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봐서 아는데'를 연발하던 전직 대통령은 다행히도(?) 지세광처럼 감옥으로 가지 않고 주말이면 시민들조차 발길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테니스를 친단다.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입이 닳도록 말했었다. 자기는 그 누구보다 서민의 아들이라고, 어려운 형편에서 자라나, 이 나라의 서민들 삶을 고스란히 체험해 봤으며 그래서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안다고.

<돈의 화신>의 지세광과 권재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이 바로 피해자라고, 가난했으며, 가난 때문에 아비를 잃거나, 우등상장을 받았다고 아비에게 맞았다고,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심지어 그 대우를 받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즉, 그들은 피해자였기에 정의롭고, 그 정의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임지현 교수의 [우리 안의 파시즘]을 보면, 3000년 전 자기 땅에서 쫓겨나 전세계를 떠돌아 다녔던 유태인들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파시스트로 탄생되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그들에게 가장 문제인 것은, 오래전 자신이 받은 억압을 내면화시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자신의 모든, 부당한 행동 조차 정당화시킨다는 것이다.

지세광, 권재규, 그리고 그들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권력층들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뚫고 입지전적 성공을 이룬 그들은 우리 시대의 지도층이 되었지만, 새 정부의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보여지듯이 시세 차익을 노린 다운 계약서 정도는 애교가 될 정도의 '복마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스파이'에 버금가는 부적절한 비리로 장관 임용에서 밀려났는데도,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지만 세상이 자기를 알아 주지 않았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것이 그들이다. 마지막 순간에까지 자신보다는 이차돈을 향해 총구를 겨누려고 했던 지세광이나, 자식을 죽이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권재규처럼 자신은 여전히 보상받아야 할가난의 자식이며,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들은 그 모든 것이 정의롭고, 정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라도 자신의 갈 길을 막는 자는 정의의 이름으로 단죄받아야 하고.

그래도 드라마 속 그들은 법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기라도 하지. 우리 시대의 현존 권력층들은 여전히 유유자적 주말 독점 테니스를 치는 그 누구처럼 치부해놓은 재산을 가지고 여유자적하게 살아갈 것이다.

 

 

<돈의 화신>이란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와 달랐던 점은 제목은 돈의 화신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에 이들 권력형 비리를 단죄한 것은 이차돈의 사적 복수가 아니라, 검사가 된 이차돈의 법이었다.

물론 시작은 '사적 복수'였다. 아버지를 죽인, 그리고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들'에 대해 이차돈은 복수를 하려 했다. 하지만, 복수의 과정에서 이차돈은 '그들'의 실체를 깨닫고, 자신의 복수가 사적인 앙갚음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형 비리를 단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죽어가던 어머니의 말처럼, '슈달'에서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된 이차돈이 한 일은, 복재인의 돈이나, 또 다른 편먹기가 아니라, 그 자신이 검사가 되어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심판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저 그런 또 한편의 권력형 비리를 다룬 복수극과 <돈의 화신>이 자기 차별성을 갖게 된 지점이다.

아마도 이차돈이 사적 복수로 드라마를 끝맺었다면,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중만 회장을 죽이고, 그의 돈을 빼앗은 지세광과 다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쥐고 흔들면서도, 온갖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가난의 희생자인척, 정의로운척 하는 지세광 일당과 차별성을 가지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차돈은 방향을 틀었다. 은비령에게 당신 자식을 나처럼 만들지 말라며 감호소도 돌아가라고 했고, 그 한 마디가 이차돈에게 겨눌 수 있는 총구를 무력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때 법을 가지고 좌지우지 하면 이차돈과 복재인의 모든 것을 빼앗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놀던 법의 이름으로 심판을 하려고 했다. 마치 뒷공론도 소용없고, 누구 한 사람에게 겨누는 사적인 총구도 소용없으며, 오로지 그들을 발본색원해낼 수 있는 또 다른 법의 심판만이 가장 유효한 '복수'라고 드라마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정의로운' 언론과 '진짜 정의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진 법이 필수라고.

by meditator 2013. 4. 22. 09:44

얼마 전 종영한 야왕과 관려된 우스개가 있다. 남편 유노윤호를 죽음으로 내몬 수애의 자동차 폭파 장면을 보면서, 수애를 <아이리스2>로 보내 그 능력을 대아이리스 첩보 활동에 쓰이게 해야 한다던가, 남자 주인공 하류의 복수가 늘 수애의 악행에 한끝 차이로 뒤지자, 하류는 <돈의 화신> 이차돈에게 좀 배우고 와야 한다던가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답답했던 내용을 다른 드라마의 능력자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의 발현이랄까? 하류보고 한 수 배우라는 대상이 되었듯이, <돈의 화신> 이차돈(강지환 분) 변호사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한 이래 탁월한 두뇌회전력으로 복수의 상대방 지세광(박상민 분) 일당을 코너에 몰아넣고 은배령을 감옥으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종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돈의 화신>이차돈은 급기야 교도소살이까지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복수는 하류였지만, 신분만으로 보면, 교도소 출신임에도 변호사로 승승장구한 하류가 나은 편 아닐까?

 

사진출처; tv리포트

 

최후에 웃는 자가 진짜 웃는 것이다?

다시 <야왕>으로 돌아가서, 종영을 앞둔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이병훈 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50부작 대하사극 <마의>를 앞질러 버렸다. 사람들은 하류의 복수가 시시하다 하면서도 주다해의 '업그레이드'되는 악행을 보는 재미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대부분 시시한 드라마도 막방이 되면은 시청률이 오르기 마련인데, 천민의 신분에서 어의에 오르는 그것도 휴머니즘의 극강을 보인 백광현(조승우 분)의 성공스토리를 악행 하나로 퍼스트레이디에 오르는 주다해의 또 다른 성공 스토리가 눌러버렸다. 이병훈 감독이 말하고자 한 진솔한 한 인간의 미담식 성공보다는, 무슨 짓을 하던 성공만 하면 돼! 라는 주다해의 악행이 더 사람들에겐 익숙하고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왜 욕을 하면서 <야왕>을 보느냐고 하면, 사람들은 악녀 주다해가 어떻게 망하는지 봐야 하겠다고 이구동성이다. 그런데, 망하는 걸 보기에, <야왕> 뿐만이 아니라, <돈의 화신>도 그렇고 대부분의 복수극들은 악행을 저지르는 대상이 망하는 시기는 극이 끝날 때쯤이요, 그때까지는 끊임없이 되풀이되거나 심지어 승화되는 악행의 잔치판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야왕>의 하류는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딸과 형을 잃었고, 그로인해 주다해의 두번째 남편까지 목숨을 잃었다. <돈의 화신>도 이차돈이 제법 복수를 하는 것같은데, 들여다 보면 잃는 건 늘 이차돈 뿐이다. 지세광은 서울시장에 나갈 정도로 승승장구하는데, 이차돈은 횡령에 살인범으로 몰리다, 복수를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지만 교도소 행이요, 그가 사랑했던 복재인 일가는 처참하게 무너져버렸다. 마치 복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류나, 이차돈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는 게 복수다 라고 오히려 두 드라마는 역설적 교훈을 주기라도하는 것처럼.

물론 퍼스트 레이디가 된 주다해가 결국은 몰락하고 말듯이, 지세광도 성공의 정점에 올라갔을 때 처절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몰락과 함께 드라마도 끝나고. 이른바 복수극의 딜레마, 혹은 클리셰가 바로 이것이다. 내거는 것은 복수극이라고 하지만, 복수를 하기 위한 악행에 드라마가 기대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시청자들이 보아야 하는 것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악행의 롤러코스터이다. 복수는 짧고 악행은 주구장창이랄까.

 

▲ 야왕 스포일러 사진 공개 /베르디미디어 제공

 

그럼에도 복수극이 보고싶은 것은?

<야왕>과 <돈의 화신>을 보면 재밌는 공통점이 드러난다. 악의 축이 되는 세력들은 경제적 부의 축적을 결코 간과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혹은 그것을 기반으로 퍼스트레이디라던가, 서울시장같은 정치적 권력을 부여잡는다는 것이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 대한민국의 권력 지형에 있어 누가 더 힘이 센가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지만, 드라마를 통해,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면을 봤을 때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지도층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는 물론 유독 대한민국에서, 정치 혐오증이 심하고,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 건, 드라마 속에서도 형상화 되었듯이, 해방 이래 제대로 된 자정 노력없이 그놈이 그놈임을 실감하게끔 정치 엘리트 층이 형성되었고, 개발 독재 시절에 공공연하게 정경 유착이 이루어졌음을 역사를 통해 충분히 학습된 결과라 하겠다.

그러기에 몇 십년의 세월을 통해 공공히 쌓아올려진 그 권력들의 척결은, 드라마 내내 당하기만 하는 절치부심의 그리고 그것조차도 사실은 환타지인 복수를 통해서만이라는 지점에 사람들은 공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3일 횡령에 살인의 혐의를 받은 이차돈이 검사 지세광에게, '영혼없는 정의, 정의없는 힘'이라며 일갈하듯, 사적 복수로 시작한 주인공의 행로는, 악이 축에 대한 실체를 자각하며 '공적 복수'로써의 정당성을 얻어가고 강력한 추동엔진의 성능을 장착하게 된다. 복수는 복수이되, 정의가 되는 순간이다. 덕분에 시청자들도, 주인공의 미운 놈이, 시청자들에게도 미운 놈이 되면서, 복수를 즐기는 정당성을 얻어가고.

복수극은 애잔하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잃고 만신창이가 된 마지막에 가서야 웃게 된다. 그리고 그런 복수이나마,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정경 유착의 권력형 비리의 끝을 보려고 기다리는 시청자들은 더 애잔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드라마 속 나쁜 놈은 착한 놈이 만신창이가 되서라도 물고 늘어지면, 결국은 망한다. 그게 어디인가. 아마도 기다리면 언젠가 망하는 그 나쁜 놈을 보려고, 시청자들은 한 송이 국화 꽃을 기다리듯 복수극을 지켜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13. 4. 15. 09:45

이번 주 <썰전>에서는 각종 공기업에 대한 낙하산 인사에 대한 구설을 다뤘다. 대통령이 선거 후에 선거 과저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에게 왜 공기업이라는 낙하산을 하사(?) 하는가의 이유가 밝혀졌다. 그건 바로 돈! 은행 관련 공기업의 경우 한 달 월급과 기타 경비를 합하니 받는 돈이 거의 1억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고 지난 정권에서 낙하산으로 감투를 받았던 인사들이 버티고 물러나지 않는 이유가 단 몇 달을 버티더라도 몇 억을 더 손에 쥐니 그럴 만도 하다는 우스꽝스럽지만 웃을 수도 없는 결론을 내렸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을 다 어디다 쓰려고? 하지만 날마다 뉴스에 올라오는 낙마하는 관가의 후보자들을 보면 그들에게 돈이란 진짜 '다다익선'이 딱인 듯하다. 돈을 위해서는 국익이고 나발이고 영혼 정도는 가볍게 팔아넘길 기세다. 그리고 그런 나으리들의 실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돈의 화신>의 나으리들도 돈 앞에선 의리고 동지고가 없다.

 

<돈의 화신> 속 검사 지세광(박상민 분)을 비롯한 5인의 제휴의 근간은 이중만 회장의 죽음과 그 일가의 몰락을 눈 감아주는 댓가로 이중만의 돈을 나눠가진데서 비롯된 공범 의식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돈을 근간으로 이제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이차돈, 아니 이강성과 조우한 지세광 검사는 그가 여전히 자신의 눈에는 '슈달'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슈달은 초보 검사시절 여러 기업체에서 떡밥을 받아챙겨 검사직을 물러나게 된 이차돈의 별명이다. 뿐만 아니라 지세광은 이차돈이 이강석일 거라는 의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그를 추적한다. 그런 지세광의 기억을 사로잡는 것은 감방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아들이 사가지고 간 호두도 먹어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아비이다.

지세광의 뇌는 편리하게 재구성되어 있거나, 일종의 정신 분열이다. 그 자신이 안젤리나와 함께 저지른 저축 은행 인수와 관련된 자신의 비리는 안중에 없고 후배 검사가 떡값을 받은 것에는 분노하거나, 한 가족을 죽음과 불행으로 몰아넣은 자신의 행동에는 눈꼽만치의 반성도 없으면서, 이미 복수로 되갚고도 남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한 분노를 삼킨다. 자신의 이익, 자신의 불이익에 대해서는 맹수보다도 더한 포효를 하면서,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비리엔 무감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돈의 화신>이 재미를 주는 것은 이강석의 허를 찌르는 복수극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성장한 5인방의 자기 합리화를 넘어선 안위의 철학,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신 분열 과정을 보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그 재미를 더하는 것은 엄청난 재산을 눈 가리고 아웅하고도 그동안 바뻐서 몰랐다거나,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면서 공인의 자리에 눈도 깜짝 안하고 오르려는 화제의 인물들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하면 사랑이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그들의 심리를 복습하기엔 <돈의 화신>만큼 적절한 드라마도 없는 것이다.

모 장관 후보자가 외국 국적을 포기하자니 수많은 재산이 날라갈 걸 우려해 장관직을 포기하는 해프닝처럼, <돈의 화신> 속 악인들이 귀결되는 곳은 결국 또 돈이다. 이미 이중만의 죽음을 통해 많은 돈을 치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하기 위해, 아니 무조건 더 많은 돈이 필요해 검찰 총장 정도의 인물 등이 한때는 동지라 여겨지던 인물을 배신하거나, 혹은 다른 인물의 불이익을 통해 자신의 지분을 더 챙기려고 한다. 돈 앞에 장사없다는 옛말 하나도 그른 거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리고 오직 눈 앞의 돈에만 혈안이 된 그 인물들은 이강석이 채팅 창에서 예언하듯, 칼로 흥하는 자 칼로 망하듯, 돈으로 얽힌 이 카르텔은 돈으로 인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시청자들은 뉴스 속의 장관 후보자 낙마 소식을 <돈의 화신>으로 복기하며 이 시대의 가치관을 헤아려 본다.

by meditator 2013. 3. 25. 09:13

이중석의 숨겨진 재산이었던 100억이 넘는 금괴와 돈이 드디어, 이차돈(강지환 분), 아니 이강석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십여년 만에 만난 어머니는 그에게 잃었던 기억을, 그의 일가를 몰락시킨 장본인이 지세광(박상민 분)임을 숙지시켜준 채 세상을 떠났다. 죽은 박휘순(이차돈의 모) 앞에서 지세광은 자기 아버지의 원수 갚음은 이제 끝났다고 했지만, 돌아온 이강석의 복수는 이제 시작되었다.

 

 

지세광 카르텔에 대한 복수의 묘미

지세광은 이제 현직 부장 검사이다. 그리고 그를 눈감아 주었던 검사는 이제 검찰총장이 되었고, 은비령과의 스캔들을 덮어준 기자는 뉴스 앵커가 되었다. 한때 멀리했던 애인 은비령은 이제 상호신용금고 이사장을 넘볼 경제계의 주요 인사이다. 지세광을 중심으로 한 이들 네 사람의 제휴, 혹은 동맹은 고담시의 투페이스에 좌 캣우먼, 우 조커의 악의 완전체라도 되는 것처럼, 현재 대한민국 악의 근원을 제시한다. 그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검찰 총장의 권력과, 부장 검사의 법과, 안젤리나의 돈과 고호의 언론이 그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 몰려다니며 쏙닥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위상과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럽지만 그런 모의의 결과는 한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 할 만큼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에서 지세광 카르텔의 무시무시함은 배가된다.

따라서, 이차돈, 아니 이제는 자신이 이강석임을 자각한 이차돈의 복수는 이차돈 개인, 혹은 그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일가에서 비롯된 사적 복수이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이입시켜 마치 그의 복수 행위가 '홍길동'의 의적 행위라도 되는 양 통쾌함을 느낀다. 이차돈이 아버지의 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물품 창고 앞에서 눈이 빠져라 이강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지세광 일행에게 한 방을 먹이는 과정은 <돈의 화신>을 줄곧 시청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처럼의 통쾌함을 느끼는 순간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잊지말아야 지점은 이차돈이 현대판 의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것 없는 지세광의 아버지를 이용해 먹고 죽어가도록 놔둔데 대해 지세광이 그의 지식과 벌률적 권한을 이용해 이강석의 일가를 무너뜨렸듯이, 이제 다시 이차돈이 사고의 트라우마로 좋아진 머리를 이용한 지적 행위와 변호사라는 대한민국에서는 꽤나 통하는 직능을 통해 복수의 사슬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가 복수를 통해 이 사회의 상징적 부패와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과 별개의 또 하나의 진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상징적 '악'들의 소거에서 법은 거들뿐, 사적 복수가 동인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정의'와는 '먼' 대하민국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진실이다.

 

 

 

강지환 화이팅

강지환이라는 배우는 세간의 사람들에게 그닥 좋은 인식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이 아니였다. 이제 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7급 공무원>이라는 영화를 제외하고는 팬이 아니고서는 그의 필모가 뚜렷하게 기억될 작품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되었던 것은 그의 출연작 기사이기 보다도, 그의 소속사 문제로 불거진 여러 사건, 사고 기사에서 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돈의 화신>이라는 작품에 캐스팅이 된 이후에도 그런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주인공이 바뀌니 마네 하는 구설수의 주인공이기 까지 했으니, 드라마를 통해 조우하게 된 강지화이란 배우에게 굳이 따스한 눈길을 주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뻔한 얘기지만, '배우는 연기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고 강지환은 <돈의 화신>이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개 이유를 설득해 내고 있는 중이다.

<돈의 화신>이란 작품은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진중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밀고가는 반면, 오로지 주인공만 상황에 따라 널을 띠며 캐릭터의 편차가 심하다. 어린 시절 부잣집 독불장군이던 이강석이 기억을 잃고 고아원의 천재로 자라나 신참 검사가 되어 나타났을 때, 이차돈은 어린 시절과 전혀 다르게 경박하기가 이를 데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얄팍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천박할 정도로 돈을 좋아하면서도, 어머니인 박희순의 석방을 위해 애쓰고, 선배 검사인 지세광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순수함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검사직을 쫓겨나 돈을 위해 박희순을 찾다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알고 지세광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면서는 다시 이차돈의 캐릭터는 진지하다 못해 눈에 불꽃이라도 튈 정도가 되어야 하는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제 소복을 입고 곱게 머리를 올리고 '조선의 국모다'를 외치던 코믹 캐릭에서 부터, 전기 감전을 맞으며 어머니를 그리는 절규까지 극과 극을 오고가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차돈 역에 강지환 말고는 대체제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제작진이 굳이 물의를 일으킨 강지환을 기다리면서 까지 이차돈 역을 맏겼을 때, 의문 부호는 강했지만 한 드라마에서 마치 손바닥 뒤집듯 변해가는 캐릭터를 그게 마치 원래 자신이었던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를 보면서, 그리고 그런 이차돈이란 캐릭터에 상당 부분 드라마의 색깔을 의지해 가는 <돈의 화신>이 지금까지는 꽤나 긍정적 성과를 얻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지환'이란 믿음이 생겨난다

by meditator 2013. 3. 1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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