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리에 방영되는 tvn의 월화 드라마 <또 오해영>, 주인공들은 '전쟁'같은 사랑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절실한 '사랑'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주인공 오해영(서현진 분)과 박도경(에릭 분)은 '이성적' 시각에서 따지고 보면 '미친 년, 놈'이 따로 없다. 자신의 결혼을 파탄냈는 그 놈을 못잊어 하는 오해영도 제 정신이 아니고, 그런 그녀를 연민으로 바라보다 이제 자신으로 인해 감옥까지 다녀온 피해자 오해영 전 남친에게 다짜고짜 주먹다짐을 하고 마는 박도경도 만만치 않다. 굳이 다른 드라마에서 찾을 게 뭐 있겠는가. <디어 마이 프렌즈> 속 박완(고현정 분)이 장애인이라 자신이 없다며 외면했던 애인 연하를(조인성 분) 첫사랑과 키스를 해가며 잊으려 몸부림치다 결국 몇 년만에 18시간의 거리를 단숨에 달려(?) 해후하고 마는 사랑은 또 어떻고.
기꺼이 양보도 가능한 노년의 사랑
이렇게 '미침'을 거부하지 않는, 아니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열정적인 '젊음'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 알아왔던 동생이 좋아한다 하면 기꺼이 '양보'할 수 있는 '노년'의 사랑도 있다. 그렇다고 그게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성당에서 희자(김혜자 분)는 성재(주현 분)을 만난다. 아니 희자가 성당에 다니는 걸 알게 된 성재가 희자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성재는 바로 희자의 첫사랑, 하지만 우연한 엇갈림이 두 사람 사이에 몇 십 년의 이별을 낳았다. 그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른 삶을 살아내고, 이제 정신이 까무룩하는 노년이 되어서야 해후를 하게 되었다.
속되게 노년의 사랑을 인생의 마지막 행로에서 다시 오지 못할 사랑이기에, 동네 노인정 할머니들이 한 분의 할아버지를 두고 머리 뜯고 싸울만큼 '열정'의 사랑으로 빗대기도 한다. 하지만, 노희경 작가는 낭만적인 희자와 성재의 해후를 환타지같은 낭만을 뚫고 현실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희자의 앞에 나타난 성재, 이 로맨틱한 설정에, 희자는 성재를 소닭보듯한다. 첫사랑의 그 시절, 그녀를 홀로 남겨두어, 사별한 남편과 인연을 만들 빌미를 주었던 성재에 대한 원망도 있지만, 이제 72세의 치매끼와 싸워야 하는 희자에게 성재는 그저 성가신 배 나온 노인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 앞에 나타난 성재는 다시 만난 그녀를 보고 설레어 하지만, 희자는 오히려 정아와 벌인 교통사고 수습으로 인해 성재가 내뱉는 말들이 성가실 뿐이다.
그러나 자꾸 그녀 앞에 나타나 보고싶다는 성재, 조금 솔깃해질까 싶은데, 오랜 벗이나 다름없는 동생 충남(윤여정 분)이 성재가 좋단다. 그러자 희자는 기꺼이 양보한다. 심지어, 성재와 함께 떠나겠다던 여행조차 대번에 포기하고 만다.
불타오르지 않아도 사랑은 사랑
머리뜯고 싸울 노인정 할머니들의 애정 삼각 전선이 등장하는가 싶었던 희자-충남-성재의 삼각 로맨스는 충남의 사랑 선언에 기꺼이 포기를 선택한 희자의 우정과, 희자의 외로움을 이해한 충남의 호쾌한 포기 선언으로 싱겁게 마무리된다. 희자는 오랜 시절 가족을 돌보느라 결혼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온 충남을 안쓰러워하고, 충남은 이제는 홀로 남아 시간과 싸우는 희자의 고독을 이해한다.
결국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희자와 성재, 하지만 로맨스 그레인인 줄 알았더 이들의 여행은 생각보다 여의치 않다. 아침부터 꽃단장했던 성재의 의도와 달리, 달리는 차 속에서 흩날리는 건 봄바람이 아니라, 성재의 흑채 가루였고, 그 시절 흔연히 희자 정도는 엎어줄 수 있었던 기력은 차가 끊겨서가 아니라, 늙어서 더는 운전을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하룻밤이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가방을 가운데 두고 한 방에 누운 두 사람, 이 로맨틱한 정취 속에 토로되는 건, 곱게 늙은 노년의 얼굴 속에 숨어있는 이제 언제 죽어도 아쉽지 않을 신산한 삶이다. 젊었다면 어찌 해볼 이 운명의 시간, 달콤한 사랑의 운명을 방해하는 건 노년의 다한 기력이 몰고오는 잠이다.
몇 십년만에 다시 만난 첫 사랑, 그들의 하룻밤 여행이라는 낭만적인 로맨스의 소재는 노희경 작가에 의해 가장 현실적인 노년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된다. 그렇다고, 희자와 성재의 만남이 무위가 된 건 아니다. 이제와 다시 만나 어쩌겠냐고 외면하는 희자에게 성재는 그저 늙어서 치구가 되자고 한다. 그리고 친구처럼 요의를 참을 수 없는 희자를 위해 차를 세우고, 치매끼에 도움이 되는 그림책을 사온다. 그런 성재의 성의에 조금씩 긴장이 풀린 희자는 입가에 묻은 검댕이를 닦아주고. 함께 선 일출의 정상에서 '지금만으로도 좋다'며 그의 손을 잡아준다. 여느 드라마나 영화같은 낭만적인 로맨스대신, 70여년의 삶을 지고온 시간고 그 시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만남이 이어진다. 굳이 '전쟁'처럼 불타오르지 않더라도, 때론 폭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해프닝과 잔잔하게 미소가 지어지는 우정으로 인해 은은하게 온기를 느끼게 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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