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5일 어스름이 지는 겨울 오후 4시 신사동 브로드웨이 롯데 시네마, <늦어도 11월에는>의 마지막 하루 전날 상영된 <나의 어머니>에는 역시나 훵덩한 극장을 채운 남긴 몇 명의 관객만이 8월 개봉된 그때처럼 난니 모레티 감독의 이 영화를 만날 뿐이었다.
이 날 상영된 <나의 어머니>는 특별 상영으로 이 영화제를 기획한 영화 평론가 오동진 씨와 <삼거리 극장>, <러브 픽션>의 전계수 감독이 함께 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마련되었었다. 먼저 대화를 시작한 전계수 감독은 감독의 신분으로 역시나 감독인 영화 속 여주인공이 처한 상황, 그리고 이탈리아의 영화 현장에 대한 십분 공감을 표시했다. 이후 함께 합류한 오동진 평론가와 함께, <나의 어머니>라는 한 편의 영화를 넘어,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조류의 난니 모레티 감독의 영화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우었다. 오동진 평론가는 <나의 어머니>와 그 이전 <아들의 방>, <조용한 혼돈> 까지 상실 3부작의 범주에서 이 영화를 살펴보며, 좌파 감독으로 보수 우파 정권 속 살아가는 감독의 감상이 드러나 있는 면을 지적했다. 또한, 감독으로서 전계수 감독이 짚은 한국의 정서에서 흥행을 보장하기 힘든 난니 모레티 감독의 서사를 놓고 오동진 평론가는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거장의 화법에 대해서도 짚었다. 이런 영화 후의 두 사람의 평 혹은 감상은 <나의 어머니>를 단순히 접한 관객이나, 난니 모레티 감독을 미처 알지 못했던 관객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시간이었다.
어머니보다 어머니의 죽음이 더 버거운 중년의 딸, 그녀의 삶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지켜보는, 아니 지켜보고 싶지만 자신의 삶에 치어 그 마저도 버거워 하는 마르게리타(마르게리타 부이 분)의 이야기는 '리얼리즘'의 난니 모레티 감독의 서사가 아니더라도 효(孝)와 가족을 중심에 놓는 한국적 정서에서는 애초에 불편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건 한국식의 눈가리고 아웅일 뿐 <나의 어머니> 속 이야기는 몹시도 '리얼'한 상황이다.
마르게리타는 여성 감독이다. 영화는 점점 무기력하게 노쇄해가는 어머니와 딸, 그리고 아들의 이야기보다 중년 감독으로서 마르게리타의 삶의 현장에 더 주목한다. 즉 아픈 어머니의 자식으로 오빠가 자신의 직업조차 전폐하며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것과 달리, 감독으로 한 영화를 책임져야 하는 마르게리타에게는 어머니와 함께 있을 시간을 내는 것조차 힘겹게 현실의 삶에 치어있다. 이런 마르게리타의 삶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어느덧 현실이 버거워지면서도, 현실에 함께 굴러갈 수 밖에 없는 <화장>의 오정석(안성기 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 이건, 한국이건 그가 대기업의 상무이건, 좌파적 색채의 영화를 오래 만들어 온 감독이건 그리 다르지 않다. 어머니의 간병을 이유로 직장에 휴직을 낸 오빠를 만류하는 직원에게 보이는 오빠의 피로한 눈빛이, 사실은 마르게리타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한 것이다.
노동 현장의 이야기를 찍어가면서도 영화적 메시지의 투철함에 심혈을 기울이기보다 헐리웃 출신이라는 유세를 하며 매번 엇나가는 주연 배우와의 조합에 골머리를 썪는 현실적인 영화 현장의 상황이나, 감독의 세계관에 대한 질문에 감독 자신 조차도 공허해 하는 중년의 허무함은 곧 어쩌면 곧 돌아가실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막상 어머니와의 시간 조차 내기 힘든 간병의 어쩌지 못한 상황으로 대치된다. 즉 중년 혹은 이제 장년에 들어선 삶은 그녀가 오랜 시절 라틴어 교수로서 살아온 어머니의 인생이, 죽음 앞에 무기력하다 느끼듯, 그런 그녀의 무기력한 감상은 고스란히 그녀 자신의 삶에도 투영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라틴어를 배우기 싫어하는 어린 딸이 라틴어의 존재 의미에 대해 물었을 때 공허한 답을 할 수 밖에 없는 마르게리타의 버벅거림은 곧,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로 관통한다. 그렇게 육친으로서의 어머니의 죽음 앞에, 어머니의 삶에 대한 회한과, 그녀 역시 어머니처럼 나이들어 가는 무기력함에 좌절하며 혼란을 느끼는 중년의 마르게르타의 삶은 묘한 '모전여전'인 것이다. 그렇게 현실에 쓸모없어지는 라틴어처럼, 그녀 자신이 열심히 찍고는 있지만 어쩐지 공허한 그녀의 영화처럼, 어머니와 딸이 해왔던 그것들은, 스케이트 보드를 좋아하고, 연애에 빠져있는 하지만 라틴어 따위의 존재 의미에는 공감을 가지지 못하는 딸에게는 별 의미없는 '과거'가 되어가는 것에 마르게리타는 어쩔 줄 모른다. 그저 육친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 앞에서 무너져 가는 '과거'에 대한 허우적거림이다.
그런 마르게리타의 혼돈은 자기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한 회한으로 이어진다. 거만한 헐리웃 배우에 대한 불편함은 알고보니 배우의 기억 장애에 대한 오해로 이어지면, 그런 배우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못한 자기 중심적인 감독 마르게리타의 방식으로 국면은 전환된다. 어머니의 간병도 어머니보다 그런 어머니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갖춰지지 못한 딸의 입장이 우선한 것처럼.
임종의 후일담으로 얻어지는 삶의 혜안
그렇게 길지 않은 어머니의 투병 시간은 마르게리타란 중년의 인물, 자기 자신에 대한 여러 관점에서의 '반추'를 동반한다. 그리고 그런 반추의 시간 끝에 어머니는 자식들의 곁에서 세상을 떠나고, 그 장례의 형식에 휩쓸려가던 자식들은 그 속에서 비로소 어머니의 지난 시간을 만난다. 그저 허무하거나, 어린 딸의 버거운 라틴어 공부로만 남았던 지식의 전수자가 아닌, 그 누군가에게는 '어머니' 같았던 스승으로서 세계를 가진 '역사'가 된 어머니를. 그래서 그 어머니의 존재를 발견한 딸은, 육친의 어머니를 잃었지만 역사로서의 어머니를 만나 눈물젖은 웃음을 보인다. 난니 모레티 감독이 오빠로 비껴선 이 영화에서 이렇게 어머니와 또 다른 어머니인 중년의 딸, 그리고 그녀의 딸로 이어지는 여성 삼대의 삶의 역사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평론가 오동진은 <나의 어머니>를 통해 오래 보수 정권을 겪은 감독의 피로함 혹은 상실을 강조했지만, 그럼에도 결국 영화 <나의 어머니>의 말미에서 빛난 건 마르게리타의 미소이다. 나이들어 가는 삶은 권태와 피로를 누적하지만, 삶이 종착역에 이를 때까지 쉽게 내려놓을 수는 없는 일. 그 쓸모없는 라틴어 선생이라는 형식을 넘어 스승이라는 내적 존재의 의미는, 꾸역꾸역 영화를 이어가는 중년의 감독 마르게리타에게 번민의 끝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니까. 결국 그 싫어하던 라틴어 공부의 재미를 할머니의 자상한 지도 아래 알아가던 딸처럼, 마르게리타의 삶 역시 지금은 현실의 과정 속에 희화화될지라도 그 속에서 베리와의 교감을 가지듯 이해받을 수 있을 날이 있으리니. 난니 모레티 감독이 여전히 영화를 만들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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