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흔히들 사각의 링을 인생에 비유한다. 홀로 올라서서 승패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내려올 수 없는, 그 극한의 시간들이 아량없는 인생의 레이스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소재로 '권투'는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관객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그저 그 인생과 같은 시합,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각의 링에 올라서기까지, 그리고 그 처절한 싸움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밖에 없는 한 인물의 링 밖 인생으로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울릴 수 있어서이다. 그래서 '사각의 링'을 매개로 삶에 부대끼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는 빈번하게 만들어 지고, <록키>로 부터, <밀리언달러 베이비>에 이르기까지 명작으로 회자되곤 한다. 그리고 또 한 편, <백엔의 사랑>도 그렇게 '사각의 링'을 매개로 감동어린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른 두살 루저 이치코 백엔 샵 알바가 되다
감동스런 이야기라고 했지만, 영화의 시작과 등장한 주인공 이치코(안도 사쿠라 분)는 감동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루저'의 인생이다. 동생과 달리 전문대학까지 나왔다지만 대학 졸업 후 쭈욱 백수, 서른이 된 지금도 도시락 가게를 하는 부모님 집에 얹혀 용돈으로 백엔샵이나 오가며 하릴없이 조카와 함께 tv에 빠져 무위도식하는 처지다. 이혼을 하고 역시나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뜨거운 주방의 열기에 고전하는 여동생은 그런 언니가 한심해하는 걸 지나, 증오한다. 결국, 아침 식탁에서 벌어진 자매의 혈전(?), 어머니는 돈봉투를 쥐어주며, 이치코의 등을 떠민다.
하루 아침에 '독립'되어버린 이치코, 그런 그녀가 호구지책으로 얻은 직장은, 밤마다 그녀가 몇 푼 안되는 용돈으로 장을 보던 백 엔 샵의 아르바이트 자리이다. 일당이 높단 이유로 심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치코, 그곳에서 그녀는 서른 줄이 되도록 백수로 지냈던 그녀 못지 않은 '루저' 인생들과 조우한다. 깔끔하게 일처리를 해내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는 점장, 마흔이 넘은 홀아비로 쉴새 없이 치근덕거리다 결국 치한이 되어버린 동료, 그리고 한때 이곳에서 일했지만 계산대의 돈을 쓱싹하다 잘려 이젠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의 단골이 된 노숙자 여사님, 그리고 권투를 한답시고 늘 바나나만 사들고 가는 무뚝뚝한 카노(아라이 히로후미 분) 등.
본의 아니게 백엔샵의 알바가 된 이치코를 중심으로 영화는 성장이 멈춘 일본 사회의 '루저'들을 나열한다. 본의 아니게 라고 했지만, 서른 줄이 되도록 이치코는, 그리고 영화가 한참 진행되도록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사나싶게, 무기력이란 말도 무색하게 그저 떠밀려 살아가는 '루저 인생'은 굴러간다. 이치코 뿐만이 아니다. 백엔샵이라는 일본 사회의 근저에 깔린, 아니 경쟁과 선점을 제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그 밑바닥을 떠받치는 백엔샵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군상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이벤트'란 이치코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더 이상 유효기간 지난 도시락을 가져갈 수 없게 되자 계산대를 턴 수다쟁이 홀아비나 노숙자 여사님처럼, '막장'으로 통하는 또 다른 길목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점장처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삶에서 일탈시켜 버리든가. 도무지 긍정적인 삶의 터닝 포인트라곤 없는 현실.
그렇게 변화의 희망이라고는 없는 이치코의 현실, 그 현실의 틈은 생뚱맞게도 이치코가 지나던 길에서 그녀의 시선을 잡아 끈 '권투'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치코가 권투 글러브를 낚아 챈 것은 아니다. 그저 주저주저 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줄행랑을 치던 그녀가, 바나나맨 카노의 마지막 권투 시합을 참관의 경험 후, 치한 홀애비와의 하룻밤의 상흔과, 이어진 카노와의 역시나 상처를 남긴 짧은 사랑이란 현실에서 다시 한번 나동그라졌을 때, 이치코는 권투 도장을 찾는다.
이치코, 링 위에 오르다
왜 권투였을까? 호텔에 가기 싫다던 그녀의 복부를 강타하던 홀애비의 주먹을 이겨보기 위해서? 아니 카노의 권투 시합에서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뜻밖에도 죽자고 싸우던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후, 다가가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자신의 첫 순정을 짓밟은 홀애비를 밟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싸웠다고 등두르려주던 그 '위로'를 이치코는 '권투'를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건 카노와의 사랑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거절당하지 않을 거 같아서라며 그녀에게 접근했던 카노, 그런 그가 갈 곳없이 술에 취해 오바이트를 하며 나동그라졌을 때, 기꺼이 이치코는 그를 집에 들인다. 하지만,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다던 카노는 그녀를 저버리고, 그녀는 치열한 전투라는 댓가를 치뤄야만 얻을 수 있는 등두드림의 위로를 찾고자 권투 도장을 향한다.
영화는 그녀에게 찾아왔던 카노가 다시 그녀를 버리고 홀연히 사라지듯, 이치코의 현실에 쉬이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녀의 도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관장이 결국 그녀에게 기회를 허용해주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는, '얼굴만은 지키라'는 당부가 무색하게,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든다. 딸랑 3회전의 승부,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조차 그녀가 달라졌다고 말하듯 혹독하게 자신을 담금질해냈던 이치코의 열정은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선 무기력했다. 벌써 첫 번 째 경기에서 부터 그녀는 스텝을 놓치고, 가드는 어느새 풀려 있었다. 그녀의 주무기라는 왼손은 채 써보지도 않은 채.
16회 일본 아카데미 상 여주 주연상을 비롯하여 일본 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의 21개 부문에서 수상을 한 <백 엔의 사랑>은 32살 백수 이치코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한껏 살을 부풀린 모습에서 마지막 링 위의 날렵한 복서의 모습으로 변화한 안도 사쿠라의 열연에 얹혀 루저 인생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날렵한 복서의 모습으로 변신한 이치코의 모습에서 관객이 감탄사를 자아내는 것도 무색하게, 링 위의 그녀는 무기력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왼 손 펀치가 무색하게 내내 두드려 맞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마치 이것이 인생이라는 듯, 그 어떤 승리의 드라마가 전하지 못하는 진솔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전한다. 이겨서 인생이 아니라, 이렇게 자신을 던져 싸우는 것이 인생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치코는 두 번 운다. 백엔 샵에, 권투까지 강행하던 그녀가 카노의 감기를 옮아 쓰러졌을 때, 그런 그녀에게 카노가 씹히지도 않는 고기 요리를 해주었을 때, 그리고, 경기에 져서 시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은 얼굴로 경기장을 나서는 그녀에게 다가온 카노의 품에서, 도무지 표정도 없고, 그래서 감정을 파악할 수 조차 없던 그녀가, 백엔 샵에서 만난 카노의 품에서 통곡을 한다. 그리고 다독다독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는 카노. 바로, 그녀가 매료되었던, 그리고 그녀가 갈구했던 사랑, 진정한 위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일본 밴드 크리프하이프(creephyp)의 보컬 오자키 세카이칸의 하이톤 솔로가 울려퍼진다. '아파, 아파, 아파, ....왜 어째서 잘 풀리지 않는 거야. 살거야'라고. 바로 <백엔의 사랑>의 한 줄 요약이랄까. 영화 속 이치코는 끝내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저 링 위의 경기에서 이겨내지 못해을 뿐, 처음 어머니가 들이민 돈 봉투를 받고 '독립' 되어버린 이치코로부터, 이치코는 꽤 멀리왔다. 여전히 아프고, 또 아프지만, 이젠 그녀에겐 '사랑'도 있고, 살아갈 힘도 생겼다. 백엔 샵 야간 알바였던 그녀는 이제 몸이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여동생과 나란히 도시락 가게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었다. 사랑도 물론. 동생은 링 위에서 한 대도 때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패배자'라 소리쳤지만, 경기에 졌을 뿐, 이제 그녀는 패배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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