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울 것이 없는 청춘 남녀의 성 바꾸기, 그 '므흣'한 설정이 알콩달콩하게 풀어내지던 영화가 중반 이후, 그 설정의 비밀을 풀어가기 시작하면서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결국 영화의 클라이막스 '사라짐'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재와 과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눈물을 쏟게만든 건 에니메이션이었지만, 그리고 그 에니메이션이 있도록 만든 건 타국의 재난이었지만, 결국 내 눈물의 의미는 지금 현재 여전히 우리 땅에서 풀어내지 못한 '세월호'라는 그 날의 슬픔때문이다. 이국의 재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물밀듯이 끌어올리고 만다. 천 일 여전히 학부모들을, 그리고 힘들게 생존 학생들을 차가운 거리로 불러모으고 있는 것은 바로 <너의 이름은>이 하고 있는 그것때문이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홍보 기간 중에 배려없는 아저씨의 행태로 물의를 빚는 바람에 배우 김윤석의 홍보는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런 아쉬운 행보에 묻힌 것 중에 그의 진심어린 한 마디도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윤석은 답한다. 2014년으로 돌아가 '타지 마라, 그 배에 타지 마라'라고 할 것이라고. 이 간단 명료한 소망, 그 소망을 <너의 이름은>은 들어준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와 <너의 이름은>은 똑같이 과거로 돌아가 죽음에 이른 연인을 구하는 드라마이다. 심지어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기욤 뮈소의 동명 원작 소설의 리메이크로 익숙한 서사다. 하지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달리, <너의 이름은>은 정유년 새해 벽두부터 블록버스터 급 한국 영화들을 밀어내고 박스 오피스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청춘 로맨스로부터 환타지 재난 블록버스터로 
무엇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풋풋한 청춘 남녀의 성 바꾸기로 시작된 '청춘 로맨스'의 외양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흔한 성 바꾸기의 설정조차도 <너의 이름은> 버전이 되면 신선하고 새로워진다. 이야기의 테이프를 끊은 것은 시골 마을의 미츠하. 신사 의식과 개발이라는 발전과 전통의 과도기를 겪고 있는 시골 마을, 어머니가 죽은 후 집을 떠난 아버지 대신 신사 의식을 수행하며 도시에의 꿈을 품고 사는 소녀 미츠하에게 벌어진 이상한 사건으로 영화는 서두를 뗀다. 

영화는 미츠하의 시선으로 시작하며, 관객을 오롯이 미츠하와 미츠하가 사는 마을,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시선은 일종의 트릭이자, <너의 이름은>의 후반부 감동을 가져오는 주요한 장치가 된다. 관객들은 타키와 함께 '현재'에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시공간의 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채 대뜸 미츠하에게 벌어진 이상한 해프닝과 함께 이 소녀가 사는 시공간으로 관객을 흡인하면서 이후 벌어질 사건의 중심에 관객들을 놓이게 만든다. 

그저 미츠하에게, 그리고 타키에게 벌어진 이상한 일, 두 청춘 남녀에게 벌어진 '므흣'한 해프닝에 정신없이 흐뭇하게 빠져들던 관객들, 하지만 그저 도쿄와 외진 시골 마을의 공간적 격차가 벌이는 해프닝인 줄 알았던 에피소드가 중반 그 비밀의 열쇠가 풀어지며 거기에 '시간'의 격차가 더해짐을 깨달으며 충격에 빠진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소녀와 소녀 동네 사람들이 알고보니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 그 충격은 영화 속 타키의 충격과 그리 다르지 않는다. 


왜? 이미 영화 초반부터 우리는 미츠하와 그녀의 동네를 동시대의 삶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어린 나리에 고사리 손으로 매듭을 만들고, 신사의 제례 행사를 받들고, 동급생의 조소를 이겨내며 씹던 쌀을 뱉어 술을 빚는 등의 미츠하가 살았던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거 같던 유물의 삶이, 그리고 이제 막 청소년들에 들어선 미츠하가 타키와의 해프닝을 통해 때론 당황하고 설레이던 그 청춘의 열기를, 그리고 소소하게 일상을 메워가는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의 삶이. 그 모든 일상과 꿈, 그리고 갈등조차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한 상실, 설득한 상실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지만 영화를 통해 공유했던 시간을 관객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설정을 통해 <너의 이름은>은 '상실'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실의 공유, 상실의 환기 
아마도 <너의 이름은>이 설정하고 있는 상실은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 상실의 감정에서 이곳에서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피해갈 수 없이 우리 시대의 숙제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그렇게 영화는 '상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상실이 '역사' 혹은 '사건'의 저편으로 잊혀질 수 없는 동시대성을 불러낸다.

그리고 애초에 미츠하와 타키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몸이 바뀌는 환타지답게 '사실'을 알아버린타키는 시간을 돌이키기 위하여 죽음의 강조차 건너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던진다. 마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저승행을 감행하듯. 물론 타키의 헌신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타키가 자신을 던지듯, 시간 속의 미츠하 역시 '난 안되는 걸까?'라는 소극적인 자아를 딛고, 마을을 구해낸다. 두 소년 소녀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방관자적이었던 자신을 던지고, 보다 적극적인 자아로 한 단계 성장하는 통과 의례와 함께, 역사속 사건이 되었던 마을은 '현재'로 돌아온다. 



물론 환타지인 만큼 영화를 보고,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환타지를 넘어, <너의 이름은>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를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남의 일, 다른 시간, 다른 곳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면 나와 관계를 맺을, 같은 공간의 '소중한 인연'임을 상기시킨다. 애써 주장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공존의 울림은 강하고, 상실의 아픔은 진해진다. 우리 무속 신앙 중에 바다에서 죽은 이를 보내는 신례 중에 넋 건지기라는 방식이 있다. 죽은 이의 바다에 가서 죽은 이의가 사용하던 그릇에 끈을 연결하여 혼을 불러내 억울함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편히 보내주는 방식이다. <너의 이름은>은 흡사 그 무속과도 같다. 과거의 미츠하와 타키가 연결된 끈, 그 끈을 통해 타키는 억울하게 죽을 뻔한 미츠하를 불러내고, 결국 억울한 죽음에서 건져냈다는. 그 의식은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동시에, 산자의 가슴 속 상실의 고통도 풀어낸다. 아마도 <너의 이름은>이 흥행을 이어가는 것은 저 무속의 넋건지기 의식처럼 청춘 로맨스를 넘어, 우리 시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억울한 죽음의 상흔을 불러내어 위무했기 때문이 아닐까. 


by meditator 2017. 1. 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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