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다할 경쟁작이 없었던 추석 연휴, 9월 7일 개봉한 영화 <밀정>은 순조롭게 600만(의 고지를 넘겼다. 그리고 이 여세라면 역시나 당분간 흥행 호조를 이어갈 듯하다. 하지만 흥행 호조와 다르게 <밀정>을 보고 난 소감들은 엇갈린다. 충분히 감동적이다부터, 지루했다까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민이 절절히 다가왔다에서 상투적이다까지. 어쩌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다양한 결의 생각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기에 <밀정>은 볼만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다양한 생각들 속에 몇 가지 질문을 더해보고자 한다.
올해 영화를 개봉한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 <덕혜옹주>의 허진호 감독, 그리고 <밀정>의 김지운 감독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2000년대 화려한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감독들이다. 그리고 그간 헐리웃이나 중국 등에서 작품을 하는 등 국내 활동이 뜸했던 감독들이기도 하다. 이 감독들이 공교롭게도 2016년 동시에 역시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신의 작품을 들고 '고국'을 찾아왔다. 그런데 역시나 공교롭게도 모두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아가씨>야 장르나, 주제 면에서 다른 두 작품들과 차별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덕혜옹주>나, <밀정>은 그 주제면에서 일맥상통하게 '민족주의'의 계열에 놓여있다. 이 감독들의 영화에서 '악'은 '일제시대'라는 배경으로 너무도 선명하다. 성도착적이거나 파렴치하거나 사이코패스적 친일파나, 교묘하거나 잔인한 일본군이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함께 일제 시대에 대한 왜곡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는 즈음에서, 이러한 분명한 일제를 배경으로 한 '악'은 주목받고 대중의 공분을 얻기에 충분하다. 의도하건, 의도치 않았건 박평식 평론가의 정의처럼, 2016년 영화계에 '민족주의'라는 트렌드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명량>을 시작으로, <국제시장>, 그리고 2015년 <베테랑>과 <내부자들>로 잠시 현실로 돌아왔던 영화계는 2016년들어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그리고 <밀정>까지 조선시대에서부터, 6.25를 거쳐 일제시대까지, 일관된 주제 의식을 가지고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거기에 모처럼 돌아온 중견 감독들이 그 흐름의 불을 꾸준히 지펴간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삼시세끼>의 차승원을 앞세워 역시나 '민족'이라는 화두를 내세운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부진을 보면, '민족주의'라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트렌드에 한 발 거치고 있다는 지점을 피해갈 순 없는 것이다.
황옥, 그리고 왜 이정출
<밀정>의 첫 장면은 미륵반가상을 들고 친일파를 찾아간 김장옥(박휘순 분)이 그의 밀고로 인해 일본 경찰에 쫓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결국 일본 경찰에 포위된 김장옥, 그는 포위된 상황에서 총에 맞은 자신의 발가락을 절단한다. 이 '뜬금없는' 발가락 절단 장면에 대한 의문과 호불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한 눈밝은 관객이 말한,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삶을 생각한다. 죽겠다는 행위 대신 삶과 자신의 의지에 대한 결단으로 발가락을 잘랐을 것이다라는 해석이 우문현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김장옥의 결단, 혹은 의지는 하지만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채, 그 죽음을 말리려고 했던 주인공 이정출에게 '서사'의 바톤을 넘겨준다. 한때 임시정부에서 김장옥과 호형호제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이정출, 하지만 이제 그는 일본의 녹을 받으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본 경찰이다. 그에게 일본 경찰은 정채산을 비롯한 김우진 등의 의열단 체포의 명령이 떨어지고, 동시에 그런 그에게 김우진이 접근한다.
<밀정>은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송강호가 연기하는 이정출만이 도드라진 부조와 같은 작품이다. 몇 장면 등장하지 않는 정채산(이병헌 분)이 존재감을 빛내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후인물'일 뿐이다. 일본 경찰이지만 한때 동지였던 김장옥을 살리려고 애썼던 이정출,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었던 일본 경찰과, 이제 그 일본 경찰의 모호한 태도 속에서 새롭게 자신을 알아봐주는 의열단 사이에서 인간적으로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결국 영웅적 결단을 내리는 이정출의 일대기와도 같은 영화이다.
그렇게 영화가 일제의 밀정이었으나 결국 의열단의 실패할 뻔했던 의거를 실행에 옮긴 이정출에 집중하는 반면, 그와 반대의 길을 걷게 된 의열단이었지만 적의 밀정이 된 조회령(신성록 분)과 주동성(서영주 분)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처단을 선사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의열단 핵심인물인 김우진은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답지 못한 연계순의 사진을 찍는다던가, 연계순이 잡힐 뻔한 상황에서 임무를 방기한 채 연계순을 구하려 물불을 가리지 않는 등 '인간적 실수'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의열단 내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던 유일한 여성 단원 연계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존재는 잠시 김우진과 애틋한 연모의 사이였다가, 이정출의 '자각'을 위한 대상으로 쓰인다. 대신 의열단이었던 동지였던 이들이 실패했던 길을 '밀정'이었던 이정출의 영웅적 결단과 실천이 대신한다.
영화 속에서 음악이 도드라지는 장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re smilong'이다. 히가시와 함께 차를 탔던 이정출이 히가시의 협박 혹은 회유에 다시 차문을 열고 경찰서로 들어선 이후 '학살'에 가까운 독립군 검거 장면에서 깔리는 음악이다. 이에 김지운 감독은 1920년대 젊은이들이 즐겨 들었던 음악이라며 그 간극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감독의 의도가 어떻든 그 장면은 독립군이었던 젊은이들의 목숨이 일제에 의해 압살당하는 장면이었고, 그리고 본의든 피치못해서든 이정출은 거기에 '협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가 앞서나가며, 이정출의 개입을, 그리고 젊은이들의 죽음에의 잔학함을 둔화시킨다. '아이러니'로 느끼는 정서와, 직시는 분명 다르다. 뿐만아니라, 이 장면에서 '아이러니'는 느낄 지언정, 거기에 이정출의 참여에 미처 관객의 시선이 돌아가지 않는다.
또 하나, 마지막 이정출이 설치한 폭탄이 터지는 장면에서는 라벨의 볼레로가 울려퍼진다. 이 장면은 감독에 의해 연출된 환타지다. 실존 인물 황옥으로 추정된 이정출이 '역사' 속에서 그려진 마지막 장면은 김우진, 연계순 등과 함께 한 재판에서였다. 밀정이었으나 독립군으로 잡혀 재판을 받았던 그에 대한 동정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재판정에서 이정출은 김우진등이 상해에서 국내로 폭탄을 들여오는 걸 도왔지만, 그건 김우진 일당을 일만타진하기 위한 미끼였을 뿐, 자신을 일본 경찰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밝히고 있다. 해방 후 경무총감까지 지내며, 국회의원 출마까지 하려했다던 이정출, 아니 황옥의 진실은 그의 납북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두 장면의 음악은 관객의 해석을 앞지르거나, 혹은 저어하며 앞서나간다. 대신 관객은 음악에 홀려, 이 장면에서 생각할 지점을 놓친다. (굳이 킹스맨과의 유사함을 더하진 않겠다)
김장옥의 발가락, 그리고 경계인의 초상
김지운 감독은 그 모호한 인물에게 의열단 행동대장으로서의 영웅적 행보를 맡긴다. 김우진도 실패하고, 연계순도 실패하고, 다른 인물들이 변절한 가운데, 실제 역사적 평가가 물음표로 남긴 인물이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군에 대한 '테러'를 성공시킨 환타지로 그의 역사적 복권을 의도한다. 과연 이 장면이 최근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진 <덕혜옹주> 속 덕혜옹주가 징요당한 노동자들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란 장면과 다를까? 왜 감독들은 굳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인물들을 불러 그들에게 '민족주의'의 과업을 맡길까? 최동훈 감독의 <암살>에도,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도 공교롭게도 김원봉이 등장한다. 특별출연인 조승우와 이병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단 몇 장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존재감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왜 감독들은 김원봉을 특별출연으로 뒤로하는 대신, 논란의 인물들을 내세울까? 대중적으로 공감받기 쉬운 인물이라서? 그게 아니면 우리 일제 시대 독립 운동사를 들여다보면 자유로울 수 없는 '사상'의 지뢰밭을 피하고 싶어서?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밀정>은 마치 첫 장면 김장옥이 발가락을 자르는 그 결단과도 같은 영화처럼 다가온다. 발가락을 자르는 그 장명은 분명 그의 결단과 의지이지만, 과연 거기서 굳이 그래야 했을까라는 의문표가 따라붙는.
물론, <밀정>의 미덕은 있다. 오히려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메시지는 '민족주의'라는 트렌드를 넘어, 경계인의 초상이다. 일본이냐, 조국이냐 그 경계에서,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들,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의 그 경계에 선 어찌보면 실존적 질문이다. 그리고 그 미덕은 늘 갑과 을, 혹은 자본과 피고용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론에 고뇌하는 현대인들의 질문에 가닿는다. 송강호라는 배우기에 가능했던 이정출의 고뇌어린 두어 시간에 그래서 관객은 흠씬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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