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등지에서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 자국의 자본과 자국의 노동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국가 이익 우선주의'라는 외피를 두르고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국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현상이다. 그 선봉에 선 것은 대선 과정에서 막말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국 우선주의'를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자국의 보호무역주의와 반 이민주의 정책을 위해 '펜스'도 마다하지 않고, '동맹'도 깰 수 있다며 세계를 위협한다. 하지만 미국이 두드러질 뿐 세계 어느 나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이야, '아베' = 일본 국가 주의로 상징되듯 헌법 개정을 전제로 강력한 일본을 구축하여, 다시 한번 '팍스니포니카(PAX-NIPPONICA)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국가주의적인 정책은 일반으로 들어오면 '반한 시위' 등의 민족주의적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세계적인 민족주의의 경향이 도대체 영화 <분노>와 무슨 상관이 있단 것일까?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 전체의 구조화된 질서, 의식, 행동 체계는 개인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이를 아비투스(habitus)로 정의내리고 있다. 즉, 우리 사회의 아비투스가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고 한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분노>는 바로 그 일본판 아비투스의 민낯을 드러낸다.
일본판 아비투스의 민낯
자국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막겠다는 트럼트처럼 일본의 거리에서는 종종 '한군인은 물러가라'는 반한 시위가 등장한다. 여기서 일본은 '우리'요, 한국인은 '타자'이며, '외부인'이다. 자신들이 아닌, 우리가 아닌 타자가 바로 현재 일본의 어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며, 자신의 '위기'의 핑계를 '타인'에게 대고 있다. 정말 그럴까?
영화 <분노>의 시작은 무더운 여름 도쿄의 주택가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부부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피로 흥건한 현장에서 발견된 '憤怒(분노)'라는 단어만이 유일한 단서. 살해범은 잡히지 않고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영화는 그 살해범을 잡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용의자의 몽타쥬가 방영되는 시점의 세 이야기를 옵니버스 식으로 엮어간다.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던 딸 아이코(마야자키 아오이 분)를 데리고 돌아온 요헤이(와타나베 켄 분),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딸을 그의 임시직원 타시로(미츠야마 켄이치 분)가 호의를 가지고 대하지만 그런 타시로를 요헤이는 영 미덥지가 않다.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날마다 클럽 파티와 게이바를 전전하며 보내던 유마(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게이바에서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 분)과 '동거'를 하지만 역시나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접지는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키나와로 엄마를 따라 이사온 스즈미(히로세 스즈 분)는 그곳에서 사귄 친구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 분)를 따라 섬에 갔다가 만난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 분)에게 거부감없는 호의를 전한다.
이렇게 세 편의 이야기,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난 부부 살해범의 몽타즈, 별 개로 진행되는 이야기와 상관없이 세 곳에 등장한 세 사람의 '외부인'의 모습은 이미 '관객'의 의심을 산다. 그리고 관객처럼 역시도 자신들 앞에 등장한 외부인에게 같은 외부인인 스즈미를 제외한 나머지 두 이야기의 '내부인'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부부 살해범의 진범이 누구냐는 '추리'와 함께, 세 '곳'의 사람들의 관계가 엇물려가기 시작하고, 그 이야기는 누군가의 '의심' 혹은 순진한 믿음을 통해 뜻밖의 파국으로 전개된다.
어렵사리 마음을 연 '정체모를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믿음 끝에 그들을 맞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대한 경계와 의심, 심지어 '신고'다. 요헤이가,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자부하던 아이코가, 그리고 유마가 결국 그 '의심의 그물'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이'를 외면한 이후에 드러난 것은 아이너니하게도 '초라한 자신들'이다. 몸을 팔던 딸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없다는 딸에 대한 불신, 그리고 클럽을 전전하는 게이인 자신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불신이 결국은 '사랑하는 이'를 신고하고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믿었어야 했던 것일까? 그 믿음도 의심스럽다. 타나카를 따라갔던 스즈미에게 벌어진 생각지도 못한 '사고', 하지만 그 사고에 스즈미는 자신을 지키기에 연연했고, 타나카는 비겁했다. 그리고 그 '비겁'의 우정을 구걸했다. 하지만, 그 왜곡된 우정은 결국 또 다른 믿음의 파국을 초래하고야 만다.
보편적 발화로서의 분노
<분노> 속 이야기는 몸을 더럽힌 딸을 용서할 수 없는 전통적인 아버지, 번듯한 외양의 직장인이지만 성 정체성에 있어 떳떳하지 않은 남성, 그리고 미군에 의해 강간당한 소녀 처럼, 파격적인 사례가 나열된다. 즉, 일본이라는 세계에 호시탐탐 자신을 강대국으로 드려내고 싶어하는 국가의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민낯을 '성'이라는 원초적 매개를 통해 질문한다. 조상신에게 명절마다 감사하다며 정치인들이 순례를 다니는 이 국가의 민낯이 어떤가 묻는다.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 끝내 외면하는 나라, 그 나라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아니 꿀꺽 삼켜지고 있는 '강간'의 현실을 묻는다. 또한 '분노'를 새기며 한낮의 거리에서 미쳐간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묻는다.
영화는 인간과 인간,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의 경계와 관계에 대한 질문 같지만, 결국 그 질문 너머에 있는 것은 번드르르한 경제 대국이라는 거죽을 벗겨내고 난 '초라한 자화상'이다. 하지만, 그 초라한 일본의 자화상에 '느네들이 그렇지'하면 미소지을 일만은 아니다. 그 세 편의 이야기로 드러난 가족과 인간, 그리고 관계 속에 축적된 '타자에 대한 선긋기'의 아비투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라고 그리 자부할 만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분노>는 보편적으로 고민하고 '분노'해야 할 발화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발화점은 마치 희말라야 정상에 던져지듯 우리 사회에 던져져 불꽃도 내지 못한 채 몇몇의 조기 상영과 심야 상영으로 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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