴도록 한 사람은 다름아닌 1, 2회를 이끈 아모개 김상중이다.
아기 장수 설화와 아비 아모개
아모개, 이름이 아모개라는 말은 이름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말로 '아무개야'라고 막 부르던 그 '아무개'를 노비 문서에 써넣으려다 보니 '아모개'가 된 아모개, 그는 양반가의 씨종(대대로 내려가며 종노릇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비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도 주인을 하늘이라 생각하며 그 그늘에서 움츠려 살았다. 그의 아내는 우는 아이를 두고 주인집 아이에게 젖을 물렸고, 그는 주인집 아이를 다치게 한 자기 자식의 손을 짖이기려 했다. 그리고 그처럼 그의 아들도 주인집 아들 대신 회초리를 맞았다.
그렇게 씨종으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살던 아모개, 하지만 주인집 자식을 다치게 한 자식의 손을 차마 돌로 내려칠 수 없는 그 순간 그의 삶은 다른 선택의 길에 들어선다.
어느 '의적' 드라마에서나 그렇듯 가지지 못한 삶의 운명을 타고 난 그들은 자신을 겁박하는 운명에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다 못해 그 사슬을 깨뜨리고 만다. 그 '클리셰'의 '의적' 서사를 <역적>은 우리 전래의 '아기 장수' 설화를 통해 개연성을 더한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장수' 아기, 백성에게서 태어난 '장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화는 이를 '반역'의 징조라 해석했고, 그를 두려워한 부모는 어떻게든 아이의 힘을 숨기려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법, 아모개의 아들 길동이 아비의 당부를 받고 스스로조차 힘이 죽었다 느껴질 정도로 숨기려 애를 썼지만 어미의 위기에서 참을 수 없었듯이, '장수'가 될 수 없는 아기는 '반역'의 길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슬픈 영웅의 서사인 것이다. 체제를 뒤집어 엎을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을 '아기 장수'를 통해 풀어냈던 이 설화는 여러가지 버전으로 전해내려져 온다. <역적>은 이 설화의 모티브를 아모개 네 집안을 통해 영웅의 탄생 설화의 새로운 버전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아기 장수' 설화를 통해 길동이란 캐릭터의 개연성을 부여한 드라마는 그 비극적 운명을 위해 이름조차 없는 아버지, 하지만 그 누구보다 '애비'로서의 그 몫을 다하려 한 아모개란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내내 씨종으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그, 하지만 길동의 힘이 '씨종'으로서의 운명을 뛰어넘는다 깨닫자, '종'으로서의 숙명을 벗어던지기로 결심한다. 주인댁 썪은 명태를 한 궤 짊어지고 길을 떠난 그는 잠깐의 저어함도 없이 개성 도둑패의 앞잡이가 된다.
그렇게 담을 넘기를 주저하지 않고 돈을 모은 그는 아들들이 원하는 공부를 시키기 위해, 힘이 장수인 아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면천'의 기획을 주도한다. '외거'의 삶까진 순조로웠지만, 결국 어음까지 넘긴 면천의 길목에서 아모개가 숨겨놓은 재화에 눈이 먼 '주인 내외'의 획책이 아모개네 가족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삼시 세끼 뜨신 밥 먹고, 자식들 하고 싶은 거 하고, 위험한 운명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도적질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비의 행보는 결국 '노비'라는 운명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발이 부르트고, 바람처럼 떠돌면서도 가족을 지키려 했던 아비는 결국 낫을 든다. 뒤늦게서야. 그러곤 말한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이라고.
이렇게 <역적>은 '아기 장수' 설화와, 아모개의 부정을 통해 1,2회만에 홍길동이란 의적의 탄생 설화를 완성한다. 양반이 자기 필요에 의해 주욱 늘어서게 만들고 파는 물건, 노비, 하지만 드라마는 그 '노비'로 규정지어진 '인간'이 삶을 곡진하게 그리며 민중 사극으로서의 <역적>에 든든한 시동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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